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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우 Oct 15. 2023

빨간 네모

나를 ㅠㅠㅛㅛ하게 하는 것들 - 모난 것들

 

 흰죽을 끓인다. 쌀을 씻고 물에 담가, 두어 시간 불린다. 그동안 차를 마시고, 개와 산책하고, 무언가를 읽거나 쓴다. 불린 쌀을 물과 함께 냄비에 쏟고, 물을 더 붓는다. 불을 세게 하여 새하얀 거품의 막이 끓어오를 때까지 기다린다. 끓기 시작했다면 불을 줄인다. 약한 불로 계속 끓인다. 재차 차를 마시고, 무언가를 읽거나 쓰고, 일을 한다. 흰죽은 걸쭉한 것보다 미음처럼 끓인 것을 좋아하니까, 가끔은 불 앞으로 돌아가 물을 또 보탠다. 냄비 속을 숟가락으로 휘휘 젓기도 한다. 서두는 마음을 뭉근히 달랜다. 살캉대던 밥알이 유순하게 허물어질 때까지.

  물기를 담뿍 머금은 밥알이 으깨지다시피 헐어 잘게 되었다면 완성이다. 넉넉히 넓적한 허연 사발에 흰죽을 국자로 던다. 식탁에 사발을 올린다. 수저를 가져와서, 뽀얀 김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모습을 잠시 들여다본다. 일부러 서너 시간씩 들여 준비한 흰죽이다.

  이제 중요한 순간이다. 냉장고 문을 연다. 모서리가 담담하게 둥근, 네모난 유리병을 꺼낸다. 금속 뚜껑을 비튼다. 힘을 주느라 숨이 잠시 멈춘다. 유리병이 열리며, 다시 숨을 들이쉰다. 바이쥬白酒의 얼얼한 향이 콧속을 찌른다. 약간 고릿한 냄새가 뒤따른다. 유리병에 담긴 검붉은 국물 속으로 숟가락을 담근다. 숨어 있는 홍팡紅方을 한 점 건진다. 홍팡은 짜니까, 이 정도면 충분하다. 딱 한 점만, 흰죽 위에 홍팡을 톡 얹는다.

  ──아, 고요하구나.

  내심 탄성을 지른다. 홍팡에 묻어 있던 국물이 홍실처럼 스르르 풀려 흰죽 속으로 사라진다.     


*     


  홍팡이란 두부를 삭혀 만드는 중국 음식으로 푸루腐乳의 한 종류이다. 흔히 알려진 취두부와 비슷하다. 고량이 원료인 주정에 더해 여러 향신료와 홍곡이 들어간 국물에 담겨 유통된다는 점이 특징이다. 주정 때문에 술 냄새를 풍기고 홍곡 때문에 붉은빛을 띤다. 이름 그대로 홍방紅方, 빨간 네모다. 젓가락으로 가르면 검붉은 국물이 묻지 않은 내부가 드러난다. 두부 자체가 온통 시뻘겋게 물드는 것은 아닌 까닭에, 안쪽은 백명란이나 아귀의 간을 닮은 색이다.

  혹자는 홍팡의 식감을 크림치즈에 비유한다. 그러나 원재료인 두부의 특성상, 삭혔다 할지언정 입안에서 녹아내리는 홍팡의 감촉은 크림치즈의 그것만큼 무정형의 인상은 아니다. 아직 홍팡에서는 두부의 자디잔 알갱이를 느낄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푸아그라 테린이 떠오르는 질감이다.

  대개 홍팡 한 점은 그 두께가 엄지와 비슷하고 폭은 500원 주화보다 살짝 큰 정방형이다. 집에서 직접 담근 것은 꼭 그렇지도 않다지만, 여태 내가 먹어본 홍팡은 모두 짰다. 다른 반찬 없이 흰죽 한 그릇을 비워도 홍팡 한 점을 다 먹지 못하는 때가 있을 정도이다. 쿰쿰하고 고소하며 콩으로 만든 발효식품 특유의 감칠맛이 도는 반찬이 짜기까지 하니, 밥맛을 잃을 수가 없다.

  홍팡은 다져서 그 국물과 함께 오일 파스타에 활용해도 훌륭하다. 별다른 재료 없이 낼 수 있는 깔끔한 맛이 만족스럽고 자연스레 간도 맞춰진다(홍팡만으로 아쉬움이 있다면 페페론치노를 같이 볶아준 뒤 통후추를 갈아 뿌리자). 흰밥과도 궁합이 좋다. 홍팡 올린 따끈한 흰밥에 참기름을 한 술 끼얹으면 밥을 끝없이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알 수 없는 것 한 가지는 이상하게도 홍팡이 콩이나 잡곡을 넣어 지은 밥과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미밥에도 썩 어울리지 않는다. 홍팡과 먹는 밥은 반드시 백미로 지어야 한다.

  물론 홍팡 최고의 짝은 역시나 흰죽이다. 고작 홍팡을 곁들인 죽 한 그릇을 먹기 위해 기나긴 시간을 쏟는 이유에는 그 과정의 호젓함과 담담함도 있는 것이 옳다. 하지만 홍팡과 같이 먹는 흰죽이 맛있지 않았더라면 필히 흰죽을 끓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보글보글.

  부엌에서 물이 끓는 소리는 대체로 평화롭다. 흰죽은 맹물보다 끓는 소리가 더 갈쭉하고 둥글다. 질기게도 끓는 물에 남아 있던, 마지막 공격성까지 흐릿해진 소리.

  홍팡이 있어서, 부엌에서 흰죽이 끓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     


  흰죽의 희부연 물 속에 제 몸을 절반 이상 담근 홍팡을 내려다본다. 조감도 같다. 문득 나는 《이차원 내 여성 농민의 회화적 리얼리즘Живописный реализм крестьянки в двух измерениях》을 상기한다. 보통은 “붉은 사각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말레비치의 그림이다. 과연 시선의 각도를 조정하니 유백색의 수면과 홍방紅方은 높이를 상실하고 납작한 하나의 차원으로 무너진다.

  이내 나는 고개를 소심하게 내젓는다. 불쾌하게도 전에 보았던 어떤 미술 전시가 기억났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는 무언가를 먹는 행위보다 미술 작품 보는 일을 좋아하지만, 조합이 만족스러운 식사보다 큐레이팅이 엉망인 미술 전시를 선호하지는 않는다. 보리스 그로이스는커녕 자신들이 인용한 마야코프스키조차 제대로 읽어본 적 없어 보이는, 그 함의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전시관 출구 앞에 레프 톨스토이의 예술론을 자랑스레 내거는 이들이 기획한 전시. 무슨 큐레이터, 무슨 교수. 울컥 짜증이 올라온다.

  죽은 빠르게 식지 않는다. 겉은 미지근해졌을지라도 숟가락 하나 깊이만 들어가면 여전히 뜨거워서, 신경질적으로 먹었다가는 입천장을 데기 십상이다. 마음을 억누르며 조금씩 먹어야 한다.

  한 술도 채우지 못하는 양의 흰죽을 뜨고 콩알만 한 홍팡 조각을 올린다. 몇 초를 기다린 끝에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간다. 강제로 천천히 우물거리며, 흰죽과 어우러지는 홍팡의 맛을 음미한다.

  ──하긴, 애초에 내가 말레비치를 좋아한 적도 없었지.

  모난 주제에, 심지어 모가 여덟 개나 있는 주제에 홍팡은 부드럽다. 딱딱하게 뻗대는 대신 순순히 자신을 내어준다. 이와 동시에 제 향미에 있어서는 양보를 모른다. 입안에서 유순하게 허물어짐으로써 더 진한 풍미를 낸다. 멋모르고 한 입 크게 먹은 사람은 깜짝 놀라도록 하는, 짜디짠 맛도 간직한다.

  ──앞으로도 홍팡과 먹을 흰죽을 끓이며 살아야지.

  부엌에서 흰죽 끓는 소리가 들리는 나의 고요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한낱 끼니에 수 시간을 들여도 아쉬운 줄 모르는 삶을 살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게 흰죽을 다 끓이면 홍팡을 곁들여 맛있게 먹을 것이다.

  모난 구석은 하나도 없이 둥글기만 하다면 글은 쓸 수 없다. 언제나 반듯한 정방형의 모습만은 지켜야 한다. 다만 네모나되 경직되지는 말아야겠다. 필요하다면 녹아내리기도 거부하지 말아야겠다.

  그렇다고 순한 태도가 곰삭은 맛을 포기하는 일이 되는 것을 용납하지도 않겠다. 무엇보다, 내 안에 정정한 소금의 맛은 꽉 껴안고 있어야겠다. 날 얕보며 무심코 씹은 사람 몇쯤은 까무러쳐 뒤로 나자빠지도록, 

  남들이야 방정맞다고 하든 말든, 홍팡처럼 방정方正하게 살아야겠다.          


작가의 말

  나의 기준을 헐값에 굽히지 않으면서, 이와 동시에 타인의 무지와 부족을 미워하지 않는 일은 어렵다. 아직 내게는 숙성의 시간이 많이 필요한 모양이다. 반듯하고 새하얀 마음으로 붉은 어둠 속에 오래도록 머물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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