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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una Kim Jun 17. 2018

쿠바에 두 번째로 다녀와 보니

쿠바 2018 여행기


처음으로 쿠바를 방문한 것은 2016년 가을이었다.

마침 금요일이었던 미국의 노동절과 거기에 이어지는 주말을 활용해 3박 4일의 일정을 짰다. 당시에는 미국-쿠바 직항 비행기가 없었기 때문에 멕시코 칸쿤을 경유해서 오가느라 이동 시간도 길었다. (우리가 다녀온지 불과 한두 달 뒤에 더 싸고 빠른 직항 노선이 생겼다.)

짧은 일정 때문에 수도인 하바나 외의 다른 도시에는 갈 겨를이 없었다. 하바나에서 제일 멀리 갔던건 버스를 타고 한 시간 거리의 해변에서 물놀이를 한 것. 그래서 쿠바, 하면 하바나의 면면들이 먼저 떠올랐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어디를 가나 "내가 도와줄게. 여기 아주 좋은 곳이야." 라며 우리를 유인하던 호객꾼들. 그들은 우리가 길을 헤매거나 괜찮은 식당을 찾아 어슬렁거릴 때 도움을 주었지만, 마지막엔 꼭 자신의 어려운 사연을 짧은 영어로 풀어내며 돈을 요구했다. 호객꾼들이 데려온 관광객에게는 식당에서조차 더 비싼 가격의 메뉴판을 내놓는다는 사실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나와 남편은 심지어 클럽 안에서 놀다가도 당했다. 같이 클럽에서 놀던 두 커플이 있었는데, 새벽에 같이 택시를 쉐어하면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사실 쉐어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우리가 모든 요금을 다 내는 것이었다) 자기들을 우리 숙소에 재워달라며 아주 끈질기게 매달렸다. 내일 낮에 꼭 같이 놀자고 삼십 분 동안 실랑이 같은 설득을 한 끝에야 무사히(?) 우리 둘만 숙소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외에도 강렬하게 남은 인상들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 어지러웠던 근현대 역사를 방증하듯 여기저기 붙은 체 게바라의 얼굴들과 'Revolucion' 싸인들,

 - 변기는 있지만 변기 커버는 없는 화장실과 일부러 물건을 감춰놓은 것 마냥 진열대가 휑한 상점들,

 - 뉴욕의 유명 재즈클럽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실력파 뮤지션들과 늦은 (혹은 이른) 새벽까지 지치지도 않고 살사를 추며 노는 사람들,

 - 그리고 에메랄드 색의 예쁜 캐리비안 비치 등 이다.  


미국에 캠벨 수프가 있다면, 쿠바엔 정치 프로파간다가 있다



2년 만에 다시 찾은 2018년의 쿠바는, 내 기억 속의 쿠바와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했다. 비교적 넉넉했던 일정 덕분에, 그리고 함께 여행한 친구들의 배려 덕분에, 이번에는 하바나에서 차로 다섯 시간이 걸리는 '트리니다드'라는 오래된 도시에도 다녀올 수 있었다. 하바나와 트리니다드에서 새롭게, 혹은 주의 깊게 바라보았던 장면들을 떠올려본다.


 - 쨍한 화이트와 마린 블루가 섞인 플라워 패턴의 천으로 헤어 밴드와 원피스를 맞춰 입은 여인. 지나가던 행인이 아는 사람이었는지, 립스틱 바른 얼굴을 생긋거리며 반갑게 대화하고 있었다.

 

 - 줄에 매단 바구니에 열쇠를 담아 2층에서 1층으로, 다시 1층에서 2층으로 올리고 내리고 하던 아주머니들.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몰래 치킨 시켜먹을 때 하던 거랑 똑같다며 나와 친구가 연신 사진을 찍어대자 1층의 아주머니는 눈을 찡긋하며 걸어가셨다. 집에 열쇠가 하나 밖에 없어서 그런거였을까?


 - 쓰레기가 둥둥 떠다니는 말레꽁 해변에서 줄 하나로 고기를 낚던, 사뭇 진지한 표정의 남자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상 낚시꾼들은 죄다 남자다.) 온 몸에 돌기가 뾰족뾰족 돋은 특이한 물고기를 발견하고서는 나도, 내 옆에 서 있던 쿠바 소년도, "우와!" 소리를 지르며 친구들의 동의를 구하려 바쁘게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 어두운 밤의 공원에서 나란히 벤치에 앉아있던 중절모 쓴 아저씨 둘. 벤치 앞에 흰 색 천으로 좌판을 깔고 조그마한 뭔가를 팔고 있어서 나는 내심 수상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그들이 팔고 있던 것은 '껌'이었다. 롯데 껌처럼 생긴, 롯데 껌 맛이 나는, 은박지에 쌓인 껌들. 나는 그 옆에 그림자처럼 앉아서 아저씨들을 그렸다. 나중에 그림을 보여드렸더니 무척 좋아하시며 본인의 이름과 집 주소, 전화번호 등을 그림 위에 적어주셨다. 그리고 나와 친구들에게 팔던 껌을 한 알씩 나눠주셨다. 친구는 "Gracias. (감사합니다)"를 꾸벅 허리를 숙여 정중한 태도로 껌을 받았다.



이번 여행에선 음식도 잘 먹고 다녔다. 이것은 지난 여행을 통해 쿠바 음식에 대한 기대치를 완전히 낮춰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수도 있다. 그 때는 관광객 식당과 현지인 식당이 확실하게 나뉘어 있다는 사실에 어중간한 죄책감을 느꼈었다. 관광객용 화폐 쎄우쎄(CUC)와 현지인용 화폐 쎄우페(CUP)가 동시에 통용되기 때문에 이중 물가는 사실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1 CUC는 무려 약 25 CUP의 가치를 가진다. 

이번에는 그냥 그 현상을 팩트로 받아들이고 필요할 때 마다 적절히 활용했다. 맛있는걸 먹으며 기분을 내고 싶을 땐 비싼 식당에 가고, 바가지 쓰일게 뻔한 상황에서는 그냥 간단하게 배만 채울 요량으로 비싼 식당의 10분의 1 가격에 식사와 음료와 디저트를 모두 즐길 수 있는 곳을 찾았다. 다만 현지인 식당은 간판도 잘 없고 무심코 지나치기 쉬워서 찾는데 추가적인 노력을 들여야만 했다. 이 모든 걸 쿠바 사람들이 (좋으나 싫으나)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생각하니, 나도 마음이 편했다.
  


처음 쿠바에 갔을 때 받았던 가장 큰 인상은 '결핍'이었다. 고급진 호텔에서 와이파이가 잘 안 터져도, 화장실에 변기는 있는데 변기 커버가 없어도, 피자에 토마토 소스 대신 토마토 색 액체가 올라가있는 걸 보고 '헉 이게 뭐야' 라고 놀라면서도, 동시에 '아, 쿠바니까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식이었달까. 지금까지의 여행지와 달라서 분명히 신선하고 재미있었지만, 누가 공짜로 줘도 안 받을 것 같은 물건들이 럭셔리로 취급받는 이 사회에서 '결핍'은 눈 감아도 선명할 정도로 너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하바나 공항에 발을 딛기 직전까지 내가 속해 있던 사회와 공간들을 자꾸만 물질적인 기준으로 비교하게 되었고, 그 어떤 것도 하바나에 물질적으로 더 풍부한 것은 없었다. 하다못해 비행기 안에는 쿠션이 좋은 의자도 있고, 비행기 화장실에는 변기 커버와 휴지, 손 씻는 비누도 있었다. 모두 하바나에서는 찾기 어려운 것들이다.


거만하게도, 이번에 다시 찾은 쿠바에서는 지금 이대로 너무 좋다, 라는 생각을 했다. 쿠바에는 물질적인 결핍 때문에 필연적으로 존재하거나 지속될 수 밖에 없는 것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한국에서 자라고 미국에 살고 있는 21세기 자본주의 사회인의 눈에는 '올드한' 것으로 비치는, 아무리 좋게 봐줘도 '아날로그' 이상은 못 되는 것들이었다. 가령, 동네 사람들과 지인들의 연락처들을 빼곡하게 담고 있는 전화번호부 같은 것이다. 좋지 않은 펜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적힌 여러 이름과 전화번호가 노트 앞 뒤로 빽빽하다. 종이는 습기와 세월을 먹어 얇고 눅눅하다. 고속도로를 활보하는 마차도 신기했다. 쿠바에는 자동차를 국내에서 생산할 능력이 없는데다가, 엠바고 때문에 해외에서 수입도 할 수 없다. 그래서 대도시를 벗어나면 도로 위에 자동차가 얼마 없고, 대신 마차들이 끊임없이 등장했다. 미국이나 한국에선 관광지 정도는 가줘야 볼 수 있는 말이 끄는 마차를, 쿠바 사람들은 백 퍼센트 필요에 의해 타고 다닌다. 아직도 말이 주요한 교통수단이다.


나는 왜 이런 것들에 편안함과 애정을 느꼈을까? 잘 모르겠다. 가진 자의 여유같은 걸까? 원치 않아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느긋함이 좋았던 것일까? 기술도, 환경도, 사람도 모두 빠르게 변화하는, 내가 속한 사회의 속도감이 달갑지만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쿠바에서 보고 듣는 것들이, 나의 뇌 어딘가에 기록되어 있을 20년 전 시골 할머니댁에서의 장면과 냄새, 소리와 상당 부분 일치하기 때문일 수도. 사랑하는 어떤 것, 한 때 소중했으나 지금은 어떤 수를 써도 움켜쥘 수 없는 것들이 쿠바에서는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함께 여행한 친구는 나의 이런 넋 나간 소리에, 아무리 그래도 사람들이 해외여행의 자유를 제한받고, 국가의 사정 때문에 개인이 더 높은 삶의 질을 보장받지 못하는건 엄청 불공평하고 잘못된 거라고 일침을 놓아주었다. 그것은 참으로 맞는 말이었기에 나는 더 반박을 해보려고 노력했으나 헛수고였다. 소수이지만 해외여행 경험이 있는 쿠바 사람들도 있고, 쿠바에서 인터넷 연결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자의 부족을 머리로, 또 피부로 느끼며 괴로워한다. 불과 한 달 전에는 쿠바 국내선 여객기가 추락해서 110명이 숨지는 안타까운 사고도 있었다.


환상의 시간 여행은, 말 그대로 '여행'이기 때문에 '환상적'이었다.

쿠바 사람들의 생활이 나의 일상이 된다면, 나는 아마도 다시 물질적인 기준으로 이쪽 사회와 저쪽 사회를 비교하게 될 것이었다. 그들의 일상이 조금 더 자유롭고 풍요로워지기를, 그래서 각자의 삶이 좀 더 평안하고 여유로워지기를 소망한다. 그 계기가 미국과 쿠바 간의 국교 정상화든, 쿠바 내에서의 사회 제도 변혁이든 말이다.

다음 번에 다시 찾을 쿠바의 모습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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