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반짝 빛나는 길, #10 Copacabana 축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호텔을 찾아 나섰다. 어제저녁 먹으러 나와서 본 호수 주변에 제법 호텔들이 많아서 오늘은 그 주변으로 방을 알아보려고 아침 산책 겸 호수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몇 군데 마음에 들어서 들어가 보니 역시나 방이 없다. 어쩜 이렇게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축제일에 딱 맞춰서 오다니... 이래서 사전 정보가 중요한 것이다. 몇 군데 호수 주변 호텔을 더 돌아다니다 호수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호텔에서 방을 구했다. 아침도 제공되고 방에서 호수도 보였다. 다행히 오늘 아침에 방이 비워졌다며 청소 후에 체크인 시간에 짐을 옮기기로 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쉬면서 코파카바나를 둘러볼 예정이다. 그리고 내일 할 태양의 섬 투어도 예약하고 모레 떠날 버스도 예약해야 할 것이다. 우선 아침 먹을 곳을 찾아야 했다. 작고 예쁜 카페들도 드문드문 보이는데 딱히 끌리는 데가 없다. 어제저녁에 먹은 송어구이가 생각났다. 이따가 오후에 또 송어 구일 먹어야지.
축제 때문인지 광장과 시장 골목 쪽에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볼리비아 전통의상을 입고 귀여운 모자를 쓴 사람들이 축제를 즐기러 모여들었다. 볼리비아 전통의상에는 작은 중절모 같은 것이 세트인가 보다. 남자든 여자든 모두 둥근 테가 있는 모자를 썼다. 아주 귀여웠다. 하얗고 큰 성당이 있는 광장에는 벼룩시장 같은 임시시장이 생겨서 신기한 물건들이 많았다. 이 축제를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어제 호텔 주인의 설명에 따르면(대충) 예수와 마리아와 연관이 있는 축제인 것 같았다. 마리아의 신성이 여기에 퍼져서 성당을 세웠는데 그 성당에 영험한 뭔가가 있어서 유명하다나... 대충 이런 이야기였던 것 같다. 내가 제대로 알아 들었다면 말이다. 그래서인지 유독 마리아 조각상을 많이 팔았다.
마리아 조각상을 보니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서 나도 작은 걸로 하나 구매했다. 그분에게 전해질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생각나서 구매했는데, 그분은 사실 전 직장에서 가장 나를 못살게 구워삶았던 사람이었다. 상처도 많이 받고 시달린 기억밖에 없지만, (같이 일하면서 시달린 와중에도 그분이 애처로워 보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생각나서 선물까지 구입하고 보니 용서가 되었나 보다. 지나고 보니 나쁜 것만은 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덕분에 나도 발전한 것도 있었고 무엇보다 지금 여기 지구 반대쪽까지 올 수 있게 된 원인 제공도 해주었으니 말이다.
시장에는 흥미로운 물건들로 넘쳐났다. 특히 산처럼 쌓아놓고 파는 견과류가 마음에 들었다. 남미에서 본 견과류 중에 가장 싸고 종류도 많았다. 몇 가지 종류의 견과류와 말린 과일을 샀다. 길거리 음식들도 많이 팔고 과일도 바로 먹을 수 있게 깎아서 팔기도 했다. 사실 볼리비아 음식은 그렇게 맛있는 것을 먹은 기억이 없다. 가장 맛있었던 것은 호수가의 포장마차에서 파는 송어구이가 제일 맛있었다.
하루 종일 골목마다 음악이 넘쳐나고 흥에 겨운 사람들이 몰려다녔다. 거리에서 소규모 카니발 같은 행진도 했다. 전문적인 느낌은 하나도 들지 않았는데 아마도 각 마을 대표들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더니 무대가 보였다. 무대에서 공연도 하고 연설도 했다. 사람들은 고개를 빼고 열심히 보고 즐겼다. 매우 점잖게. 사람들이 모인 거리에는 맥주를 짝으로 쌓아 놓고 파는 것도 보이고 길거리 음식들을 곳곳에서 팔았다. 정말 꽤나 큰 축제인가 보다. 이 호수 인근의 마을들의 사람들이 다 모인 듯했다. 마을별인지 부족별인지 전통의상들이 조금씩 달랐다. 그래도 아주머니들은 모두 긴 머리를 정성스럽게 땋아서 비슷한 모양의 좀 작아 보이는 귀여운 중절모를 머리에 얹어놓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축제일에 코파카바나에 와서 축제를 볼 수 있게 된 것은 운이 좋은 것이지만 사실 난 사람이 많은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구경 중에 가장 재미있는 것이 사람 구경이라지만 난 사람보다는 풍경을 좋아하는 쪽이다. 그래서 대충 이 사람들이 축제에서 뭐하나 잠시 보다가 한적한 거리로 나와서 호수 쪽으로 내려갔다. 다행히도 호수 쪽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코파카바나는 작은 동네여서 돌아다닐만한 곳이 많지 않다. 골목을 몇 바퀴 돌다가 다시 호수 쪽으로 내려와서 카페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며 호수를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오전에 여행사에 들러서 태양의 섬 투어를 예약했었다. 오후에도 투어를 갈 수 있다고 했는데, 이렇게 지루할 줄 알았으면 오늘 태양의 섬으로 갈 걸 그랬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버스 예약을 안 했다는 생각이 훅 스치며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혹시 이 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나가야 한다면... 아마도 버스에 자리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레 아침에 나갈 생각이라 내일 해도 되겠지 했는데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축제 때문인지, 아니면 오후여서 그런지 문 열어놓은 여행사가 별로 없었다. 역시나 모레 나가는 버스는 자리가 없다고 했다. 아차 싶었다. 그리고 짜증이 몰려왔다. 왜 하필 축제할 때 와서... 하, 이번 여행은 어떻게 된 일인지 나가고 싶을 때 제대로 출발할 수가 없다. 계획대로 된 것이 별로 없다. 하루 이틀씩 밀려서 원하지 않는 곳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 그래도 나쁘지 않았는데 시간이 밀리는 것이 반복되다 보니 짜증이 났다. 며칠 후에 비행기 시간만은 꼭 맞춰야 한다. 버스는 내일 다시 알아보기로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멀리서 축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해 질 녘에 다시 호수가로 나가보았다. 해 질 녘의 호수는 정말 환상적이었다. 호숫가에서 한참을 혼자 놀다가 어제 갔던 포장마차에 가서 저녁으로 송어구이를 먹었다. 주인아저씨가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해 주었다. 어젠 보자마자 한국인이냐며 묻더니 방명록을 보여주었다. 한국사람들이 어지간히 다녀갔던 곳이었다. 나에게도 방명록을 쓰라며 볼펜을 갖다 주었는데 내가 내일 쓰겠다고 미뤄뒀었다. 그걸 기억해서 반갑게 맞아 주었는지 모르겠다. 음식 맛이 나쁘지 않아서 방명록에 '맛있어요.'라고 한 문장 정도는 쓸 수 있겠지만 굳이 흔적을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사람들이 대부분 방명록을 길~게 써 놓아서 나도 쓰면 길게 써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이 집에서 마지막 날까지 식사를 했는데 다행히도 아저씨가 두 번 다시 방명록을 건네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다시 축제가 열리는 거리로 올라가 보았다. 이제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놀고 있었다. 무대에서도 춤을 추고 노래를 하는 것이 노래 경연을 하는 것 같았다. 놀라운 것은 이 점잖은 사람들이 맥주를 짝으로 쌓아 놓고 마셔대고 있었다. 대부분 중년의 아줌마, 아저씨들이었는데 체력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종일 축제에 참가하느라 길에서 제대로 앉지도 못했을 텐데 저녁 늦게까지 맥주를 짝으로 마시고 떠들고 놀 힘이 있는지 정말 대단했다. 축제는 어딜 가나 다 비슷비슷한 것 같다. 먹고 마시고 놀고 떠들고. 이들도 이렇게 시끌시끌하게 먹고 마셔대느라 새벽까지 음악이 끊이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