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미국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yuna Kim Aug 16. 2021

누구의 몸이신지

임신 7주차의 기록

임신을 하고 나서 잠이 많이 늘었다. 내가 직접적으로 근육을 쓰지는 않지만, 임신으로 인한 새로운 신진대사 활동에 나름대로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고 있는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밤 10시에 잠자리에 들고 아침 7-8시에 일어나는 잠만보 생활을 몇 주 동안 반복했다. 보통 새벽 2시쯤 화장실에 가려고 한 번 깨는데, 며칠 전 부터는 새벽 2시 이후의 수면이 선잠 자는 것 같고 개운치가 않았다. 그래서 오늘은 과감히 새벽 6시에 기상해 보았는데, 일기를 쓸 수 있는 정신과 체력이 있다는 건 정말로 좋은 일이다. 낮에는 일 하느라 겨를이 없고, 밤에는 체력이 바닥이다. 내 체력을 바닥내는 주 요인은 다름아닌 입덧! 입덧이 이렇게 힘든 것인 줄 왜 지금까지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았는지. 나의 위산이 얼마나 시큼하고 씁쓸한지 알게 되는 임신. 내 몸에 대해 매일매일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재미난 임신! (물론 반어법이다.)


근 5-6년 간, 특히 요가를 주기적으로 시작하고, 또 에센셜 오일을 알고 나서부터는 더더욱, 나는 어느 정도 내 몸의 신호와 요구사항에 재깍재깍 대처해왔다. 오래 앉아 있어서 허리가 아픈 날에는 저녁에 단 몇 분이라도 요가로 근육과 관절을 풀어주고, 정신이 심란할 때는 오일 롤링이나 디퓨징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몸살이나 감기 기운이 오는 것 같다 싶으면 오히려 운동으로 땀을 내서 물리치는 것도 가능했다. 그렇게 해서 엄청나게 탄력있는 몸매를 만들었다, 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쇠약하거나 쉽게 아픈 몸은 아니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늘 일정하게 최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는 나만의 루틴과 대처 방법들이 있어서 가끔 에너지 레벨이 떨어져도 믿는 구석이 있어 든든했다. 몸과 마음을 자신의 의지대로 제어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 임신과 함께 내 몸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나니, 그리고 당연한 수순으로 정신까지 같이 피폐해지면서, 확실히 깨닫게 된다.


흔히 입덧이라고 하면, 곱게 차려입은 새댁이 음식 준비를 하다가 갑자기 '웁!' 하고 한 손으로 입을 막는 정도의 귀여운 반응을 떠올린다.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입덧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한국형 아침 드라마가 우리에게 심어준 매우 잘못된 스테레오타입 중 하나다. 이게 얼만큼이나 허황된 것냐 하면, 고아였던 입양아가 알고 보니 병원에서 뒤바뀐 친자식이었다거나, 남녀 주인공이 서로 좋아하는데 알고 보니 둘이 남매 사이였다거나 하는, 현실에 절대 있을 법 하지 않은 막장 드라마 시나리오의 수준이다. 물론 입덧을 전혀 하지 않는 축복받은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은 아예 '웁!' 과 같은 반응 자체가 없는 편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현실에서의 입덧은 귀엽기는 커녕, 고통스럽고 더러운 일이라는 것을 나와 내 주변의 다른 입덧하는 임신 동지들을 보면서 깨달았다.


입덧의 세계는 넓고 심오하다. 사실 입덧의 원인부터도 의학적으로 명쾌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임신과 관련된 호르몬 분비 때문이 아닐까 추측하는 정도가 전부이고, 특정 영양분이 부족하면 심하다, 딸보다 아들일 때 더 심하다, 같은 말들이 전래동화처럼 구전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임신 초기에 심하고 구역/구토를 동반한다), 입덧의 지속기간이나 구체적인 양상이 사람마다 다르고 트리거(trigger)와 강도도 복잡다단하다.


나의 경우는 예민해진 후각과 공복 상태에서의 구토가 가장  특징이었다. 후각은 임신 전의 세네  정도  예민해졌다. 남편이 끓이는 멸치 육수 냄새, 전기 밥솥에서 나는  짓는 냄새, 심지어는 냉장고를 열었을  나는 정체불명의 음습한 냄새에도 비위가 상해 구토를 하러 달려갔다. 음식 냄새에만 민감한게 아니라, 오랜만에 꺼내입은 히트텍에 남아있던 섬유 유연제 냄새에도 구토를  정도였다. 원래 섬유 유연제를   쓰는 편이지만 겨울옷은 정전기가 심해 섬유 유연제를 사용했던  같은데,     향이 이렇게 나를 공격할 줄이야. 자려고 누웠을 때 남편 쪽으로 돌아누웠는데 그의 체취가 역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구토가 시작되었을  아무리 빨리 달려도 시간 내에 화장실까지  가면... 일이 벌어진 후의 뒷처리 때문에 난감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공복 상태에서의 구토는 더 심각했다. 문제는 단순히 '배가 고플 때' 구토가 있는게 아니라, 내가 배고픔을 느끼기도 전에 위장은 소화를 끝내고 구토를 내보낸다는 거였다. 아침 첫 공복부터 시작되는 나의 입덧은 아래와 같은 양상이었다.


1. 아침에 눈을 뜬다.

2. 바로 일어나기가 싫어서 침대에 밍기적거리며 누워 있는다. 공복 상태이지만 수시로 트림을 한다.

3.시간이 지나가는 걸 잊고 휴대폰 스크린에 몰두한다.

4. 문득 밥 먹을 때를 놓쳤다는 공포가 엄습한다.

5. 배고픔 대신 미식거림과 울렁거림이 시작된다.

6. 뭐라도 먹으려고 부엌으로 가보지만 때는 이미 늦었고 구토가 시작된다.

7. 배 속에 든게 없으니 눈, 코, 입의 모든 구멍으로 각종 투명한 액체들이 흘러나온다.

8. 구역질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 나면 밥을 먹는다.

9. 배고픔을 느낄 겨를이 없고, 방금 막 내장이 뒤집어지는 경험을 하고 난 터라 많이 먹지 못한다. 평소 양의 반 정도를 먹는다.

10. 한 시간 정도 위장의 평화를 되찾는다.

11. 먹은게 많지 않으니 금방 소화가 되면서 다시 수시로 트림이 시작된다.

12. '밥 먹은지 얼마 안 됐는데...' 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하던 일(보통 회사 일)을 계속한다.

13. 4번으로 돌아가 전 과정을 반복한다.


잠자리에 들 때 까지 계속 이런 식이니, 몸도 마음도 제대로 된 안정을 취할 수가 없다. 오직 수면시간이 그나마 평온한 편인데, 이 때도 무의식적으로 왼쪽으로 돌아 누우면 갑자기 속이 메슥거리고 구토감이 올라온다. (왼쪽으로 누워서 자야 태아에게 좋다는 말이 있던데 나에게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궁이 커지면서 방광이 압박되기 때문에 밤 중 화장실을 더 자주 가게 되고, 우선 몸을 일으키고 나면 공복이기 때문에 트림이 시작되고, 이 때 빨리 다시 잠들지 않으면 구토까지 이어진다. 결국 수면시간도 온전한 휴식이라고 부르긴 어렵다.


이런 생활 패턴에 컨디션 회복을 위한 요가나 운동이 끼어들 틈이 어디 있겠으며, 피폐해진 정신을 가다듬을 독서 시간이나 취미 활동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한국에 있을 때 부터 미리 등록해두었던 도예 공방 수업도 취소하고 전액 환불받아야 했다. 1회 당 수업 시간이 2.5시간이라 도저히 중간에 구토를 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내 어른 생애에 이토록 내 몸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방황한 적은 만취했을 때 밖에 없는 것 같은데... 그 몇 번의 만취 경험으로 '술은 즐길 수 있을 정도까지만' 먹는게 내 신조인데... 내 몸의 통제력이 통째로 날아간 이 상황이 당황스럽다. 몸 속에 1센티미터 밖에 안 되는 쪼끄만 생명체 비스무리한게 생겼다고 몸의 주인인 내가 이토록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어야 하는게 원통하고, 이런 상태로 최소 몇 달을, 어쩌면 출산 직전까지 8-9개월을 이렇게 지내야 할 수 도 있다고 생각하니 눈 앞이 깜깜하다. 왜 모두가 출산의 고통이나 육아의 어려움만을 이야기하고, 임신 중의 고통은 이야기하지 않았는지. 이 세상의 모든 임신 관련 미디어가 원망스러워지는 입덧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 어떡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