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현우 Oct 15. 2023

입묵入墨

나를 ㅠㅠㅛㅛ하게 하는 것들 - 물드는 것들


  나의 애인에게는, 새삼스럽게도 몸이 있다. 문신을 지닌 몸이다. 그 몸에 있는 문신의 수효가 두 자릿수에 달한다는 것은 안다. 정확히 몇 개인지 내가 모른다는 것을, 이 문장을 쓰며 깨달았다.

  애인에게 연락을 했다. 그녀 또한 자신의 몸과 문신에 대하여 명확한 인상을 지니지 못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몸에 있는 문신을 세어 보니 스스로 생각했던 개수에서 한 개가 부족하다고 했다. 그녀는 다음 달에 새로운 문신 하나를 새기기로 예정되어 있다. 어차피 새기는 김에 하나 더 받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도 문신이 있다. 내 몸이 지닌 문신은 하나뿐이다. 작아서 눈에 띄지 않을 수 있기는 하나 평시 항상 노출되는 부위에 위치한 문신이다. 2019년에 받은 문신이니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는데도, 내가 문신을 새길 때 옆에 있었던 애인을 제하고는 그동안 아무도 내 몸이 문신을 지니고 있음을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나의 몸은 문신을 지니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     


  요즘 입말로 더 자주 쓰는 것은 문신이 아니라 타투다. 폴리네시아 제어의 tatau가 영어를 거쳐 한국어로 유입된 낱말이다. 어근상 tatau는 두드리거나 표시한다는 뜻이 있다. 작은 효자손처럼 생긴, 꺾인 끄트머리에 바늘 여럿을 촘촘히 붙인 ‘au로 피부를 연거푸 긁어 타투를 새기는 폴리네시아의 전통문화를 고려할 때 직관적인 이름이다.

  타닥, 타타, 타탁, 타, 타, 타닥탁탁. 사람의 살갗을 거듭 두드리면 그의 몸이 열린다. 열린 그의 몸으로 먹물이 들어간다. 입묵入墨이다. 입묵된 사람에게서 무늬가, 문文이 피어난다.

  기실 나도 말할 때는 대개 타투라는 단어를 쓴다. 일상적 용례를 관찰하건대 한국에서 문신이라는 낱말과 타투라는 낱말은 각기 다른 대상을 가리키는 듯하다. 예컨대 투박하고 검푸르게 선이 번지는, 등판을 온통 차지하는 용이나 잉어 같은 것이 문신이다. 반면 타투라는 말로써 지시되는 것들은 이제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용인 가능한, 추醜 아닌 미美의 영역으로 진입한 듯싶다. 걸그룹 아이돌이 할 수 있으면 타투, 할 수 없으면 문신이라고 할까.

  하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포괄적인 용어로서 문신을 고집하고 있다. 사모아인이나 통가인이 아니라 한국인인 나에게는 폴리네시아어보다 한자어가 더 직관적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문신이라는 단어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 이 시점에 폴리네시아 제어와 관련하여 언급해두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하와이어에서는 타 폴리네시아 제어의 /t/가 /k/로 변화한다. 고로 하와이어의 kā-kau 또한 그 뿌리는 tatau이다. kā-kau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문신을 새기다’.

  둘째, ‘글을 쓰다’. 1)


*     


  문신文身. 문文이 있는 몸, 혹은 몸에 文을 들이는 일. 文의 몸, 몸의 文.

  文이라는 글자는 주검의 가슴팍에 칼로 상처를 낸 모습이라고, 민국 초의 어느 중국인 학자는 풀이했다. 그의 이름은 기억 너머의 어둠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이나 그가 쓴 글의 내용만은 선연하다. 그에 따르면 고대 중국인들에게 죽음이란 피를 잃는 일이요 피란 곧 생명이었다. 즉, 피를 많이 흘린 이에게서 그의 생명은 떠나가기 마련이었다.

  문제는 피를 흘림으로써 죽지 않은, 예컨대 자연사한 이의 경우였다. 자연사란 우리 현대인이 그 죽음의 양상을 기술하는 방식일 뿐 고대인들에게 그것은 절로 그러할 수 있는 사건이 결코 아니었다. 피가 흐르지 않았는데 사람이 어찌 죽는단 말인가? 그런데도 어떤 이들은 영영 깨지 못할 잠에 하릴없이 빠져들었다. 태고의 화하인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산해경』에 등장하는 낭狼과 패狽가 하늘 아래 어느 산기슭을 어슬렁거리고 있었을 무렵, 죽었을 리 없으나 일어나지도 못하는 이들 앞에서 그들은 번민했을 것이다. 다소 박정하되 매우 총명한 아무개가 묘안을 떠올렸으리라. 죽지도 않고 일어나지도 않는 사람들이 문제라면, 우리가 그들을 보내주면 될 게 아닌가? 그들은 잠만 자는 이들의 몸에 상처를 내 피가 흘러나오게 했고, 이 제의로부터 文이 나왔다.

  위 일화를 되새기며 나는 다음과 같이 쓴다.

  文은 제의적이다. 그것은 일정한 형식 속에서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려는 행위로 드러나되,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지성이 헤아리지 못하는 방식을, 온전히 헤아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택한다.

  文은 월경적이다. 그것이 목표하는 바는 차안에서 피안으로 건너가는 일이다.

  文은 감각적이다. 초월을 목표할지언정 그것은 여전히 차안의 몸과 관계하고, 피를 흘린다. 그것은 감각적인 대상과 결부된다. 특히 문학의 文은, 시의 文은 더욱 그러하다. 언어 표현이 어떠한 감각을 직접적으로 서술하지 않는 경우도 있겠으나 그렇다고 그것이 순수한 개념 그 자체는 아니다. 이는 언어 표현의 존재론적 한계이기도 하다. 종국에 언어 표현은 물리적 실체가 없을지라도 특정한 음성 등의 상像일 수밖에 없어 감각 가능한 것에 재포획되기 마련이다.

  관능을 경유해 초월을 시도하는 文. 참된 존재로의 나아감을 방해하는 일이 잦은, 하고많은 몸 있는 것들을 통해 그들을 넘어서도록 하는 文. 이토록 지긋지긋한, 구태여 나를 구속拘束하고 구속救贖하려 드는, 나의 文.     

*     

  아마 2010년대가 시작되기 전부터의 현상인 것 같다. 처음에는 ‘힐링’이었다. 그다음의 흐름은 대략 ‘□□하지만 이대로 괜찮아’나 ‘□□합니다만 □□합니다’나 정도의 말본새로 집약된다. ‘위로’라 적을 수도 있겠다. 이와 발맞춰 ‘아무도 상처받지 않는 글’과 같은 투의 언설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글쎄, 이렇게 나는 선언한다.

  누구든 상처입힐 수 있는 글이 아니라면 나는 쓰지 않겠다.

  아무런 까닭 없이 타인을 공격하고 헐뜯는 글을 쓰겠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읽는 이의 가슴에 자상을 남기는 글을 쓰고 싶다. 찢기지 않은 것은 열리지 않고, 열리지 않은 것은 변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글로써, 경화되어 무감각한 독자의 피부에 상처를 입히고 싶다. 그 열상 속으로 나의 먹물을 주입하고 싶다. 있는 그대로 괜찮다고, 독자에게 편리한 위로를 건네며 그를 내버려 두지 않겠다.

  당신의 문신사가 되겠다. 당신이 평생 간직할 수 있도록, 영구적인 나의 흔적을 당신에게 내어주겠다. 그래서 우선은, 당신을 안락하게 감싸고 있는 그 껍질을 갈가리 찢어발겨 놓겠다. 연거푸 긁고 두드리고 상처를 내겠다. 걸레짝을 만들어 놓겠다. 지극히 폭력적인 글을 쓰겠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나는, 절대로 당신을 내버리지 않겠다.     


*     


  재작년, 12년을 키운 개가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나는 시를 쓰고 싶다는 마음을 12년 넘게 치워두고 있었다. 개의 죽음에 즈음하여, 수년 만에 몇 편의 시를 썼다. 그중 두 편은 아래와 같다.   

       

「심비대증─산소방에 두나를 두 번째 입원시키고」

: 나이 든 시츄는 심비대증이 생기는 일이 잦다. 노화로 인해 심혈관 기능이 저하되면 그 보상으로 심장이 커진다. 커진 심장은 폐를 압박하고, 심비대증이 있는 개는 점차 호흡이 어려워진다.


  네 앞에 나, 개 같은 새끼가 되고 싶다

  늙어서 쪼그라든, 개처럼 되고 싶다

  늙은 개의 체중은 4.6 킬로그램

  5.2 킬로그램에서 600 그램이

  빠져 가벼워진, 한 마리 시츄 되겠다


  몸을 헐었으니 심장은 커지지 싶다

  네 내어준 사랑만큼, 심장은 부풀고

  부푼 심장에 두 폐가 짓눌려도 좋다

  폐포에 물이 차 숨 가빠도 나는 좋다

  여전히 난 널 보고 반겨 짖어주겠다


  사랑이여, 네가 알려준 것이지 싶다

  네 사랑 바라는 이에게 지상 공기란

  숨 쉬어도 숨 쉬어지지 않는 듯하고 2)

  잠시 산소방에 들어가 숨을 고른들

  괴로운 기다림뿐인 걸 이제 알겠다


  다만 네 앞에 나, 한마디만 듣고 싶다

  사랑이 커져 숨도 쉬지 못하는 나를

  너는 보는 내내 연민하고 있겠는가

  내 할딱임 때문에 네 숨 막힐 듯한가

  사랑이여, 그렇다면 난, 꼬리치겠다



「치인痴人의 사랑」3)


  세상은 이별이 안전하다는데, 그는 나의 미치광이 연인 4)

  하루는 나의 미치광이가 제 뺨을 때렸다

  날 사랑해서라고?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면, 끝장이다.)

  다음날 그는 내 발밑에 깔리길 청했다

  적당히 좀 해 제발. 당신이 뭐가 아쉬워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면, 끝장이다.)


  말하지 않아도 나를 겁박하는, 내 과묵한 미치광이 연인


  ──사랑을 하면, 누구든 조금은 맛이 가지

  아니, 사랑은 광기라는 말은 진부해진 시대야.

  ──사랑을 하면, 누구든 조금은 눈이 멀지

  아니, 사랑은 눈멀었단 말은 식상해진 시대야.

  ──치인이 되어, 비로소 깨닫는 것이 있지

  (그는 나도 자신처럼 맛이 가길 원하는 것이다.)

  ──맹인이 되어,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지

  (그는 나도 자신처럼 눈이 멀길 원하는 것이다.)


  견딜 수 없게도 뻔한 소릴 하는, 내 한결같이 모자란 연인


  그는 나더러 눈을 뜨라 하는데, 정작 그는 미쳤는지 눈이 돌아가 있고

  (당신의 사랑은 도무지 눈 똑바로 뜨고 볼 수가 없고)

  그는 나더러 시를 쓰라 하는데, 정작 그는 미쳤는지 뻔한 문자를 쓰고

  (당신의 사랑은 도저히 세련되게 표현할 수가 없고)


  ──사랑을 하면, 모든 것을 감내하지

  ──사랑을 하면, 누구든 시인이 되지

  세상은 이별이 안전하다는데, 그는 나의 미치광이 연인.

  (사실 나의 연인은 안전한 관계마저 믿지 않는다)     



  유독 지금의 글은 그 구성이 거칠고 투박하다는 점을 나도 안다. 필요한 일이었다. 이 글은 타투라기보다는 문신이라 이를 것에 가깝고, 문신 중에서도 기계 대신 대바늘을 쓰는 부류에 속하는 까닭이다.

  위에서는 거창한 소리를 늘어놓았는데, 당신이 나의 다른 글들을 읽어 보았다면 그들이 이에 꼭 부합했는지는 모르겠다. 부합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내 의지가 아니라 능력의 부족이다. 그런 경우 능력의 부족을 시인하되 의지의 타협을 하지는 않겠다. 나는 쓰고 싶은 글을 쓰고, 당신은 읽고 싶은 글을 읽도록 하자.

  부합했다면, 기쁘다. 당신이 나에 의해 입묵되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가죽을 찢고 들어간 바늘이 나의 먹물을 당신 속으로 흘려 넣었다. 아무도 나를 모를지언정 당신은 나를 기억하고 나는 당신을 기억할 것이다. 그것으로 족하다.

  그리고 언젠가, 당신이 나에게로 돌아와 새 문신을 받고 또 세상을 향해 떠나가기를 희망한다.

  다시 만날 일이 있기를 바란다. 당신의 문신사인 나는 새 입묵 작업을 하러 가야 한다. 입묵入墨. 당분간 당신이 나의 글을 접하지 못할지라도, 나는 당신에게로 돌아오기 위해 먹물로 입수한다. 검고 검은 그 속으로 든다. 묵묵히 그 안에 있겠다.

  이제 당신은 나의 먹물이 든 몸이니까.

  나의 몸, 나의 문신이여──그럼, 안녕.     

     

작가의 말

  간혹, 일순간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되살아나는 커서를 오랫동안 들여다본다. 방금 써둔 문장을 머릿속으로 되새기며, 이 문장을 손목에 문신으로 새길 수 있을지를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할 때면 가끔은 괴롭고 가끔은 아득하다. 아득함이 아늑해질 때까지 쓴다.


1) 이상 Carmen Nyssen, Language of Tatau, Ta Tatau, Tattoo 참조. (https://buzzworthytattoo.com/language-of-tatau-ta-tatau-tattoo/, Retrieved 15, Oct., 2023.)

2) 소화 데레사의 자서전에서.

3)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치인의 사랑』에서.

4) 시에나의 카타리나의 『대화』에서.

이전 09화 친애하는 나의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