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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나 Jun 13. 2021

토레스 델 파이네로 가는 길목에서

외로운 바람의 땅 파타고니아, #8 푸에르토 나탈레스

아침을 먹고 커피까지 여유롭게 마시고 나서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내가 잘못 알고 있나 싶어 체크아웃하면서 호스텔 직원에게 버스가 정말 오기는 하는 건지 물어봤더니 그는 웃으며 '남미 시간이잖아'라고 말하며 조금 더 기다려보라고 했다. 다행히도 버스는 곧 왔다. 어제와 다르게 큰 버스가 와서 좀 어리둥절하긴 했지만 숙소 앞까지 픽업을 오니까 좋았다. 엘 칼라파테의 모든 시스템이 이렇게 숙소 앞까지 픽업을 해주는지는 모르겠지만, 엘 칼라파테에서 내가 선택했던 것들은 모두 숙소 앞까지 나를 데리러 오고 내려놓고를 해 주었다. 


이제 버스를 타고 그 유명한 루타 40 도로를 달려서 칠레의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간다. 푸에르토 나탈레스는 토레스 델 파이네(Torres del paine)를 가기 위한 관문 같은 도시이다. 나는 3박 4일 동안 토레스 델 파이네의 W코스를 트레킹 할 예정이다. 물론 혼자서. 일정에 맞춰서 산장과 텐트까지 3박 4일에 걸쳐 소요되는 모든 것들은 예약을 해 놓은 상태이다. 이제 나는 일정에 맞춰서 차근차근 걸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버스는 쾌적했다. 나는 버스에 타자마자 약간의 센티함으로 엘 칼라파테와 마음으로 이별식을 하고 이내 잠이 들었다. 중간중간 깨서 끝없이 펼쳐진 평원 한가운데로 회색 아스팔트가 깔려있고 버스는 그 길을 조용히 따라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말로만 듣던 루타 40이었다. 


한참을 달리던 버스가 속력을 낮추고 멈췄다. 국경이었다. 단조롭고 깨끗한 느낌이 나는 출입국관리소에서 짐 검사를 하고 비자를 받았다. 칠레 국경을 여러 번 넘었지만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 것은 마트 영수증 같은 관광비자 종이였다. 나는 그 종이를 받아 아주 소중하게 여권 수첩에 끼워 넣었다. 아르헨티나 - 칠레 국경을 넘으면 바로 토레스 델 파이네로 갈 수 있다고 했다. 토레스 델 파이네 이정표도 보였다. 만약 여기에서 바로 토레스 델 파이네로 간다면 굳이 푸에르토 나탈레스에 가서 하루 묵을 필요가 없다. 나는 시간이 애매할 것 같아 처음부터 고려해보지 않았지만, 시간이 이제 12시를 넘은 시각이니 국경에서 바로 토레스 델 파이네로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국경에서 바로 갔더라면 일정이 상당히 꼬였을 것이고 또 이후에 다음 도시로 가는 버스표를 구하는 것도 어려웠을 것이다. 여러모로 고민해서 수월하고 안전한 루트로 정했고, 나의 결정은 만족할만한 결정이었다.  



푸른색과 회색이 섞인 듯한 바다를 끼고 달리던 버스 앞에 '푸에르토 나탈레스 환영'이라는 꽃으로 장식된 글자가 보였다. 버스는 터미널에 도착하기 전에 시내에서 한번 정차했다. 나는 터미널까지 가지 않고 내렸다. 터미널 근처에 숙소를 잡기는 했지만 멀지 않은 거리 같아서 내려서 걸었다. 하지만 예약해둔 숙소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내 덩치보다 더 큰 배낭을 메고 다녀야 해서 너무 힘들었다. 겨우겨우 호스텔을 찾았으나 예약 사이트에서 본모습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어서 조금 혼란스러웠다. 다행히 주인은 친절했고, 내부는 좀 낡고 좁은 편이었지만 나름 깔끔하게 정돈된 분위기여서 괜찮았다.


환전도 해야 하고 점심도 해결할 겸 시내로 나갔다. 환전을 해야 버스표를 살 수 있으니 먼저 시내로 가서 환전하고 터미널로 가서 내일 토레스 델 파이네로 갈 버스표를 예약하고 일주일 후에 푼타 아레나스로 가는 버스표도 미리 예약해 둬야 했다. 거의 4시가 가까운 시간이었으나 상점들은 시에스타 때문인지 거의 다 문이 닫혔다. 환전소도 문이 닫혀 있었다. 시내 모퉁이의 카드 결제가 가능한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으며 환전소가 열리기를 기다렸다. 5시가 넘은 시간에 상점들이 드문드문 다시 문을 열기 시작했다. 환전소를 찾으러 다니다가 한국인 여자를 만났다. 여행 시작 후 처음 만나는 한국인이었다. 반가운 나머지 나도 모르게 말을 걸고 같이 환전소를 찾으러 갔다. 환전은 그리 만족스러운 가격이 아니었다. 며칠 전부터 환율이 안 좋다고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으니 우선 필요한 금액만큼만 환전했다. 한국인 여자와는 환전소에서 약간의 정보를 교환하고 나와서는 각자의 길로 갔다. 반가운 마음도 잠시였고 약간 머쓱하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휑해졌다. 


터미널 가는 길에 마트가 있길래 들러서 내일 산속으로 가져갈 간식과 과일들을 좀 샀다. 그런데 물가가 다른 곳보다 비싸다는 게 느껴졌다. 사실 나는 마트에서 물건 살 때 그렇게 꼼꼼하게 가격을 기입해두지 않아서 얼마만큼 비싸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아르헨티나보다 비싸게 느껴졌다. 칠레가 더 싸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아닌가 보다. 



터미널에 들러서 버스표를 구매하고 다시 숙소로 왔다. 터미널에는 토레스 델 파이네로 가는 버스가 엄청 많았다. 서로 다른 버스회사가 비슷한 시간대에 운행하고 있어서 쉽게 표를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카드 결제도 되어서 w트레킹 후에 푼타 아레나스로 가는 버스는 카드로 결제했다. 


숙소에서 좀 쉬고 싶었으나 같은 방에 묵게 된 커플의 애정 행각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어서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파타고니아 지역이 좋은 것 중에 하나는 해가 길다는 것이다. 저녁 8시가 가까웠지만 아직 밖은 환했다. 일 년 내내 이렇게 해가 긴지는 모르겠으나 여행하기엔 너무 좋은 환경이다. 


푸에르토 나탈레스는 작은 해양도시이다. 알록달록하고 낮은 나무집들이 즐비한 길을 따라 쭉 걸어갔더니 바다가 나왔다. 높지 않은 언덕 같은 길에서  멀리 보이는 푸른 바다가 신기루처럼 보였다. 해안 도로까지 가기엔 좀 멀어 보여 방향을 바꿔서 중앙 공원을 향해 걸었다. 중앙공원 근처에 유독 사람들이 북적북적한 가게가 보여 뭔가 하고 봤더니 아이스크림 가게였다. 정말 대단한 맛인가 싶어 나도 줄을 서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는 아이스크림을 콘으로 주문했다. 특별히 맛있는 줄은 모르겠고 그냥 일반적인 아이스크림 맛이었다. 남미 사람들은 참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길을 따라 걸었더니 어느새 해안가 도로가 나왔다. 해변도 백사장도 없었다. 약간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운 바다 분위기였다. 아무래도 날씨가 흐린 탓도 있겠지만, 흔히 우리나라 바다 하면 떠오르는 풍경과는 사뭇 다른 바다 풍경이어서, 바다를 보면서도 시원하고 푸른 동해 파다가 그리웠다.  


이 작고 예쁜 도시는 예술에 아주 진심인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다. 길을 걸으며 본 간판이나 가게 앞에 칠한 페인트마저도 예술적 감각이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바닷가 도로 한쪽에서 쇠와 나무를 깎고 붙이고 칠하는 설치 예술가들이 작업하는 모습이 보였다. 며칠 후에 무슨 미술 페스티벌 같은 것이 열린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해안가에 멋진 몇몇 작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토레스 델 파이네를 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하는 도시라고, 특별히 할 것도 볼 것도 없다고 들었는데 나름 예술적으로 매력이 있는 곳이었다. 



바닷가에서 한참을 거닐며 넋 놓고 있다가 문득 내일부터 토레스 델 파이네 트레킹을 시작해야 한다는 현실이 강하게 느껴졌다. 들어가기 싫은 숙소지만 얼른 들어가 짐 정리하고 쉬어야 했다. 숙소를 향해 걸으면서 저녁은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사람들이 많이 있는 큰 식당으로 조금 망설이다 들어갔다. 넓고 큰 식당이라 테이블도 많고 사람도 많았다. 웨이터가 추천하는 음식을 시켰는데 모둠 스테이크 같은 것이었다. 양도 엄청 많고 고기 종류도 대여섯 종류로 다양했다. 파타고니아 맥주와 함께 먹다가 도저히 못 먹겠어서 포장해 달라고 했다. 이걸 내일 산에서 먹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일단은 싸가기로 했다. 웨이터는 감자까지 더 넣어서 아주 꼼꼼하게 포장해 주었다. 


숙소로 돌아와 짐 정리를 했다. 큰 배낭은 숙소에 맡기고 작은 배낭만 들고 가기 위해서 대대적인 정리를 해야 했다. 푸에르토 나탈레스에서 토레스 델 파이네로 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숙소에서 추가 요금 없이 짐을 맡아 준다. 나는 최소한의 짐만 가지고 가기 위해 정말 필요한 것만 챙겼다. 3박 4일 동안 속옷과 셔츠만 갈아입고 바지와 내피 및 외피 점퍼는 그대로 입기로 했다. 그래도 추울지 모르니 작은 담요 하나는 꼭 챙겼다. 필수품보다는 낮에 샀던 먹거리들 때문에 배낭이 무거워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이솝의 광주리처럼 가벼워 질 거라서 처음에 조금 힘들더라도 모두 가져가기로 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옥상에 올라가 하늘을 보니 하늘에 별이 총총하니 아름다웠다. 하루 종일 많이 걷고 돌아다녔지만 정작 말은 몇 마디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래도 오랜만에 한국어로 잠깐이지만 대화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 W트레킹을 같이 할 수 있는 동행을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지만, 이 숙소에는 한국인도 없고, 혼자 여행하는 사람은 나뿐이고 모두 일행과 함께 였다. 쉽게 대화할만한 상대가 없어서 더 외롭게 느껴졌다. 저녁 무렵에 걸었던 황량하고 어딘가 쓸쓸했던 바다 풍경이 마음에 남아서 더 그렇구나라고  스스로 다독이며 잠을 청했다.  





힘들게 아침이 밝아 왔다. 침대 스프링이 바닥까지 꺼지는 듯한 침대에서 뒤척이다 거의 잠을 한숨도 못 잔듯한 컨디션으로 일어났다. 새벽까지 한 침대에서 떠들며 놀던 커플은 그래도 잠은 각자의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W트레킹을 하는 첫날인데 아침부터 몸 상태도 기분도 별로 좋지 않았다. 파이팅 넘치는 모습으로 신나게 트레킹 하는 내 모습을 상상했었는데, 이런 기분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숙소에서 간단한 아침이 제공되었다. 커피, 차, 요구르트, 스크램블에그와 수프 같은 것도 제공되었다. 호스텔의 상태에 비하면 괜찮은 아침이었다. 내가 일등으로 식사를 하고 짐을 챙겨 내려왔다. 주인에게 큰 배낭을 맡기고 배낭의 번호표를 받았다. 나름 체계도 있는 모양이었다. 주인은 필요하면 스틱도 빌려줄 테니 가져가라고 했지만 나는 사양했다. 물론 공짜는 아닐 테지만 딱히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았다. 


버스터미널에 갔더니 토레스 델 파이네로 가는 버스들이 즐비했다. 트레킹 가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모두 들뜨고 상기된 모습이었다. 나는 긴장이 되었다. 이제 이 버스를 타고 들어가면 3박 4일 동안은 산속에서 걷는 일 외에는 할 것도 없고, 다른 건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무탈하게 트레킹을 마치고 다시 이 황량한 바다를 벅찬 마음으로 볼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토레스 델 파이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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