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9주차의 기록
임신 9주차에 접어들면서 입덧은 최고조를 달리고 있다. 입덧이 시작됐던 6주차, 7주차엔 '아직 절정이 아니라고? 어떻게 여기서 더 심해질 수 있나?' 생각했는데, 9주차에 들어선 지금은 '아 제발 여기서 더 심해지지만 않게 해주세요'와 같은 마음이다. 입덧에 대한 마인드가 이렇게 바뀌게 된 데에는 괴물의 역할이 크다. 그렇다. 내 위장에는 (자궁이 아닌 위장에는) 못되먹은 괴물이 살고 있다. 장난꾸러기 같이 귀여운 괴물이 아니라, 깐깐하고 다혈질에 난폭하기까지 한 악마같은 괴물이다.
이 괴물은 대략 2-3시간마다 먹이를 먹는데, 일단 한 번 배가 고프기 시작하면 아주 고약한 성질을 부린다. 숙주의 몸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기도 전에, 자기가 들어앉아 있는 방(위장)의 모든 것을 다 바깥으로 집어 던지고 방이 무너져라 쾅쾅쾅 뛰어다닌다. 배가 고픈 경우엔 보통 방 안에 먹을게 없기 때문에 사실 밖으로 내던질게 별로 없는데도 괴물은 개의치 않는다. 방 안에 있는 아주 조금의 물질들까지 모조리 쓸어모으고, 나중에는 방 전체를 바깥으로 던져버릴듯이 난동을 부린다.
덕분에 나는 미식거림, 위산 구토, 위장이 쏟아져나올 것 같은 헛구역질 같이 다양한 증상들을 하루에도 대여섯 번씩 경험한다. 살면서 위산을 구토해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내 위가 매일같이 이런 산성의 물질을 만들어내고 있었다니, 30년 평생 몰랐던 내 몸에 대해서 새로운 걸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한 번은 어찌나 구토를 많이 했는지 토사물에 소량의 피가 섞여 나온 적도 있었다. 적잖이 놀랐는데, 남편이 검색해보더니 잦은 구토로 식도가 긁혀서 그런거라고 알려주었다. 또 한 번은 고춧가루가 좀 들어간 순두부찌개를 먹고 토했는데, 화장실에서 입을 헹궈내고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니 얼굴에 붉고 작은 반점 같은 것들이 주근깨처럼 가득 생겨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세수를 하고 다시 거울을 봤는데 붉은 반점은 그대로였다. 다크서클이 퀭한 눈밑으로 특히 더 심했다. 이것 역시 심한 구토로 인해 얼굴의 모세혈관, 특히 눈 밑의 약한 혈관들이 터지면서 생길 수 있는 증상이라고 했다.
이 괴물은 입맛도 여간 까다로운게 아니다. 밥, 빵, 떡, 과자 같이 탄수화물로 된 먹이를 주면, 적어도 한두 시간은 잠잠해진다. 그러나 구미에 맞지 않는 음식 - 이를 테면, 과일, 주스, 물, 우유, 고구마 말랭이 등 - 을 먹이면 대략 5분 정도 맛보다가 그대로 다시 바깥으로 던져 버린다. 탄수화물을 같이 먹더라도 과일이나 액체류의 비율이 삼분의 일 이상을 차지하면 그 또한 위장 바깥으로 내던져진다. 탄수화물만을 먹더라도 그 양이 충분하지 않으면 괴물은 어김없이 난동을 부리고 음식을 바깥으로 걷어찬다.
덕분에 나는 한 가지 음식을 두 번씩이나 맛보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된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로 이제는 괴물이 받아들이는 음식의 종류와 양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파악이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물이 허기진 타이밍에 맞춰 적절한 종류의 음식을 적절한 시간에 먹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특히 위산 구토는 허기짐에 대한 괴물의 시그널이기 때문에 구토 직후에 바로 무언가를 먹어줘야지만 속이 진정되는데, 구토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음식을 먹어야 하는게 고역이다. 입맛도 없고 음식 맛도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뭔가를 꾸역꾸역 위장에 투입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양이 부족하지 않게!
괴물은 음식 냄새에도 정말 민감한데, 좋아하는 냄새와 싫어하는 냄새가 몸의 원래 주인인 내 입맛이나 취향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서 많이 당황스럽다. 우선 요리하는 냄새, 특히 기름 냄새는 정말 괴롭다. 볶는 냄새, 밥 짓는 냄새, 멸치육수 끓이는 냄새 등 거의 대부분의 요리 냄새가 괴로워서, 남편이 요리를 하는 동안 나는 방문을 꼭 닫고 창문을 다 열어놓은 채로 피신해 있는다. 일주일에 한 번씩 눈이 내리는 2월의 날씨지만 괘념치 않는다.
괴물은 볶은 파, 볶은 양파, 볶은 파프리카, 볶은 고추가루 따위의 냄새를 소름 끼칠 정도로 싫어한다. 그런 냄새를 맡으면 실제로 내 팔과 정수리에는 소름이 돋는다. 파 기름을 베이스로 하는 백종원 선생님의 요리법에 익숙해져있던 나와 남편은 한동안 무슨 음식을 해먹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괴물은 볶은 양파의 향도 기가 막히게 찾아내서, 카라멜라이즈된 양파를 베이스로 끓인 카레도 한 번 입을 대고 나서는 다시 먹지 못했다. 남편이 우리 둘을 위해 끓인 카레 한 솥은 결국 모두 남편의 몫이 되었다. 한 번은 동네 단골 피자집에서 슈프림 피자를 시켰는데, 피자 위에 올라간 양파와 파프리카가 올리브유와 만나서 내는 향이 너무 거북해서 한 조각을 겨우 먹다 말았던 적도 있다.
문제는 다른 채소들도 일단 볶아지면, 볶은 파나 양파 만큼은 아니지만 소량의 소름끼치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볶은 아스파라거스, 볶은 껍질콩 등을 먹으려고 시도해봤지만 한 입 먹고나서는 다시 입을 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런 변화는 최근 1년 간 페스코베지테리언의 식생활을 애써 유지해온 나에게는 너무나 가혹했다. 결국 임신기간 동안은 채식 중단을 선언하고 육고기를 다시 먹기 시작했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채식하는 동안에는 역하게 느껴졌던 고기 특유의 잡냄새가 지금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익힌 채소에서 나는 특유의 풋내라고 할까, 그게 더 거북한 지경이다.
성질도 더럽고 편식도 심한 만큼, 괴물의 식사예절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밥을 먹는 와중에, 밥을 먹고 나서 한 동안, 그리고 허기가 찾아오기 시작할 때 쯤에 괴물은 늘 트림을 한다. 한 번 시작하면 서너 번은 꺽꺽대야 직성이 풀린다. 예의 그 소름 끼치는 냄새와 느낌도 다시 상기된다. 그래도 남편과 함께 있을 때 트림이 나오는건 괜찮은데, 친구와 함께 식사 중이거나, 회사 화상미팅 중일 때는 난감하다. 나 원래 이렇게 매너 없는 사람 아닌데... 나 원래 밥도 엄청 천천히 먹어서 소화도 잘 되는 사람인데... 한 손으로 조용히 입을 가리며 외칠 수 없는 변명을 삼킨다.
한 번은 계속 소화가 안 되는 느낌이고 트림이 너무 심해서, 유튜브에서 '소화불량에 도움 되는 30분 요가'를 찾아 열심히 따라했다. 이런 저런 자세들로 상체와 복부를 스트레칭하는 요가 플로우였다. 답답했던 속도 조금 내려가는 것 같아 만족하며 마침내 마무리 휴식 동작인 사바아사나 자세로 휴식을 취하던 중, 갑자기 턱끝까지 차오르는 불길한 느낌. 후다닥 일어나서 화장실로 달려갔다. 소화가 너무 잘 된 나머지, 위장이 텅텅 비어 괴물이 다시 난동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요가소년님... 당신의 요가 플로우에는 분명한 소화 촉진 효과가 있습니다. 괴물이 그걸 증명해주었어요.)
나의 괴물 스토리가 여기서 끝이면 좋겠지만... 괴물은 수면도 방해한다. 잠들기 전에도, 잠에서 깨어난 직후에도, 심지어는 잠자는 와중에도 숙주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우선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조금이라도 허기진 느낌이 있으면 괴물은 절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처음엔 잠자기 직전에 뭔가를 먹는게 부담스러워서 참고 자보려고 했으나, 배속의 '꼬르륵' 소리가 점점 심해지다가 결국 위산 구토로 종결되었다. 연이은 탄수화물 섭취는 물론이다. 한 번은 한밤 중에 자다 깨서 화장실로 달려가 구토를 한 적도 있다. 늦은 저녁을 먹으면서 임산부용 영양제 한 알을 먹었는데, 음식은 수면 중에 금방 소화가 된 반면, 영양제를 둘러싼 알약 껍데기는 한두 시간 늦게 녹는 바람에 영양제 성분이 혼자 빈 위장에 남게 된 모양이었다. 괴물은 역시 이를 참지 못하고, 영양제와 위산을 세트로 쏟아냈다. 자다 일어나 구토라니... 너무나 당황스러운 경험이었지만, 영양제를 너무 늦은 시간에 먹으면 안 된다는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새벽에 화장실을 다녀오다가 배고픈 느낌이 나면, 역시 배를 넉넉하게 채우기 전까지는 다시 잠들 수 없다. 새벽 세 시에 괴물의 으름장을 참아보려 10분 정도 이리저리 뒤척이다, 결국 정신도 몸도 깨지 않은 상태에서 빵이든 시리얼이든 누룽지든 뭔가를 챙겨먹는다. 아침에 침대 위에서 눈을 뜨면서 제일 먼저 하는 생각은 '지금 내가 얼마나 배가 고픈가' 이다. 눈을 떴는데 이미 배고픔이 느껴진다면 침대 위에서 어물쩡거리며 휴대폰을 볼 여유도 없다. 당장 일어나서 뭔가를 먹어줘야만 괴물의 난동으로부터 자유로운 아침을 보낼 수 있다.
전문가들의 말로는 이 괴물의 수명은 보통 임신 16주차까지라고 한다. 그러니까 대략 두 달 정도 더 이런 컨디션으로 지내야 한다는 건데, 그 사실이 너무 절망적이다. 이미 한 달 정도 이렇게 살았으니 적응이 될 법도 한데, 늘 90-100 퍼센트의 컨디션을 유지하며 생활하다가 갑자기 60-70 퍼센트짜리 컨디션으로 지내려니 몸도 마음도 쉽게 지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재택 근무가 장기화/보편화 되어서 올해 하반기까지도 계속 집에서 일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만약 이 괴물을 데리고 매일같이 회사에 출퇴근 해야 했다면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구토를 하러 달려나갔겠지. 일하다가 나오는 트림 소리 삼키느라 곤욕을 치르고.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아직 출산도 하기 전이지만, 진실로 모든 엄마들은 위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