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느끼는거지만 난 참 밤잠이 없는 사람이다.
밤 열한 시, 열두 시가 되면 하루 중 그 어느 때 보다도 집중력이 향상되고 감수성과 창의력이 솟구친다.
오늘만해도 그렇다. 어젯 밤 늦게까지 영화를 보다 잔 탓에 낮 동안 회사에서 그렇게 피곤하고 힘들었는데, 저녁 먹고 잠깐 쉬고 운동하고 샤워까지 하고 나니 기분이 너무 상쾌해져서 밀린 설거지도 하고, 오랜만에 간단한 일러스트도 그려보았다. 시간 가는줄 모르고 집중한 탓에 매우 뿌듯하다.
반면 아침잠은 정말 많다. 주말에 알람을 안 맞춰 놓고 잠들면, 다음 날 아침 열한 시가 넘어서 일어난다. 지난 주말에도 그렇게 열 시간을 넘게 잤다. 하루가 순간삭제된 기분이라 조금 억울했지만 누굴 탓하랴. 그래서 늦게까지 영화를 감상했다. (악의 순환 고리)
어렸을 때 부터 알고 있었지만 난 참 내향성이 강한 사람이다. 명절에 사촌들이 한 집에 모이면, 나는 그 틈에 끼여있는게 너무 불편하고 싫었다. 오히려 그들은 나랑 놀아주려고 종종 애썼던 것 같은데 나는 관심사가 나와 너무 다른 언니 오빠들이랑 같이 노는게 스트레스였다. (사촌 오빠들은 게임/컴퓨터 덕후였고, 그나마 한 명 있던 사촌 언니는 일 년에 한 번 볼까말까 했는데 소심한 나와 다르게 쿨녀였다.) 친구 관계도 좁아서 제일 친한 친구 한두 명이랑 항상 붙어다녔다. 그룹으로 여럿이 떼지어 다니는건 그냥 내 취향이 아니었다. '우리 우정 포레버'를 외치던 인생의 베프들은 거의 일이 년을 주기로 계속 바뀌긴 했지만, 그 때 그 시절 친했던 친구들은 지금까지 한 명 한 명 이름도 얼굴도 다 기억난다.
성인이 되고 나서 스스로 예전보다 많이 외향적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대학교에 가니까 지금까지 봐왔던 사람들과는 너무 다른 배경의 개성 강한 사람들이 차고 넘쳤다. 나름의 러닝 커브를 거치면서 어느덧 나도 단단해져,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스스럼없이 다가가서 살갑게 굴 수 있게 되었고,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를 즐길 수도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저 깊숙한 곳에 있는 나의 본성은 정말 변하지 않는가보다. 새로운 도시의 새로운 환경에서 차근차근 자리잡고 생활인이 되어가는 나를 가만히 지켜보면, '혼자 하는 일'을 즐기는 경우가 많다. 내가 즐기는 취미 활동들만 봐도 알 수 있다.
요가
수영 (여름 한정)
보드 (최근에 시작)
도자기 만들기
그림 그리기
글 쓰기
뜨개질 (겨울 한정)
책 읽기
모두 타인이랑 말 한 마디 나누지 않고서도, 아니, 오히려 입 다물고 조용히 집중해야만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일들이다. 게다가 요즘은 남편도 한국에 가고 없어서 완벽하게 내 본성에 충실하고 있다. 음식을 주문하거나 전화를 할 때가 아니면 말을 거의 안 한다. 심지어 회사에서도 이메일이나 메신저로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많아서 옆 자리 직원이 잡담을 걸어올 때가 아니면 말할 일이 별로 없다. 어쩌다 말을 많이 하게 된 날이면 안 쓰던 성대를 써서 피로가 몰려온다. (진심임)
사람들이랑 어울리는게 싫은건 절대 아닌데, 딱히 사교성이 없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내면을 파고드는 내가 나도 신기하다. 사람들을 만나서 소통하고 자극받는건 즐거운 일이다. 다만, 여러 사람들에게서 받은 각종 인풋들을 내 것으로 꼭꼭 씹어먹고 소화하는 과정이 나에게는 너무 중요하고 소중하다. 그렇게 소화가 된 상태에서 한 번씩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만큼 편안하고 행복할 데가 없다.
나의 야행성과 내향성은 뭔가 강한 연결고리가 있는게 아닐까 생각한다.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의 시간. 그 시간에 온전히 내면에 집중하는 일이 좋다.
남편이 집에 있을 때는, 각자 다른 방에 있더라도 왠지 백 퍼센트 집중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어떤 때는 일부러 남편을 일찍 재우기도 한다. (남편은 완벽한 주행성 인간)
주행성과 야행성, 외향성과 내향성으로 네 가지 경우의 수를 만들면, 혈액형처럼 사람들의 성격을 분석해볼 수 있지 않을까?
아무튼 내일 아침에도 제 시간에 일어나기는 글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