“제가 할게요. 그냥, 하면 되죠.”

단편소설

by 박현수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필터라도 씌운 것처럼 건조했다. 감정도, 수사도, 심지어 의문조차 거세된 문장이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용산전자상가 3층 구석, 이름도 없는 수리점의 기름때 낀 간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공기 중에는 놋쇠와 먼지, 늙은 플라스틱이 타는 냄새가 났다. 내 앞에는 죽어버린 ‘크로노스 1호기’가 입을 벌린 채 누워 있었다. 이 기계는 내 전 재산이자, 내 회사의 심장이었다. 낡은 베타맥스 테이프의 아날로그 신호를 디지털로 변환하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내 발명품. 그리고 일주일 전, ‘아크 미디어’와의 계약이 파기된 이후, 그것은 마치 제 운명을 알기라도 한 듯 연기를 뿜으며 멈춰 섰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오수현, 이 수리점의 주인이었다. 그녀는 내 또래로 보였지만, 십 년은 더 납땜 인두를 쥐었을 법한 투박한 손과 모든 것을 해체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듯한 집요한 눈을 가졌다. 지난 사흘간, 나는 용산의 내로라하는 기술자들을 모두 만났다. 그들은 모두 크로노스 1호기 앞에서 고개를 저었다. “이런 건 처음 보는데…”, “설계도 없이는…”, “그냥 새로 하나 만들지 그래요?” 같은 말들을 레퍼토리처럼 반복하면서.


오수현은 달랐다. 그녀는 내 절박한 설명은 듣는 둥 마는 둥, 테스터기를 들고 기계의 내부를 탐색할 뿐이었다. 그리고 사흘째 되던 날, 처음으로 내게 전화를 걸어 저 말을 던진 것이다. ‘그냥, 하면 되죠.’ 그 말은 절망의 늪에서 건져 올린 지푸라기가 아니라, 늪의 바닥을 딛고 솟아오르라는 단단한 발판처럼 느껴졌다.


“수리… 가능하다는 뜻입니까?” “수리랄 게 있나요. 전원부 설계가 잘못됐어요. 이대로는 계속 죽을 텐데.” “그럼…” “새로 짜야죠, 보드.” “…….”


“제가 할게요. 그냥 하면 되죠.”

나는 그 순간, 내가 이곳에 온 이유가 단순히 기계를 고치기 위함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크로노스 1호기의 설계도를 그녀 앞으로 밀었다. 먼지와 손때로 너덜너덜해진 종이였다. “같이 하죠. 아니, 오수현 씨가 우리 회사로 와요. 내가 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지만, 이 기계가 다시 살아나면… 그걸로 만들어낼 세상의 지분은 얼마든지 줄 수 있어요.”


그것이 나의 첫 번째 운이었다. 나는 고장 난 기계를 통해, 죽어가던 내 꿈을 다시 설계할 사람을 만났다.


나의 두 번째 운은 첫 번째 운보다 더 기이한 방식으로 찾아왔다. 그것은 실패의 잔해 속에서 피어났다. ‘아크 미디어’는 국내 최대의 필름 아카이브를 보유한 회사였다. 그들이 보유한 수만 개의 필름과 테이프를 디지털로 변환하는 계약은, 내 작은 회사 ‘크로노스케이프’를 단숨에 일으켜 세울 동아줄이었다. 그 계약을 따내기 위해 몇 달을 매달렸고, 담당자였던 김민준 과장과 수십 통의 메일과 전화를 주고받았다.


김민준 과장은 언제나 정중했고, 논리적이었으며, 내 기술의 가치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내게 계약 파기를 통보한 사람이기도 했다. “윗분들의 결정입니다. 안정성이 검증되지 않은 신생 업체에 회사의 역사를 맡길 수는 없다고 하시네요.” 그의 목소리에는 희미한 유감과 체념이 섞여 있었다.


크로노스 1호기가 오수현의 손에서 ‘크로노스 2호기’로 재탄생하던 날,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김민준이었다. 그는 아크 미디어에 사표를 냈다고 했다.


“박 대표님, 혹시 사람 구하십니까?”


그는 내가 꿈꾸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나는 낡은 필름을 디지털로 되살리는 기술자였지만, 그렇게 되살린 수만, 수십만 개의 데이터를 어떻게 분류하고, 검색하고, 유의미한 정보로 엮어낼지에 대한 ‘설계도’가 없었다. 나는 창고지기였지, 도서관 사서가 아니었다.


김민준은 사서였다. 그는 아크 미디어의 창고에서 썩어가던 데이터들이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그것들이 어떻게 연결되어야 새로운 역사와 이야기가 되는지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는 회사의 근시안적인 결정에 환멸을 느끼고 스스로 걸어 나온 것이다.


“제가 구상하는 시스템이 있습니다. 대표님의 기술과 제 시스템이 만나면, 우린 그냥 ‘변환’을 하는 게 아니라, ‘시간의 도서관’을 짓는 겁니다.”


아크 미디어의 계약 파기는 내게 사망 선고였다. 그러나 그 죽음의 문턱에서 나는 내게 가장 필요했던 사람을 얻었다. 마치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가장 비옥한 땅이 드러난 것과 같았다.


그 후, 우리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용산의 작은 수리점은 먼지 쌓인 공장 한 켠으로, 그리고 마침내 번듯한 사무실로 바뀌었다. 오수현의 작업실에서는 언제나 클래식 라디오가 흘러나왔고, 그 선율 위로 인두가 지글거리는 소리와 타닥거리는 키보드 소리가 섞였다. 그녀는 괴팍할 정도로 완벽을 추구하며 크로노스 시리즈를 3호기, 4호기로 진화시켰다.


김민준은 거대한 화이트보드 앞에서 몇 날 며칠을 보내며, 흩어진 데이터들을 위한 거대한 집을 설계했다. 그의 손끝에서 죽어 있던 영상 클립들은 ‘1988년, 서울, 골목길, 아이들’ 같은 꼬리표를 달고 살아났고, 잊혔던 가수의 목소리는 음역대와 창법에 따라 분류되어 새로운 음악사로 재탄생했다.


나는 그 둘 사이를 오가며 지휘자가 되었다. 기술의 언어와 시스템의 언어를 번역하고, 때로는 둘의 고집 사이에서 중재하며, 우리가 함께 짓는 도서관의 미래를 사람들에게 설득했다. 일이 잘 풀리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돈이 없어 월급을 미룰 뻔한 적도 있었고, 거대한 경쟁사의 방해에 밤잠을 설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단 한 번도 절망스럽지는 않았다.


어느 늦은 오후, 우리는 마침내 복원에 성공한 1970년대의 단편 영화를 함께 보고 있었다. 화질은 조악했고, 사운드는 갈라졌지만, 흑백 화면 속에서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모습은 생생했다.

“저 사람들, 자기들 모습이 50년 뒤에 이렇게 보일 줄 알았을까.”

김민준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게요. 그래도 참 좋다.”

오수현이 무심하게 대꾸하며 믹스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나는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나의 비전과 끈기를 칭찬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나의 성공은 탁월함의 결과가 아니라, 기적에 가까운 운의 합주였다는 것을. 고장 난 기계 앞에서 만난 괴짜 기술자와, 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계약의 담당자. 계획하거나 예측할 수 없었던 두 번의 만남.

그 운이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용산의 어느 구석에서 늙은 플라스틱 타는 냄새를 맡고 있었을 것이다. 화면 속에서 잊혔던 시간이 빛을 되찾는 것처럼, 나의 시간 역시 그 두 사람을 만나 비로소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빛은, 그 어떤 유명한 상보다도 밝고 따뜻했다. 우리는 여전히, 그냥 우리가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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