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바람의 땅 파타고니아, #9 토레스 델 파이네 Las torres
버스는 12시가 되기 전에 토레스 델 파이네 입구에 도착했다. 인포메이션센터인 Laguna amarga에 도착한 버스에서 모두 내려서 센터 안으로 들어가 의무적으로 안전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 이후에 입장료를 지불하고 입장할 수 있다고 했다.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크게 혼잡스럽지는 않았다. 무질서 속에 어떤 질서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안전 교육은 영상을 보여주며 간단히 끝났고, 좀 과하다 싶을 만큼의 입장료를 내고 지도를 받아 들고 나왔다. 첫 숙소 근처에 있는 Las torres hotel까지 가는 셔틀버스를 탔다. 셔틀버스는 입구를 향해 조그만 걸어가면 대기하고 있는 버스를 볼 수 있고, 그걸 타면 된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셔틀버스를 타고 로스 토레스 호텔 앞에 있는 웰컴센터까지 갈 수 있다. 웰컴센터는 기념품 샵과 카페 등으로 깔끔하게 정돈된 곳이었다. 웰컴센터에서 숙소 정보를 받아 들고 우선 짐을 내려놓기 위해 숙소부터 찾아갔다. 토레스 델 파이네 안에서 내가 예약한 첫 번째 숙소는 Torre central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torre norte 산장인데, 로스 토레스 호텔 옆에 위치한 산장과 호스텔을 결합해 놓은 듯한 숙소였다.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안에서 가장 싸고 괜찮은 곳이었다. 도미토리의 2층 침대였지만 깨끗하고 푹신한 침구가 제공되었고 편의 시설도 괜찮았다. 나는 이곳이 가장 마음에 들었는데 텐트 숙박비용보다 저렴했다. 숙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첫 번째 등반지인 Las torres를 등산할 준비를 하고 나섰다.
W트레킹을 하는 사람들은 보통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던지,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던지 두 가지 중 방향을 선택할 수 있다. 둘 다 장단점이 있지만, 나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하는 길을 택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면 우선 해를 등 지고 걸으니 덜 탈것 같았고, 경사가 동쪽이 높다고 해서 내리막길을 걸을 수 있으니 수월하게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서쪽에서 동쪽으로 걷는 사람들도 많다.
나는 첫날의 목표를 수행하기 위해 가볍게 카메라 가방만 들쳐 메고 길을 나섰다. 호텔에서 라스 토레스까지는 왕복 8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하지만 해가 기니까 부지런히 걸으면 어두워지기 전에 다녀올 수 있을 것이었다. 푸른 벌판에 뾰족한 지붕을 인 예쁜 건물이 보였는데 다름 아닌 로스 토레스 호텔이었다. 호텔을 지나 이정표를 따라 자연 속으로 걸어갔다. 한낮의 뜨거운 태양이 이글거렸지만 바람은 바람대로 시원하게 불어왔다. 낮고 작은 꽃들이 핀 들판에 사람 두 어명이 걸어갈만한 좁은 길이 구불구불 나 있었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넓은 개울이 나오고 두 사람만 건널 수 있다는 작은 나무다리가 나왔다. 다리를 건너자 완전히 자연 속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어서 갈림길이 나왔고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칠레노 산장을 지나야 최종 목적지인 라스 토레스를 갈 수 있으니 우선 칠레노 산장을 향해 걸었다. 구불구불한 오솔길은 점점 가팔라졌고 급기야 거친 오르막 산길이 나왔다.
산길을 오르다 뒤를 돌아보니 초록빛 호수가 산등성이 사이에 보석처럼 박혀 있었다. 토레스 델 파이네에는 빙하가 녹아서 흘러내려온 물이 고여 호수가 된 큰 호수가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라고 그레이, 다른 하나는 라고 노르덴스크홀이다. 그 외에 주위에 크고 작은 호수들이 많아서 호수들로 둘러싸여 있다고 해도 될 정도다. 여하튼, 호수의 색깔은 보석보다 더 아름다운 비취색이었다.
산을 오르는 듯한 가파른 길과 평탄한 오솔길이 반복해서 나왔다. 많이 힘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쉬운 길도 아니었다. 가장 무서운 것은 계곡 옆으로 난 좁은 길을 걷는데 바람이 사정없이 불어대서 혹시나 바람에 떠밀려 계곡 아래로 떨어지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이곳은 정말 문명과 물질의 개입을 최대한 줄이려는 듯 순수한 자연 그 자체이다. 이정표 외에는 그 어떤 인간의 개입을 볼 수 없다.
분명 햇빛이 뜨거울 정도로 내리쬐었는데 어느새 하늘엔 구름이 덮여있었다. 바람은 계속 세차게 앞뒤 방향 없이 막무가내로 불었다. 정말 바람의 땅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오직 자연의 지배 아래 인간은 묵묵히 순응할 수밖에 없는 순수한 대자연의 땅이었다.
인간은 이러한 자연에 순응하기도 하지만 자연 속에서 더불어 살기 위해 문명의 이기를 활용하기도 한다. 어디든 인간의 편의를 위한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위험한 계곡 옆의 외길을 바싹 웅크리며 걸어서 칠레노 산장에 도착했다. 숲 속의 작은 산길을 올라갔더니 산장이 떡하니 나온 것이었다. 산장 안은 카페처럼 되어있어서 몸을 녹일 수도 있고 간단한 음료와 스낵을 먹을 수도 있었다. 대자연도 위대하지만 이런 대자연 속에 쉼터를 마련한 인간도 대단한 존재이다.
칠레노 산장에서 커피 한잔 마시고 나와서 다시 걸었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늘은 온통 회색 구름으로 덮였고, 앞의 산은 안개에 싸인 듯 뿌옇게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올라가도 삼봉을 보기는 힘들 것 같았다. 그냥 내려갈까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내 생애에 또 언제 이 땅을 밟아보겠나 싶은 생각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무가 빽빽한 숲을 지나고 몇 개의 개울을 건너니 눈 앞에 설산이 보였다. 가파르진 않지만 산길은 계속 이어졌고 급기야 돌산이 나왔다. 돌산 입구에서 사람들이 드문드문 모여 있었다. 통행로에 쇠사슬이 쳐져 있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마 악천후로 못 들어가게 하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돌아가지 않고 기다리는지 모르겠다. 나도 덩달아 함께 기다렸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우산도 없이 비를 그대로 맞고 서 있는데 무리 중에 한 사람이 내게 인사를 했다. 엘 칼라파테에서 함께 방을 쓰고 저녁을 먹은 간호사였다. 사실 그녀의 이름을 잊어버렸다. 그녀도 내 이름을 기억 못 하는지 이름을 부르지 않고 팔을 잡고 흔들어댔다. 반갑다며.
그녀는 오전에 출발했다고 했다. 삼봉을 보려고 위에서 기다렸으나 구름이 걷히지 않아서 못 보고 결국 포기하고 내려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녀는 비가 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우비까지 입고 있었다. 비가 계속 올 것 같냐고 물으니 그녀는 아마 그럴 것 같다고 했다. 삼봉이 코 앞에 있는데 보지도 못하고 내려가야 하나 싶었지만 난 좀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녀는 W트레킹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내일은 서쪽에 가서 Gray 빙하를 보고 파타고니아를 떠날 것이라고 했다. 우비가 필요하면 벗어 주겠다는 그녀를 만류하고, 우리는 빗물로 범벅된 서로의 옷에도 아랑곳 않고 포옹을 하며 아쉬운 작별을 했다.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참 따뜻한 사람이었다.
저너머에 삼봉이 있을 텐데 하며 한 20여분을 기다렸을까, 누군가가 쇠줄을 걷어 주었다. 빗방울도 잦아들었다. 사람들은 웅성대며 돌산을 향해 걸었다. 돌무더기가 많았지만 가파르지 않아서 그렇게 힘들진 않았다. 피츠로이 마지막 구간과 비교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행히 구름이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드문드문 파란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고 구름이 빠르게 움직였다. 사람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모두 옆 사람에게 Animo!(파이팅)을 외치며 힘을 내서 걸어갔다. 내 앞에는 노부부가 걸어가고 있었는데 구름이 걷히기 시작하자 흥분한 할머니가 할아버지 손을 뿌리치고 혼자 질주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조심하라고 큰 소리로 한마디 하고는 묵묵히 다시 걸었다. 나도 할아버지를 추월해서 할머니를 뒤따라 갔다.
멀리서 큰 바위산이 보였고 그 뒤에 삼봉이 눈에 들어왔다. 완전한 형체는 아니었지만 구름이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마음이 벅차올랐다. 반만 봐도 이렇게 벅찬데 저 멋진걸 완전히 다 볼 수 있다면 얼마나 더 감격스러울까 싶었다. 빨간 재킷을 입은 할머니는 다람쥐처럼 바위 위를 뛰어다녔다. 그녀는 나도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삼봉을 향해 달려갔다. 큰 바위 더미를 헤쳐나가 듯 건너뛰었더니 어느새 호수가 눈 앞에 보였다. 역시 아름다운 비취색의 고즈넉한 호수였다.
호수 앞 라스 토레스가 잘 보이는 큰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쉬면서 구름이 걷히길 기다렸다. 사람들은 모두 신나 보였다. 못 볼 줄 알았던 삼봉을 볼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겨서 연신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나도 엄청나게 사진을 찍어대고 있었고, 혼자 온 다른 여자와 서로 인생 샷을 찍어주며 놀았다. 그 사이 구름은 점점 걷혔고 드디어 라스 토레스의 완전한 삼봉을 볼 수 있었다. 물론 구름이 드리운 모습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감격 그 자체였다.
거대한 바위 산을 마주하고 섰더니 온전히 자연 속에 나 혼자인 듯 대자연은 고요했다. 한참을 라스 토레스를 바라보며 감상에 젖어있었다. 완전히 맑은 날은 아니지만 그래도 완전한 형체를 볼 수 있었고, 삼봉 주위에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구름을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멍 때리기 정말 좋은 봉우리였다. 삼봉을 바라보고 있는 순간은 그 어떤 생각도 안 했던 것 같다. 머릿속에 잡다하게 남아 있던 생각들이 잠시 멈췄고, 여행 내내 걸으며 생각했던 보고 싶은 사람에 대한 생각마저도 잠시 멈췄던 것 같다. 사실 정확히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조금 들떠있었고 감격스러웠고 또 감사했던 것 같다.
내려오는 길은 발걸음이 가벼웠다. 비로 인해 땅이 질퍽이는 곳도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전혀 기분이 나쁘지도 겁이 나지도 않았다. 말 그대로 산뜻했다. 산을 내려가면서 다시 맑아진 파란 하늘을 보니, 내가 차원이 다른 어떤 은밀한 곳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만약 누군가가 토레스 델 파이네를 트레킹 한다고 하면, 나는 과감하게 도전하라고 할 것이고 날씨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우산이 없는 것에 대해서도 절대 걱정하지 말라고 덧붙이고 싶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날씨라니... 파타고니아의 날씨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다만 행운이 필요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