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체스터 바이 더 씨

무슨 일이 일어나든 삶은 계속 돼.

by 현스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른한 일요일 오후 넷플릭스에서 가볍게 볼 만한 영화를 뒤적이다 찾은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여운은 깊게 남았다. 아마도 영화를 보고 난 후 여운을 즐길 시간도 없이 외출해야 하는 일정이 있었다면 이 영화를 본 것이 후회됐을 정도였으니까. 영화 내내 밀도 있게 표현되는 리(케이시 에플렉)의 연기를 따라가다 보면 인물의 심리 묘사가 잘 나타나 있는 두꺼운 소설책 한 권을 읽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흐릿한 날씨와 어울리는 슬픈 음악과 함께 첫 장면이 시작되지만 배 위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리(케이시 에플렉)와 조(카일 챈들러), 패트릭 (루카스 헤지스)을 보고 있으면 배경과는 다르게 평화로워 보인다. 하지만 그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건물 관리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리는 불만 가득한 사람으로 묘사되어 그 전과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자신의 돌이킬 수 없는 실수로 인해서 가족이 떠난 뒤 그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어서 그 동네를 떠나지만 조(리의 형)의 죽음으로 예전 살던 동네로 돌아오게 된다. 조는 자신의 아들 패트릭의 후견인으로 리를 지목해놓았었다. 하지만 리는 그 이야기를 유언장에서 처음 들었다. 거부하기엔 패트릭에 대한 책임감이 크게 느껴지고 받아들이기엔 자신이 그 동네에서 살아가기 힘든 현실 속에서 겪는 리의 모습이 영화 내내 그려진다.


우리는 기억을 지우고 싶을 때 훌쩍 떠난다. 누군가를 잃었을 때, 하던 일에 실패했을 때 등 무언가를 잊는 방법 중 자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그 장소를 떠나는 것이다. 떠난다고 모든 것이 없던 일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눈에 보이지 않을 때 그것에 대해서 덜 신경을 쓸 수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미치는 공간의 힘이 크기 때문이다. 느껴지는 크기는 다르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해봤을 것이다.


리도 마찬가지다. 되돌릴 수도 고칠 수도 없는 자신의 끔찍한 실수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자 자신이 지내던 공간을 떠나지만 그 죄책감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실수가 일어난 곳으로 다시 돌아와서 지내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일상에서 지나치는 대부분의 것들이 날카롭게 자신의 아픈 기억을 찌를 것인데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리는 패트릭을 책임지기 위해서 그 동네에서의 삶을 견뎌내려는 시도를 한다. 예민하고 날카로운 모습으로 자신이 힘들다는 것을 숨기려고 하지만 모든 일이 결정되고 패트릭과의 대화에서 삼촌이 왜 떠나야 하냐는 물음에 “못 견디겠어”라고 말하는 리의 대사에서 그동안 그가 떠올리기 싫은 기억과 마주하며 견뎌야 했던 무게감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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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하나 더 있는 곳으로 구할 생각이야, 소파 침대를 하나 더 사던가"

"그건 왜?"

"... 너 가끔 오라고"

"보스턴으로 대학 오면 자고 가도 되고"

"대학 안 가"

"그러면 뭐 남는 방은 창고하면 되지."



첫 장면을 제외하고 리와 패트릭의 관계는 서로를 많이 생각하지만 살갑게 대하지 못하는 태도로 일관되는데 그 땐땐하게 느껴지는 관계가 영화의 재미를 만들어준다. 패트릭이 없었다면 리의 갈등은 없었을 것이다. 형의 장례를 마친 뒤 살던 곳으로 돌아가서 지긋지긋하지만 그럼에도 익숙해진 생활로 살아가면 되니까. 자신의 벽이 허물어지고 다시 겨우 쌓은 그 벽으로 들어가면 되니까. 하지만 패트릭이 리의 삶 속에 많이 들어와 있다. 아픔을 견디면서라도 돌봐줘야 한다. 패트릭과 함께한 시간도 리의 삶에서 행복했던 부분이니까.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었던 것은 쉽게 잊을 수가 없다.




영화는 일상에서 일어나기 희박한 일이지만 그래도 어딘가에서는 일어날 법한 이야기들을 그린다. 영화에서 리가 겪는 고통도 누군가는 실제로 겪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서 그들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리의 인생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누가 알았을까? 장작을 넣은 뒤 안전망을 하지 않았던 일이, 별 일 아니라는 듯 소홀하게 생각하고 넘어갔던 것이 인생에서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되어서 평생 그 일에 대한 죄책감을 견디며 살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렇게 내가 계획하지 않고, 어쩔 수 없이, 한 눈을 판 사이, 조정할 수 없고 되돌릴 수 없는 실수라는 것은 인생에서 야속하게만 느껴질 것이다. 비극은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일어나니까.

솔직히 말하면 영화의 내용은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되돌릴 수 없는 실수로 가족이 떠나고 그것에 대한 죄책감을 못 이겨서 다른 도시로 떠나지만 다시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와 옛 기억을 마주치는 것. 내용만으로 봤을 때는 이 영화 만의 특별함이 느껴지지는 않지만 배우들의 적절한 인물 묘사, 끊임없이 자신의 내부에 저항하는 것을 멈출 수 없는 탄탄한 심리 묘사, 리가 아픔을 견디고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마주하면서 보이는 모습이 영화를 이끌어간다고 느껴졌다.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상처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 피부에 난 상처들은 시간이 지나면 아물지만 기억과 마음에 난 상처들은 아물지 않는다. 훌쩍 떠난다고 해서 지난 일들이 없던 일로 되지도 않고 살아간다면 언제 어디서든 그 상처들은 떠오르기 마련이다. 내가 한국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처음 밟는 땅에 가서 산다고 하더라도, 커피를 마시다가 떠오를 수 있는 것이 기억의 상처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것이니까,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우리의 시간은 계속되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것이니까. 우리는 그것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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