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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미국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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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una Kim Aug 10. 2018

동거인 관찰일지

1. 제안


얼마 전, 남편이 새로운 제안을 하나 했다.

"우리 일 주일에 한 편씩 글을 써서 서로에게 줄까?"


남편의 제안을 일 주일에 한 편씩 '서로에 대한' 글을 써서 서로에게 보여주자는 것으로 해석한 나는, 남편의 이런 제안이 꽤 로맨틱하다고 생각했다. 그래, 우리가 같이 살고 있긴 하지만 정작 서로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일은 좀 뜸해지긴 했지. 남편은 어디서 이렇게 기특한 생각을 건져 온거지? 내심 설레는 마음을 감추며 나는 대답했다.


"음. 좋지. 그런데 왜 갑자기?"

"그냥. 글을 좀 더 잘 쓰고 싶어서."


글을 잘 쓰고 싶어서 서로에게 일 주일에 한 편씩 글을 써준다?

약간 앞 뒤가 잘 안 맞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어쨌든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적극 찬성의 뜻을 표했다.


며칠이 지난 뒤, 남편에게 슬쩍 물었다.

"나에 대해서 쓰는 글은 잘 되가고 있어?"


남편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여보에 대한 글?"

"응. 나한테 일 주일에 한 편씩 글 써서 보여주기로 했잖아."

"아, 그거. 여보한테 보여준다는 말이지, 글의 주제가 여보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아..."


'아니 왠일로?'라는 생각이 드는 일은 현실에서 잘 일어나지 않는다. 적어도 부부 생활에서는 그렇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서로에 대한 기대치의 최저값과 최고값이 점점 정확해졌기 때문에, 그 범위를 벗어나는 일은 잘 없다.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해본다.




2. 욕망


소중한 기억들이나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글로 잘 표현하고 싶다는 욕망은 늘 있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90퍼센트 이상의 글감은 시도조차 없이 끝나는 실패다. 이것은 모두 내가 게으른 탓이다. 오늘 아침에 팟캐스트에서 '뇌는 손가락 끝에 달려 있다'라는 말을 들었는데, 나한테 하는 말 같아서 뜨끔했다. 손으로 써야 비로소 뇌가 생각을 시작한다는 의미이다. 머릿 속의 아이디어나 계획은 실행을 통해 실체화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반복해서 스스로에게 이야기하는 중이다.)


8퍼센트는 한 편의 글에 다 담기에 너무 소중한 소재들, 또는 거대하다 못해 거룩하기까지 해서 함부로 건들지 못하는 소재들이다. 예를 들면, 가족이나, 가족, 혹은 가족 같은 것. 아주 가끔 가족에 대한 글을 쓰게 될 때도 있지만 그럴 때 마다 정말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한 마디 한 마디 제일 적확한 말로 표현하고 싶어서 시간도 더 많이 걸린다. 그렇게 고민해서 고른 단어들도 나중에 다시 보면 한참 모자라다. 부모님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특히 어렵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할지 모르겠는게 가장 큰 어려움인 것 같다. 결혼을 하고 나서는 '글쓰기 어려운 소재 그룹'에 남편까지 추가되었다. 어쩐 일인지, 함께하는 시간의 양과 질이 두터워질수록 더 어려워진다.


그래서 결국 글로 표현하게 되는 것은 나머지 2퍼센트, 즉 백 개 중에 두어 개 정도 뿐이다. 반올림한게 이 정도다. 나머지 구십여덟 개의 글감에 대해서도 잘 쓸 수 있는 내가 되면 좋으련만...




3. 동거인


어쨌든 내가 오해해서 들은 남편의 제안 덕분에, 나는 잠깐 망상에 잠겼다.  

'일 주일에 한 편씩 남편에 대해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일 년, 이 년 지나면 정말 소중한 자산이 될 텐데.'

'이번 주에는 남편의 어떤 모습에 대해서 글을 쓰면 좋을까?'


역시 사랑하는 남편에 대해 이야기하려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일단 동거인으로서의 남편을 관찰하여 일지를 쓰듯이 써보기로 한다. 파브르 곤충일기 같은 느낌이 될지도 모르겠다.


남편은 아침 여섯 시 정도에 일어나서 일곱 시가 되기 전에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선다. 그 시간에 보통 나는 자고 있거나, 깨어있다 하더라도 비몽사몽의 상태이기 때문에, 세심한 눈길로 남편을 관찰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내가 관찰당하는 쪽에 가깝다.


남편이 퇴근을 하고 집에 오면 저녁 여섯 시 쯤 된다. 우리는 함께 저녁 밥을 지어먹고 뒷정리를 한다. 그 후에는 계속 식탁에 앉아 수다를 떨거나, 예능, 유튜브 등을 보면서 함께 낄낄댄다. 아침 잠에 비해 밤 잠이 많은 남편은, 아홉 시가 넘어가기 시작하면 이제 그만 잘 준비를 해야겠다며 방으로 들어간다. 그의 '잘 준비'는 침대에 누워서 휴대폰을 보거나 책을 읽는 것이다. 보통 한 시간에서 길게는 (내가 계속 말을 걸며 잠들기를 방해하면) 두세 시간 정도 걸린다.


'잘 준비'를 하러 들어가는 남편을 따라 나도 방으로 들어온다. 주로 남편은 침대에 누워있다. 나 역시 침대에 엎드려 누워 함께 책을 읽을 때도 있고, 침대 옆 책상에 앉아서 노트북을 하거나 그림을 그린다. 바로 이 때가 남편을 관찰하기 가장 좋은 타이밍이다. 남편은 하루의 피곤을 풀며 무방비 상태로 퍼져있고, 야행성인 나는 밤의 기운을 받아 예리한 눈으로 한 시간 동안 남편을 관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래 그림은 그 시간대에 발견한 내 동거인의 귀여움이다. 귀여움의 포인트가 내 눈에만 보일 수도 있으니, 이해를 돕기 위해 글로도 명기해보았다.



- 집중하면 튀어나오는 입

- 원래 짧은데 베게에 파묻혀서 더 짧아지는 목

- 에어컨 바람의 냉기를 막기 위해 돌돌 말아 덮은 이불

- 그 와중에 발은 빼먹는 허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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