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반짝 빛나는 길, #12 Copacabana - La paz
결국 다음날 라파스행 버스를 타지 못했다. 너무 안일하게 있었던 탓일까, 어제 투어를 다녀와서 여행사 몇 군데를 다녀왔는데 버스 자리가 없었다. 오후 버스는 자리가 있다고 했지만 오후에 타고 나가면 밤에나 라파즈에 도착할 텐데 너무 위험할 것 같았다. 그래서 차라리 하루 더 코파카바나에 있다가 라파즈로 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라파즈 관광은 건너뛰어야 할 듯했다. 여행 초반에 여기저기서 발이 묶여 시간을 보내다 보니 마지막엔 결국 시간에 쪼들리게 되었다. 예약한 비행기만 없다면 며칠씩 시간이 늘어져도 상관없지만, 비행기표를 버리고 라파즈에서 아순시온까지 버스로 가는 건 무리일 것 같아 비행기 시간만은 꼭 맞추고 싶었다.
지루하게 하루를 더 코파카바나의 골목을 돌아다니고 호수를 배회하며 보냈다. 축제는 이틀 연속으로 열리는 듯했다. 축제 다음날의 길거리엔 쓰레기가 나뒹굴고 곳곳에서 지린내가 진동했다. 아직 이곳 사람들은 축제 뒤처리를 어떻게 하는지 배우지 못했나 보다. 결국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일 텐데 이렇게 함부로 하다니...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이런 지저분함이 호수까지는 미치지 않기를 바랐다.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한 이곳 사람들은 행복할 수 있고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을 테니, 제발 호수만큼은 깨끗하게 유지해 주기를...
내 인생에서 또다시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이 호수에 오게 될 날이 있을지 모르겠다. 아마도 다시 오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이곳에 오기까지의 시간들이 너무나 길고도 길었던 것처럼 느껴지고 사실 여자 혼자서 배낭 메고 오기엔 쉽지 않은 길이었다. 그나마 여기에서 호수를 보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던 것과 사람들이 다정했다는 것은 잊지 못할 것 같다. 바다 같은 이 호수는 항상 그리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마법의 호수 티티카카 이젠 안녕.
라파즈행 버스를 타는 것도 쉽지 않았다. 분명 여행사에서 알려준 거리의 모퉁이에 서 있었는데 버스 승차시간이 다 되어도 버스가 나타나지 않았다. 큰 배낭을 메고 여행사 사무실로 뛰었다. 버스를 놓치지 않아야 하는데라는 생각만 했다. 여행사 직원은 나의 절박함과는 전혀 상관없이 아주 태연하게 다시 지정된 버스 정차장을 알려 주었다. 축제 때문에 장소가 바뀌었단다. 진짜인지 따져보기도 믿고 싶지도 않았다. 다시 알려준 장소로 뛰었다. 언덕처럼 가파른 길을 내 덩치보다 큰 배낭을 메고 올라가다가 이러다 쓰러져 죽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다행히 그곳에서 버스를 탈 수 있었고, 내가 탄 뒤에도 오지 않은 사람들 때문에 한참을 기다리다 출발했다. 고생은 했지만 결국엔 탈 수 있어서 다행이었고, 버스 타러 오기 전에 여행사에 들러서 확인하지 않은 내 탓이었다. 남미 여행을 할 때는 항상 변수를 염두에 두고, 더블체크 아니 세네 번 항상, 수시로 변수가 없는지 체크를 해야 한다.
코파카바나에서는 날씨가 좋았는데 라파즈로 가는 길에 비가 엄청 왔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비에 길은 흙탕물로 가득했고 범람하는 강처럼 변했다. 버스는 강이 된 길을 피해, 왔던 곳으로 방향을 돌리기도 하고 다른 길로 둘러둘러 오후 늦게 라파즈 알토 터미널에 도착했다. 다행히도 비는 잦아들었다. 택시를 타고 예약해둔 호스텔로 갔다. 난 사실 호스텔 예약을 잘 안 하고 다니는 편인데, 그저께 호숫가 포장마차에서 만났던 한국인 여행객이 추천해 준 곳이었다. 맥주도 공짜고 매우 핫한 곳이라며... 그 말에 솔깃해 예약을 하고 말았는데, 정말 핫한 곳이었기 때문에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지하에 Bar가 있는 곳이었는데 밤늦게까지 파티 분위기였다. 호스텔의 분위기와 시설이 괜찮은 탓인지 만실인가 싶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너무 추웠다. 하룻밤 머무는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였다.
라파즈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겠다 싶었는데 그나마 밝을 때 숙소에 도착했고 숙소에서 가까운 곳에 전망대가 있다고 직원이 알려주어서 그곳에라도 가보자 싶어서 숙소를 나섰다. 전망대로 올라가는 케이블카를 타는 곳을 찾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어두워졌다. 가는 길에 이것저것 둘러보느라 시간이 더 지체되었다. 또 우연히 태양의 섬 투어 때 같은 보트를 탔던 여자를 만나서 잠깐 이야기도 하고 길도 물었다. 그녀는 어제 라파즈에 왔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밤 버스로 코차밤바로 떠난다고 했다. 멋있어 보였다. 그녀와 헤어지고 바로 뛰었다. 이미 어두워져서 좀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절대 혼자 밤에 돌아다니지 않기로 나름 여행 철칙을 세웠지만 이번 여행에선 좀처럼 지키기 어렵다. 어두워지면 바로 숙소로 돌아가기! 그러나 라파즈를 한 눈에 볼 수있는 전망대를 바로 앞에 두고 돌아갈 순 없었다.
라파즈는 볼리비아의 수도이자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도시이다. 세련된 건물도 간혹 보였지만 대부분은 낡고 오래된 건물에 길마저 복잡하고 교통체증은 최악인 듯했다. 하지만 케이블카를 타는 곳과 케이블카는 최신 시설이었다. 케이블카 안에서 만난 현지인 여자가 한국인이냐고 물었다. 나를 보고 한국인이라고 맞히는 경우는 정말 드문데, 어떻게 알았냐고 하니까 요즘 한국에 관심이 많아져서 한국 사람인 것 같이 보였다고 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나를 일본인으로 본다. 일본인들 마저도 일본말로 나에게 말을 걸 정도인데 한국사람이냐고 물으니 고마웠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의 삼성 핸드폰을 보여주었다. 아주 자랑스럽게. 그녀는 퇴근하는 길이라고 했다. 현지인들에겐 케이블카가 교통수단이며, 몇 개의 다른 색깔의 케이블카 호선이 다른 쪽에 또 있다고 자랑했다. 마치 지하철 호선처럼 케이블카가 그렇게 있는 것이었다. 케이블카가 생기기 전에는 출퇴근이 너무 힘들었는데 지금은 케이블카 덕분에 너무 편하고 좋다고 했다. 하지만 높은 곳에 사는 것은 여전히 힘들다고 아래 동네가 살기도 좋고 비싼 곳이라고 했다. 하긴 우리나라에도 산동네는 높은 곳에 있고 살기 힘들건 마찬가지지 않나... 여하튼 볼리비아 사람들은 적의가 없고 순수한 것 같다. 대부분의 남미 사람들이 그렇지만 말이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니 정말 완벽한 야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올라오는 중간중간에도 야경이 멋있다 생각했는데 전망대에서 보니까 확실히 가슴이 뻥 뚫린듯 했고 정말 완벽하게 멋있었다. 라파즈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내일 다시 비행기를 타고 수크레로 돌아가야 하지만 이 환상적인 야경 하나로 모든 것이 보상되는 듯했다. 그래, 이 야경이라도 볼 수 있는 것이 어디야. 하마터면 이것도 못 보고 라파즈에 점만 찍고 갈 뻔했는데, 감사할 따름이었다.
야경을 보고 내려와서 미친 듯이 뛰어서 숙소로 돌아갔다. 다행히 길에 가로등과 차들이 다니고 있어서 환했지만 무서웠다. 아무리 사람들이 순수하고 적의가 없다곤 하지만 모두가 그런것은 아니니... 특히 밤에는 조심하는 것이 최선이다. 숙소에 와서 지하 Bar에서 간단히 저녁과 맥주를 마시고 올라와서 바로 씻고 취침했다. 호스텔이 핫한 곳이어서 너무 젊은 친구들이 많았다. 어리다고 해야할 정도로... 그들은 넘치는 활기를 밤늦게까지 불태웠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도 어느새 잠이 들어 일어나니 아침이었고, 바로 준비해서 미니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갔다. 공항으로 가는 길이 엄청 막혔는데, 길이 무슨 달팽이관을 타고 올라가는 것처럼 나선형으로 둥글게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매연도 장난아니었고 교통체증이 심한만큼 소음도 장난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라파즈를 이렇게 스치듯 지나가도 아쉽지는 않았다. 다만 짧고 강렬하게 내 기억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