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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una Kim Oct 15. 2016

드로잉 클래스의 며리계 아내들

'경력 단절'은 한국 여자들만의 이야기일까


이른 오후에 동네 도서관에서 진행된 <Paint Like Matisse>라는 드로잉 클래스에 갔다.

한 시간 만에 내가 정말 마티스처럼 될 수 있을까, 기대 반, 의심 반을 품고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테네시에서 이사온지 6주 밖에 안 됐다며 본인을 먼저 소개했다.

그러자 내 뒤에 앉아 있던 사람이 '난 런던에서 지난 월요일에 이사왔어!'라며 소리쳤다.

그림을 그리다 말고 얼떨결에 동네 반상회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본격 수다 시작.


주변에 앉은 대여섯 명의 사람들끼리 각자 이 동네에서 얼마나 오래 살았고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를 간단히 이야기하는데,

그 와중에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고 혼자 소름이 끼쳤다.


여성이다.

(이 동네에 얼마나 오래 살았건 관계 없이) 남편의 (또는 전 남편의, 아빠의) 직장 때문에 이 동네로 이사왔다.

현재 무직 상태이다. (일부는 결혼 이후 정규직을 가진 적이 없고, 일부는 이사 때문에 경력이 끊겼으며, 일부는 은퇴했다.)


이 날 세미나에 온 사람들은 약 스무 명이 넘었다. 그리고 모두 다 여성이었다.

남편들은 직장에, 자식들은 학교에 간 동안, 집에 있자니 우울하고 밖에 나가서는 식료품 쇼핑 외에 할게 없는 주부들.

그나마 여기서 오래 산 사람들은 함께 커피 한 잔 할 수 있는 친구가 있지만,

타 도시나 타 국가에서 옮겨와 갓 정착한 사람들은 외로움과 답답함에 우울증에 가까운 감정의 소용돌이들을 경험하고 있었다.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 수업에 오는 외국인 중에는 남편 직장을 따라 미국에 온 기혼 여성들이 많다.

평일 낮에 진행되는 이 수업에는 기혼 여성들이 혼자 오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고 - 심지어 갓난 애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온 여성도 있었다 - 기혼 남성이 오는 경우에는 대부분 아내와 동행한다.

그래서 지금껏 의례 남편의 직장 때문에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 말도 잘 안 통하고 친인척도 하나 없는 곳에 와서 고생하는 외국인 아내들에게 (내 주제에) 안타까운 마음을 가져왔었다.


그런데 오늘 깨달은 놀라운 사실.

미국인 아내들도 다르지 않다.

외국인이냐 내국인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남편이냐 아내냐의 문제였던 것이다.

(물론 아내의 직장 때문에 같이 옮겨다니는 남편도 있을 수 있고, 남편을 따라 이주했더라도 곧바로 아내가 잘 정착하고 본인 직업 활동도 꾸준히 이어가는 케이스가 있을 수 있다. 다만, 20명의 세미나 인원이 모두 여성이었다는 사실을 가벼이 넘겨보기는 어렵다.)


지난 몇 십년 간 여성의 경제 활동이 자유로워지고 활발해졌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표현일 뿐이다.

과거 여성의 경제 활동에 비하면 많이 개선되었지만, 현재 남성의 활동에 비하면 아직 한참 모자라다.


월드뱅크의 2014년도 자료에 따르면, 미국 남성 전체 인구 대비 노동 인구는 69%인 반면, 미국 여성 전체 인구 대비 노동 인구는 56%이다.

미국의 남성 노동 인구 대비 여성 노동 인구 비율은 82%이다. 남자 100명이 일할 때 여자는 82명이 일한다는 뜻이다.

핀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등의 북유럽 국가는 90% 내외, 한국은 69%에 그친다.

르완다, 부룬디, 말라위 등 몇 아프리카 국가를 제외하면 100%가 넘는 국가는 없다.

(*출처: http://data.worldbank.org/indicator/SL.TLF.CACT.FM.ZS)

(아프리카에서 여성 노동 인구의 비율이 더 높은 이유는 왜일까? 잘 모르겠다. 아시는 분 있으면 댓글 좀...)

여기에 직급이나 전문직 여부 등을 고려한다면,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의 격차는 더 벌어지지 않을까?


남성 역차별 현상을 우려하는 사람들(예를 들면 우리 남편)은 군인, 소방관, 경찰 등 신체적 한계 때문에 여성이 종사할 수 없거나 기피하는 직업은 남성 종사자가 절대적으로 많을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단순히 노동인구 수치를 비교하는 것만으로는 정확한 분석이 어렵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간호사, 유치원 선생님 등 전통적으로 여성 종사자가 절대적으로 많은 직업도 분명히 존재한다. (feat. 다시 시작된 끝없는 논쟁)


어떤 통계 수치도 완벽할 수 없고, 어떤 가정이나 모델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도출되는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 드로잉 클래스에서 발견한 그 현상은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사회 현상이었고,

그 곳에서 만난 아내들의 서러움 토로와 서로 격공감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한국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균형잡힌 양성 평등' 사회가 되려면 소위 선진국이라는 미국도 아직 한참 멀었구나, 경험적으로 느꼈다.


수다 떠느라 아직 수채화 채색은 시작하지도 못한 내 그림을 보러 (수채화용 색연필이라 물칠 해줘야 함) 교실 맞은편 끝에 앉아 있던 사람까지 찾아와서 '쏘 뷰티풀'을 남발하고 갔다

드로잉 클래스는 마티스의 정물화를 컬러 인쇄해서 나눠주고 각자 따라 그려보라는 시시한 내용이었는데,

역시 미국 사람들 아니랄까봐 너도 나도 서로에게 "너무 잘했다! 완전 아름다워! 너 정말 그림에 소질있어! 이거 액자에 넣어서 전시해놔!"와 같은 칭찬을 남발하며 마무리 되었다.


오늘의  미국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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