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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우 Oct 15. 2023

터미널의 어원을 찾아서

나를 ㅠㅠㅛㅛ하게 하는 것들 - 넘어가는 것들

§Ⅰ. terminal     

ⅰ)

terminal(n.): “열차 노선의 종점”, 1888, terminal(adj.)로부터. […]
 terminal(adj.): 15세기 중반, “경계를 표시하거나 경계와 관련된”. 라틴어 terminalis(“어떤 경계, 끝, 목적에 관계된”)로부터. terminus(“끝, 경계선”)로부터. (terminus를 보라) […]


 ⅱ)
 terminus(n.): 1550년대, “목적, 끝, 종점”. 라틴어 terminus(“끝, 한계, 경계선”)로부터[…]. 인도유럽조어 *ter-men-(“고정하다, 두다”)으로부터. 어근 *ter-로부터. 낱말들의 어기는 “고정하다, 두다; 경계, 표지, 목표”를 의미함. (또한 산스크리트어 tarati “넘어가다, 건너가다”의 뿌리[…]     

고대 로마에서, Terminus는 경계와 표지물을 주재했으며 (옛 로마 [역법상] 한 해의 끝인 2월 23일에 열린) 로마의 중요한 축제인 Terminalia의 주인공이었던 신의 이름이었다. […] 1)


*     


§Ⅱ. terminalis     

  나의 17세로부터 19세에 이르는 기간에서 즐거웠던 기억을 찾기는 어렵다. 16세의 가을이 저물던 무렵,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 소재 외국어고등학교 진학을 위함이었고, 이내 지원한 곳으로부터 합격 통지를 받았다.

  불행은 고교 입학과 함께 내게로 찾아와 3년간 머물렀다. 형편이 불우했던 것도 아니고 학교에서 별달리 괴롭힘을 당했던 것도 아니다. 문제는 내가 외고 진학을 바라지 않은 일이었다. 열네 살의 나는 시인이 되고 싶었고, 열여섯 살의 나는 극작가가 되고 싶었다. 구태여 특수목적고등학교에 간다면 예술고등학교여야 했다.

  만일 예고 문예창작과에 진학했더라면 나는 탁월한 시인이나 극작가가 결코 되지 못했을 공산이 크다. 외고에 진학함으로써 결정된 향후의 진로 덕에 얻을 수 있었던 자산 또한 크다. 그러나 이는 다 지나고 나서 할 수 있는 말에 불과하다. 20대 초입, 나는 우연히 고등학교에서 쓰던 필통을 열었다가 한 장의 쪽지를 발견했다. 쪽지에 쓰인 글씨체는 분명 나의 것이었다. “만약 네가 자퇴하지 않았다면, 너는 지금의 나에게 미안해야 해.”

  비굴했으므로 스스로 원치 않았던 외고 진학을 받아들였고, 자퇴할 용기조차 내지 못했다. 그랬던 나는, 겨우 10대의 나이로 그 시절의 괴로움을 고스란히 감내했던 나에게 그가 느끼는 바와 다른 소리를 할 자격이 없다. 고교 재학 동안 즐겁다고 할 법한 일도 나름 많았을 것이다. 오로지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했기에 모든 일에 불행을 덧씌운 기억만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한들 당시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진실로 불행한 시간이었다. 그때의 나보다 그 시간을 더 온전히 체험했을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저 예고에 가지 못한 까닭에 불행하다고 느꼈던 것은 아니었다. 정상적이라 간주되는 인생에서 밟아야 할 각각의 단계는 벌써 확고하다는 특유의 믿음이, 내가 다닌 외고의 공기 중에 짙었다. 창문조차 열 수 없어 갑갑한, 애매한 계절의 고속버스 안을 떠올리게 하는 공기였다. 목표와 한계가 명백한 종점을 향해 일관된 경로를 달리는 그 버스에 한 번 오르면 시와 희곡의 정류장과는 영영 인연이 없을 것 같았다.

  열일곱 살 겨울, 나는 난생처음으로 단편소설을 탈고했다. 어째서 시도 희곡도 아닌 소설이었는지 영 모를 노릇이다. 서울에서 고속버스에 올라 대전으로 가며 지난 일을 반추하는 내용인 이 사소설을 오랜만에 읽어보니 여로와 심리가 교차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정직한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열일곱 살에만 지닐 수 있었던 날 선 감각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17세의 나는 그즈음 내가 보냈던 여러 밤을 아래와 같이 남기고 있다.

  “서울의 겨울은 찼다. 본디 나는 추위를 타는 편이 아니었는데, 어느 시점에서부터였는지 손톱만큼의 선득거림에도 유별을 떨고 있는 것이었다. […] 도착하는 문자가 더는 없어서, 핸드폰이 빛을 내지도 않고 진동이 울리지도 않는 때면, 나는 이제 그 어떤 반응의 기색도 없는 싸늘한 핸드폰을 품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쓴 채, 또아리를 튼 뱀마냥 웅크렸다. 그리고 검기만 하고 아무 것도[sic]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의 빈 공간[을] 응시하다가, 떠오르는 무수한 기억과 생각의 파편에 베일 것을 겁내는 듯이 부르르 떨고는 이불을 더 튼튼히 여몄다. 보일러를 가장 높게 올려도 쉽게 잠에 들 수 없었다. 밖에서 칼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겨울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동안 나는 버스터미널에서 떠나는 대전행 첫차로 도망칠 충동에 겨워, 그러면서 도망치지는 못하고 핸드폰으로 소설을 쓰며 겨울의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소설의 제목은 “귀로”였다.    

 

*     


§Ⅲ. tarati     

  스무 살 1월, 동서울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탔다. 강변역 맞은편에 위치한 동서울터미널에서 출발하는 버스는 둔산정류장에 섰다. 내가 16세까지 살았던 동네로 가기에는 대전터미널이나 유성터미널보다 둔산에서 내리는 편이 빨랐다.

  열일곱 살의 겨울에 버스를 타고 한 차례 대전에 다녀오기는 했다. 대전에 가면, 최소한 대전에 머물러 있는 동안은 서울의 우울을 피해 안도할 수 있을 줄 알았던 듯싶다. 정작 17세의 끄트머리에 섰던 내가 대전에서 대면한 것은 위화감이었다. 그때 느꼈던 위화감은 위에서 언급한 소설에 묻어 있다. 묻어 있기만 하다. 나는 문학적인 방식으로, 어쨌든 결말을 지어야 하는 단편소설을 통하여 그 위화감과 성급한 화해를 모색했다.

  설익은 소설은 설익은 소설에 지나지 않아서 생으로 이월되지 않았다. 떠나온 대전은 전과 같은 위화감을 품은 채 나를 기다렸다. 나는 그것과 다시 얼굴을 맞대기 위하여 한강과 금강을 건너지 않을 수 없었다. 기차를 탈 수도 있었겠지만, 고속버스를 택한 이유의 기저에는 17세의 겨울에 대한 의식이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동네에서는 옛 친구 몇과 만났다. 동네에 남을 사람들과 어딘가로 떠날 사람들 사이에서, 이미 떠나놓고 어정대며 다시 찾아온 나는 홀로 서먹했다. 서울로 진학하게 된 몇 명과는 서울에서 만날 약속을 했다. 연후 몇과는 아예 만나지 않았고, 몇과는 몇 차례 만나고는 다시 만나지 않았다.

  영단어 terminal과 같은 연원을 지닌 산스크리트어 낱말 tarati(तरति)는 다양한 방식으로 옮겨질 수 있지만, 그 역어들은 모두 ‘건너다’의 의미를 공유한다. 그것도 ‘물을 헤엄쳐서 건너다’라는 뉘앙스가 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나는 한 차례 헤엄쳐서 강을 건넜다. 도착한 강변에서 다시 물로 뛰어들어 헤엄치면 그대로 남아 있는 건너편에 되돌아가게 되리라고 믿었을 것이다. 막상 떠나왔던 곳은 변해 있었는데, 실은 저편의 강가뿐 아니라 나도 변해 있었다. 강으로는 부단히 새로운 물이 흘러들었다. 몸을 붙일 뭍도, 몸을 담글 물도, 그 몸을 지닌 나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전과 같은 것은 내가 있는 곳과 있지 않은 곳을 가르며 흐르는 강 그 자체밖에 없었다.

  열일곱 살에는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기만 하면 언제든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체득한 지 벌써 오래였으나 열아홉 살까지의 나는 회차 후 돌아갈 기점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벗어나기 위해서는 뒤로 돌아가는 대신 나아가 넘어서야 한다는 것을 알기까지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던 까닭이다.

  서울이라는 공간에 탓은 있지 않아서, 터미널에서 버스로 떠난다고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갓 스무 살이 되었던 그 겨울, 나는 둔산정류장에서 동서울터미널로 향하는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다시 서울에 들어선 버스는 어느덧 한강을 건너고 있었다. 일렁이는 강물에 늘어지는 가로등의 불빛은 일순간 블러드오렌지 같았다가 유등流燈처럼 변했다. 바로 그 검은 물 위에서 나의 10대가 흘러가고 있었음을, 그때의 나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     


§Ⅳ. terminus     

  대전에서는 꿈돌이랜드가 폐장했고, 연이어 엑스포과학공원도 실질적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나는 작가들을 상대하는 어느 서울 소재 업체에서 일하고 있었다.

  내 주된 업무로는 작가들로부터 원고를 받아 편집하는 일, 에세이 메일이 매일 아침 6시에 발송되도록 하는 일, 구독자와 작가들의 온오프라인 만남 행사를 기획하는 일 등이 있었다. 이러한 업무들을 처리하다 보면 대표와 협업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는 본인 또한 여러 권의 책을 낸 적 있는 사람이었다.

  어떤 상황에서 시작된 대화였는지는 떠올릴 수 없다. 에세이 메일 업무를 하던 중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주식회사에서 직접 출간한 도서의 편집 작업을 하던 중이었거나 글쓰기 강연 기획 논의를 하던 중이었을 듯하기도 하다. 생생한 것은 대화의 내용뿐이다. 대표가 먼저 말했다.

  “글 쓰는 게 쉽지가 않네요….”

  대표가 말한 “글”이 기획안이나 보고서 같은 것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당시 그는 이미 여러 권의 출간 계약을 해둔 상태였는데, 자신의 원고 작업을 회사 업무와 병행하는 일이 분명 녹록지 않았을 것이다.

  “저도 제 글을 써야 하는데요….”

  불쑥 튀어나온 대답이었다. 평소 품고 있던 생각이기는 했어도 그 생각을 대표에게 털어놓으려는 의사를 지녀본 적은 없었다. 나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글을 쓰고 싶다거나 글을 쓰고 있다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일과 글을 분리하는 하나의 방편이었다.

  “그래도 직업작가는 아니잖아요.”

  대표는 내 말에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나로서는 다행이었다.

  직장 내에서,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 설명 가능한 짧은 말은 없었다. 내 명함에는 나의 직책이 “편집자”라고만 적혀 있었다. 회사에서 전업으로 일한 것도 아니었다. 회사 업무 외에도 나는 이러저러한 일과 공부를 닥치는 대로, 그러면서도 설렁설렁 해치웠다. 이 회사에서 나온 명함 말고도 내게는 두 종류의 명함이 더 있었다. 내 희끄무레한 20대는 유동했다. 어디로 쏟았기에 시간이 사라지는지는 알 도리 없었다.

  내가 했던 일은 사교육을 제하면 글이나 출판과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글로써, 혹은 글을 경유한 방도로써 생계를 영유하는 이들의 상당수가 어찌 사는지는 다소 익숙해졌다. 나는 은연중에 내 글로 생활비를 벌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글로는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반대로, 돈을 글로 벌기 때문이었다. 글이 생활의 주된 수단이 되는 순간, 많은 경우 글은 시장과 독자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 내게 글이란 타인을 고려하며 쓰는 것이 아니었고 팔기 위해 쓰는 것도 아니었다. 팔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수두룩했다. 그것이 내 글일 이유는 없었다.

  고로 내가 잡다한 일들을 하며 20대를 보낸 것은, 여러 방향으로부터 물이 흘러들어오는 상수도관을 깔아둔다면 글을 팔아 돈으로 바꾸는 일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리라는 계산이 작동한 결과였다. 과거 한 차례 단편소설을 굳이 필명으로 발표한 일도 이러한 생각과 무관하지 않았다.

  중학교 1학년 국어 시간, 각자의 꿈을 발표해야 했다. 나는 “가난하지만 행복한 시인”이라고 말했다. 거짓말이었다. 정말로 꿈꾼 것은 ‘첫눈이 오는 날 거리에서 얼어 죽는 시인’이었다. 이는 곽재구 시인의 글에서 나온 내용을 따온 것이었고, 꿈마저 표절하는 것은 지독히 부끄러운 일이라는 점을 열네 살의 나는 알고 있었다.

  눈 속에서 얼어 죽을지언정 매묵賣墨만은 하지 않겠다──비록 항상 지킬 수는 없었지만, 고작 돈푼을 위해 쓴 글줄이었고 내 글이라 생각한 원고도 아니었어도 내게 일을 맡겼던 하청업체의 담당자가 “눈이 즐겁다”를 “즐거운 비주얼이다”로 바꾼 일에 속이나마 상하며 20대 초의 나는 살았다. 어떤 견지에서, 스무 살을 넘긴 뒤에도 일종의 카랑카랑한 장기 10대가 내게는 지속되고 있었던 셈이다.

  이 소위 장기 10대와 그 여파가 사그라든 계기는 업체 대표와 그날 나눈 대화였다. 별것 아닌 대화가 잊히지 않았다. 이렇듯 사소한 대화가 어째서 뇌리를 떠나지 않는지, 제법 오랜 시간을 보낸 후에야 나는 그 이유를 깨우쳤다.

  글을 쓰지 못하고 있는데, 매묵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다 무슨 소용인가.

  당시 나는 글에 쓸 여유가 없었다.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시간을 비롯해 글쓰기가 아닌 다른 일에 쓰이는 시간이 물리적으로 길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부차적인 문제였다. 기실 나는 일반적인 직장인에 비해 한가한 편이었다.

  한가하지 못한 것은 내 마음이었다. 내 능력 부족의 탓일 수도 있었겠으나 퇴근했다고 남은 시간에 곧장 글을 쓸 수는 없었다. 여러 갈래로 찢긴 생활에 치이는 마음은 글을 쓰는 마음과 공존하지 못했다. 내게는 그랬다.

  대표와 문제의 대화를 나눈 시점은 내 글이라 부를 법한 글을 못 쓴 지 2년차였다. 무언가 끼적거린다 하더라도 만족스러운 결과는 없었다. 그런데 글이란 직업작가들에게도 쓰기 어려운 것이었다. 하물며 내가, 다른 일에 연연하며 글쓰기를 병행할 수 있을까. 수년간의 경험은 긍정적인 답을 내어놓지 않았다.

  이렇게 살다가는 생활 때문에 글을 쓸 수 없다고 평생 한탄하다가 글은 쓰지 않고 죽겠거니 했다. 글을 쓰기 위해 택했던 다른 일들이 글 쓰는 일을 방해한다면, 이는 내 수단이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     


§Ⅴ. Terminalis     

  대표에게서 “그래도 직업작가는 아니잖아요.”라는 말을 들은 날로부터 약 1년 후, 나는 그에게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내 예상 이상으로, 나는 판단으로부터 행동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이 지극히 긴 사람이었다. 한번 내린 판단을 내 기대 이상으로 쉬이 바꾸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대표는 이유를 물었고, 나는 글을 쓸 생각이라고 했다. 그는 웹소설로 돈을 벌 생각이냐고 되물었다.

  “웹소설은 아니고… 장편소설을 쓰려고 합니다.”

  대표는 조금은 놀란 듯했다. 소설을 쓰고 싶다는 말은 해본 적이 없지 않냐고 했다. 사실이었다.

  그리고 나는 웬만한 일들은 모두 정리한 뒤, 4개월 만에 장편소설을 탈고했다.

  소설을 쓰는 동안, 집에 있으면 집의 감각이 소설 속으로 침투하는 양상이 싫었다. 도저히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었던 날들을 빼면 전철과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 적당한 카페에서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넉 달을 그렇게 보내고 원고를 어느 공모전에 보냈다. 인터넷으로 접수 가능한 공모전이었으므로, 원고를 낸 것도 현재 내가 사는 곳에서 대중교통으로 약 40분 거리인 한 카페에서의 일이었다.

  제출 마감일이 가까울수록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마음이 아니라 몸이었다. 실제로 나는 투고를 마치고 외부로 흘려보냈던 기력이 되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일주일 정도를 누워서 보냈다. 체력의 귀환 속도는 느렸다.

  제출 당일에는 마지막으로 쓸 체력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원고를 보내고, 나는 지하철에 타지 않았다. 내 집은 한강을 기준으로 남쪽에 있다. 그날 있었던 카페에서 집으로 편히 가기 위해서는 강변역에서 열차에 올라 잠실철교를 지나야 했다.

  역사 맞은편으로 동서울터미널이 보였다. 무작정 동서울터미널에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터미널에 들어가서, 가장 빨리 떠나는 고속버스를 잡아타고 아무 곳으로나 향할까 했다. 다만 장편소설을 쓰며, 나는 터미널의 버스가 내가 원하는 곳으로 나를 데려가 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날 나는 잠실철교 위로 걸었다. 한 발짝 뗄 때마다 허리와 어깨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지만, 나는 걸어서 한강을 건넜다.

          

작가의 말

  내 장편소설이 공모전에서 상을 받지는 못했다. 낙선 자체 때문에 상심하지는 않았다. 다만 상심은 다른 곳으로부터 왔다. 그것은 한국어로 글을 쓴다는 일에서 말미암은 상심이었다.


1) 이상 Online Etymology Dictionary로부터 번역 및 인용 (https://www.etymonline.com/search?q=terminal. Retrieved 15, Oct.,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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