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반짝 빛나는 길, #13 Sucre
미련없이 라파즈를 떠나 예약된 비행기를 타고 수크레로 돌아왔다. 이번 여행에서 계획했던 여행 스케줄이 매번 어긋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리 예약한 비행기를 탈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할따름이었다. 사실 비행기표를 버리고(예약 변경이 안되는 표였다.) 라파즈에 조금 더 있을까...라고도 생각했지만, 더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표를 버릴만큼 강렬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행기만큼은 제대로 탈 수 있었다. 다행히도 비행기는 남미 비행기 답지 않게 제 시간에 이륙과 착륙을 했다.
수크레는 원래 볼리비아의 수도라고 한다. 지금은 라파즈가 행정적인 수도여서 모든게 라파즈로 집중되어 있으나, 옛수도의 위엄을 잃지않고 볼리비아의 유럽이라고 할 만큼 고풍스럽고 정돈이 잘 된 예쁜 도시이다. 언덕위에 주황색 스페니쉬 기와를 덮은 하얀 집들이 즐비하다. 작은 도로들은 스페인 점령당시 깔았던 돌들을 깐 길 그대로 아주 깨끗하게 잘 보존되어있었다. 정말 튼튼한 길이지 않는가... 남미에는 아직도 곳곳에 스페인 점령당시의 문화나 그들의 족적이 많이 남아있다. 수크레는 그런 대표적인 도시 중의 하나인 것이다.
수크레에서 가장 먼저 간 곳은 도시 전체를 볼 수 있는 전망대이다. 전망대는 언덕 위에 있는데 그 곳에는 하얗고 아담한 성당이 있다. 성당을 포함한 전망대와 작은 광장이 아주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겨서 그곳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아주 마음에 드는 카페도 있어서 경치도 보고 카페에서 일기도 쓰고 분위기를 한껏 즐겼다. 이번 여행을 정리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시간이었다. 하늘도 파랗게 예뻤고 바람도 살랑살랑 불어서 기분이 좋았다. 거의 반 나절을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다 내려왔다. 도시 중앙에는 Plaza 25 de Mayo라는 광장이 있다. 광장에는 항상 휴식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 동네의 핫 플레이스였던 것이다. 광장 주변으로 시청같은 건물과 성당, 박물관도 있고 예쁜 카페들도 있었다. 수크레는 관광도시는 아니지만 유럽풍의 예쁘고 정갈한 풍경때문에 우유니를 여행하고 경유지로 잠시 들르는 사람들이 많은, 아직 훼손되지 않은 작고 예쁜 도시이다. 내가 간 날에 광장에는 그렇게 관광객이 많지도 않았다(워낙 편하게 있어서 현지인인지 관광객인지 내가 구분을 못했을 수도 있다.). 광장에 앉아서 사람들과 주변 환경을 탐색했다. 그리고 골목을 몇 바퀴 돌기도 했다. 이곳 사람들의 삶이 조금씩 보이는 듯 하기도 했다. 그렇게 풍요롭지는 않지만 깔끔하고 아기자기한 삶을 사는 듯하다. 무엇보다 길거리가 깨끗해서 좋았다. 그리고 하얀 집들로 들어가면 안에는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지 듯 중세시대의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카페도 식당도 고전적인 분위기를 가진 곳이 많았다. 지친 여행자들이 고풍스런 분위기에서 하루쯤 푹 쉬었다가 재충전해서 다시 길을 떠날 수 있기에 딱 적당한 곳이었다.
광장 옆으로 쇼핑 거리라 할 정도로 붐비는 골목이 있었고, 그 옆에 큰 시장이 있었다. 시장에는 신선한 과일을 바로 짜서 주스를 만들어 팔았는데, 정말 신선했다. 양도 많았고 찐~한 달콤함을 느낄 수 있는 최강의 주스였다. 첫날에는 오렌지와 몇 가지 과일을 믹스해서 갈아 준 과일 주스를 마셨는데 식사 대용이 될 정도로 든든했다. 다음날 출발하기 전에 다시 시장에 들러서 이곳 사람들이 먹는 과일 샐러드를 먹었다. 갖가지 과일과 요거트, 생크림, 콘푸레이크를 뿌려주는 간식이었는데 신선한 과일 덕분에 나쁘지 않은 맛이었다.
수크레가 아담한 유럽풍의 예쁜 도시이긴하지만(딱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었지만), 난 하루만 머물다가 다음날 버스로 아순시온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길게 머물며 일상을 향유하기 딱 좋은 동네여서 한 달 살기를 하거나 아님 여기에서 몇 년을 살아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행 말미의 피곤함과 약간의 공허함이 느껴져 빨리 내가 살고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버스표를 사러 터미널로 갔다. 장거리 버스여서 그런지 거의 저녁 시간대가 많았다. 아순시온으로 가는 길은 아르헨티나를 거쳐서 가는 길이 버스가 더 좋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언뜻 들었던 것 같은데 나는 최단 거리로 보이는 볼리비아에서 바로 파라과이 국경을 넘어가는 길을 택했다.(살타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기억때문에 아르헨티나 국경은 당분간 안 넘고 싶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볼리비아 - 아르헨티나 국경을 넘는 루트가 시간이 더 짧게 걸린다는 것이었다. 버스도 훨~씬 좋고...) 매표소 아줌마가 아순시온 직행은 없고, 중간의 어느 도시에서 버스를 한 번만 갈아타면 된다고 하기에 선뜻 표를 사버렸다. 다음날 하루 종일 거리를 배회하다 버스 출발 시간에 맞춰서 버스를 타러 터미널로 갔다.
마지막 여행지가 마음에 쏙 들어서 개운하고 기분이 좋았다. 며칠 더 있어볼까하는 유혹이 있었지만, 여행내내 시달렸던 고산병으로 인한 두통이 말끔히 가시지 않아서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다. 아직 마지막 장거리 버스 여행이 남아있지만, 그래도 내일 밤이나 늦어도 모레 아침이면 집에 도착할 수 있으니 버스에서 굳건히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드디어 사막을 지나 호수까지 다녀오는 이번 여행의 긴 대장정의 끝이 보이는 듯 했다.
그러나 이번 여행의 고달픔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수크레를 떠나자 가장 혹독한 고달픔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