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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미국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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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una Kim May 31. 2018

굿바이, 애틀란타

#1. 이사 준비


친구에게서 쿠바 여행을 간다는 연락이 온 건 뉴저지로의 이사 계획이 확정되고 난 이후였다.

갑자기 휴가를 쓰게 되었다며 몇 년 전 내가 다녀온 쿠바가 어땠는지를 묻는 연락이었는데, 그 때만 해도 '우왕 부럽다'는 생각 뿐, 내가 그녀와 함께 쿠바 여행을 하게 될 거라곤 전혀 생각도 못 했다.


우선 이사 준비로 처분하고 포장할 짐이 너무 많았다.


포장이사 견적을 알아보니 짐을 최소화 한다 해도 1800불(한화 약 200만원)이 훌쩍 넘는 가격이라, 우리가 직접 짐을 싸서 택배로 붙이거나 차로 옮기고, 남는 돈으로 새 집에서 새 가구를 사자! 는 생각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이사 준비를 스스로 했다.


우선 애틀란타 한인 커뮤니티에 세탁기와 건조기, 책상, 의자 등 가구부터 시작해서 거울, 그릇, 장식용품 등 각종 생활 잡화를 파는 게시글을 올렸다. 주중 주말 할 것 없이 물건을 구경하러 오시는 손님들과 약속을 잡고 물건을 팔았다. (물건이 팔릴 때는 나름 재밌었지만, 그 와중에 진상 손님들이 있어서 진귀한 경험이었다. 가령, 한 시간 동안 본인의 힘겨웠던 미국 이민/정착 스토리를 이야기하며 혼자 감정에 북받쳐 눈물을 흘리시던 아주머니...) 물건을 다 팔고 나니 무려 700불 정도의 현금이 생겼다. 



채워넣어야 할 박스들과 뽁뽁이와 팔려고 진열해둔 물건들 사이에서 뻗어버렸다. 아직도 짐 정리가 안 끝났다는 사실이 웃겨서 웃는 중.


처분 막바지에는 벽걸이 거울 하나 사러 온 자취생에게 쌀과 잡곡을 나눔하고, 욕실용품이나 반 밖에 못 쓴 세제 같은 것들도 친구들에게 나눔했다. 그 외의 가구나 안 입는 옷 같은 것들은 Goodwill에 기부하고, 마지막까지 처분하지 못한 물건들은 결국 차에 실을 공간이 없어 눈물을 머금고 버려야 했다...


옷, 신발, 책, 골프채 같은 것들은 택배로 부치기로 했다. 박스를 구해와 적당한 무게의 짐을 담고 테이프로 꽁꽁 싸매는 과정을 열여덟 번 반복했다. 나머지 짐은 다 차에 싣고 가야지 했는데, 결국 차에 공간이 부족해서 박스 하나를 더 사, 총 19개의 박스를 택배로 부쳤다.


그 와중에 또 정든 이웃들, 친구들, 회사 사람들과 마지막 송별회를 하느라 바빴다. 특히 엄마처럼 챙겨주던 (그리고 이번 이삿짐 포장의 Kitchen 파트에 큰 기여를 해주신) 나의 아줌마 친구들... superficial한 관계가 만연한 이 미국 사회에서 또 어떻게 이런 사랑스러운 아줌마 친구들을 사귈 수 있을까?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던 지우도 너무 보고싶을 것 같다. 이 과장님과 현정언니랑 인사하는 것도 너무 아쉬웠지만, 요즘 들어 말을 너무 예쁘게 재잘재잘 잘 해서 특히 더 너무 (!!!) 귀여운 지우를 한 동안 못 본다는 사실이 매우 슬펐다.


나의 아줌마 친구들과 너무 귀여운 지우!



#2. 여행 계획


이런 여러가지 일들이 정신없이 진행되는 가운데 전달된 친구의 여행 소식은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친구에게는 "내 몫까지 재밌게 다녀와라"는 카톡을 남겼다. 

그런 나에게 여행 바람을 불어넣은건 다름 아닌 남편이었다.

친구의 연락을 받은 다음 날 아침, 회사에 출근해서 일하고 있는 나에게 갑자기 걸려온 남편의 전화.


남편: "여보, 아무래도 여보가 친구랑 같이 쿠바를 가는게 맞는 것 같애."

나: "응?"

남편: "여보가 다음 주부터 출근을 안 하기도 하고. 친한 친구랑 그렇게 일정을 맞춰서 해외 여행을 가는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

나: "근데 이사가 너무 끼여 있는데..? 여행 간다 해도 일주일 밖에 안 남았는데 티켓 너무 비싸지 않을까?"

남편: "짐 싸는 것만 같이 해주면 운전해서 옮기는 건 내가 할 수 있어. 애틀란타-하바나 비행기 티켓 찾아보니까 일주일 뒤에 것도 500불이면 직항 탈 수 있는데? 놓치기 너무 아까운 기회지 않아?"

나: "음.. 그런데 그 다음 주말에 또 바로 수진이 (시동생) 졸업전시회가 있는데? 그건 어떻게 가지?"

남편: "저번에 나 한국 간 동안 여보가 혼자 끊어놓은 비행기 티켓 있잖아. 밤 비행기니까 그 날 오전에 애틀란타로 와서 비행기 타고 수진이 학교 있는 쪽으로 오면 되지. 공항에 내가 데리러 가든지 할게."

나: "(오... 똑똑한데?)"


남편의 머리 속에는 이미 마스터 플랜이 세워져 있었다. 

애틀란타에서 뉴저지까지는 차로 꼬박 열 대여섯 시간이 걸린다. 그렇다. 대여섯 시간이 아니라, 열 대여섯 시간이다. 남편은 지금 내게 그 장거리 운전을 혼자 하겠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보살이세요?' 하는 마음이 들었다가, 나중에는 '나라면 정말 하기 싫을' 16시간 장거리 운전을 남편에게 온전히 맡긴다는게 너무 미안해서 하루에도 열 번씩 마음을 바꾸며 갈등했다.


갈까? (하지만 나도 혼자 하기 싫을 일을 남편에게 떠넘기고 가는 건 정말 싫은걸. 여행 가서도 계속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아.)

말까? (하지만 정말 놓치기 아까운 기회인걸. 내가 이 친구랑 마지막으로 여행을 간게 언제였더라...)


하룻밤 고민하는 사이 비행기 티켓 가격이 50불 정도 올랐고, 가격이 오른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결국 티켓팅을 했다.


쿠바로 출국하기 전 날 오전 내내 우리는 함께 애틀란타의 아파트를 깨끗이 비우고, 차를 짐들로 꽉꽉 채우고, 공항 근처 호텔로 운전해 왔다.

남편은 호텔 침대에 누워 잠깐 눈을 붙인 뒤, 해질녘 즈음에 서둘러 차를 몰고 북쪽으로 떠나갔다.

호텔에 혼자 남은 나는, 익숙하고 편안했던 첫 번째 "우리의" 공간을 영영 떠난다는 어수선한 마음과

밤 운전을 하는 남편에 대한 걱정과, 다가올 여행에 대한 기대, 또 그 이후에 다가올 앞으로 몇 년간의 내 인생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이사 준비로 쌓인 피곤 들 사이에서 허우적거리며

머리가 복잡해 새벽까지 잠이 들기가 어려웠다.


결국 글과 그림을 끄적이다 남편의 안부를 확인한 후 잠들었다.



쉽게 잠들 수 없는 밤.

떠나기 직전의 밤.

남편이 밤길을 운전하며 떠나가고 있는 밤.

끊임없이, 누군가 떠나가고 또 떠나오는

호텔과 공항.

이국적인 이름의 도시와 나라들.

여기는 어디이고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되묻게 하는, 도돌이표가 붙은 밤.

곁에 있는 사람의 손을 다시 꽉 쥐면서 내 존재를 확인하게 되는 (아뿔싸, 그는 지금 먼 곳에서 운전 중)

이 도시의 마지막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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