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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나 Jul 07. 2021

목적지를 향해 함께 걷는다는 것은

외로운 바람의 땅 파타고니아, #10 토레스 델 파이네 W트레킹2일 차

숲 속에서 잔듯한 기분으로 아주 산뜻한 아침을 맞았다. Torre norte 산장의 깨끗하고 포근한 침구는 호텔의 것을 방불케 했고 비록 도미토리의 좁은 침대였지만 공기와 침구 덕분에 아주 숙면을 취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어제 8시간을 걸었던 탓이겠지만. 우려했던 것보다 다리도 아프지 않았고 컨디션도 좋았다. 


W트레킹 2일 차, 오늘은 최장 13시간을 걸어야 하는 날이다. 부지런히 걸어서 Italiano 캠핑장까지 2시 전에 도착해서 Britanico 봉우리를 보는 것이 오늘의 목표이다. Britanico 전망대까지 가는 길을 오후 4시인지 2시인지 정확하게 모르지만, 그 시간쯤에 닫힌다고 했다. 그래서 계획은 아침 7시 전에 출발하는 것이었으나 아침을 챙겨 먹고 미적거리다 보니 8시가 넘었다. 


아침을 먹을 때 약간의 고민에 빠진 것이 늦어진 이유였다. 사실 W트레킹을 할 때 식량 분배를 잘해야 한다. 대부분의 산장에는 카페나 식당을 같이 운영하기 때문에 사 먹어도 괜찮지만, 엄청 비싸다. 경비 절감 차원에서 나는 숙박비에 포함되지 않은 이상 산장의 식당을 이용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빵이며 과일이며 초코바까지 소분해서 싸 왔고, 아껴두었던 컵라면 2개도 고이고이 모셔왔다. 문제는 오늘 아침에 컵라면을 먹을까 말까라는 고민을 10분 이상 한 것 같다. 원래의 계획은 어제저녁에 먹는 거였는데, 어제저녁은 그전날 포장해온 스테이크를 먹었기에 라면이 남았고, 난 빵 대신 라면이 먹고 싶었으나 과연 먹어도 괜찮을까를 (식당에 퍼질 냄새며, 주위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며, 이동 중간에 화장실이 없는 것 등이 신경 쓰였기 때문에) 고민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결국 나는 어느새 뜨거운 물을 찾아다녔고, 카페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먹는 것으로 이렇게나 깊은 고민과 갈등을 한 것이 언제였던가 싶을 만큼 나 자신이 생소했다. 며칠 동안 자연 속에 스스로 갇혀서 내 발이 아니면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니, 몸을 가장 잘 챙겨야 하고 되도록 끼니때마다 음식도 먹어줘야 한다는 생각에 지나치게 식량에 대해 고민했던 것 같다. 그나마 둘째 날인 오늘의 숙소는 식사가 포함되어 있어서 고민을 덜 수 있다. (오늘 묵을 Frances 캠핑장은 텐트+식사가 포함된 패키지 선택이 필수여서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은 식당에서 제공하는 식사다운 식사를 할 수 있기에 다행이었다.) 


약간 가벼워진 배낭을 메고 오늘의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날씨가 좋으니 기분도 최고였다. 먼저 Las torres hotel을 지나 Cuerno 산장을 향해 걸어야 했다. 이 구간은 11km 정도로 평탄한 오솔길 같은 곳이었다. 처음에는 힘들지 않았으나 배낭의 무게도 있고, 어디를 둘러보던지 감탄이 나오는 풍경에 쉬다 걷다를 반복했다. 사실 힘든 것보다는 풍경이 예뻐서 사진도 찍고 그 속에 좀 더 머물고 싶어서 재촉할 수가 없었다.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뭉개 구름이 하늘을 수놓고 가끔씩 구름이 만들어주는 그늘에서 쉬면서 멀리 신기루처럼 걸려있는 무지개를 쫓아 좁은 오솔길을 따라 걸어갔다. 그저 자연에 감탄하고 푸르름을 만끽하며 걷는 일 외에는 다른 할 일이 없었다. 간혹 앞에서 마주 걸어오는 이들에게 "올라!(Hola, 안녕!)"라고 인사하는 것 말고는 입을 뗄 일이 없었다. 


내게도 동행이 있다면 참 좋으련만, 이렇게 멋진 곳을 혼자 감탄하며 걸어가려니 점점 심심함과 울적함이 몰려왔다. 내 앞에도 뒤에도 사람이 없었다. 보통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들었는데 그 반대로 가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았다. 맞은편에서는 간간히 사람들이 두 세명씩 나타나서 나를 스쳐갔다. 아주 따뜻한 미소와 'Hola!'라는 인사를 빼놓지 않고. 처음에는 반가운 마음에 인사하고 서로 길을 비켜 주기도 하면서 가끔 마주치는 이들에게 나도 그들 못지않은 멋진 미소를 보내줬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함께 걸어오는 그들이 부러웠고, 잠시 스치는 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다시 뒤돌아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그때쯤 내가 그들에게 보내준 미소는 따뜻함과 활달함이라고는 없는 그저 아련한 미소였을지도 모른다. 진심 누군가와 함께 같은 곳을 향해 걸어간다는 것은 행복 그 이상일 것이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던 들판을 지나니 그 끝에 비췻빛 호수가 나왔다. 바람은 끊임없이 불었지만 춥지는 않았다. 바람이 거세지면 호수 위에 물보라가 일어났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는 무지개가 나타나기도 했다. 호수를 벗 삼아 걸어가다 보면 낮은 나무들이 숲을 이룬 곳에 개울이 나타나기도 했다. 어김없이 나무다리도 나타나고 내가 이동하는 만큼 각도에 따라서 모양이 바뀌는 바위산도 멋있었다. 


좀 힘들다 싶을 때쯤 저 멀리 산장이 보였다. Cuernos 산장이었다. 숲 한가운데 자리 잡은 산장은 숲 속의 오두막 마을 같았다. 산장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부터 피곤이 더 밀려와서 당장 퍼질러 앉아서 쉬고 싶었지만 나는 산장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고 좀 쉴 작정이었기에 마지막 힘을 다해 열심히 걸어갔다. 그러나 산장은 생각보다 더 멀리 있었다. 구비구비 굽은 오솔길을 따라 걷고 개울을 건너 산장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산장에 도착하자마자 배낭을 벗어던지고 그 자리에 거의 눕다시피 기대어 앉아서 쉬었다. 누군가가 벗어놓은 배낭과 신발이 보였다.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산장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뭐든 벗어던지는 일을 하는 것이리라 짐작이 되었다. 전적으로 이해도 되었다. 산장 안의 카페는 아주 깔끔하고 잘 정돈이 되어 있었다. 샌드위치나 음료 등을 팔았지만 가격이 정말 비쌌다. 나는 배낭을 뒤져 빵과 음료를 찾아내서 거의 아무 맛을 느끼지 못하고 우물우물 씹어 삼켰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 바나나도 먹어 치웠다. 


사실 어제보다 덜 걸었는데도 훨씬 힘들었다. 배낭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이렇게나 크다니... 새삼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배낭을 가득 채워 온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배낭에 비하면 내 배낭은 큰 것도 아니었다. 다들 30kg는 넘을 듯한 크기의 메인 배낭을 메고 걸었다. 아마도 텐트를 짊어지고 다녀야 하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반면에 나처럼 보조 배낭을 메고 온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그들도 결코 쉬워 보이지 않았다. 작지만 내 배낭도 15kg은 족히 넘었다. 


숙소를 예약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의 텐트를 가지고 와서 텐트를 치고 캠핑을 해야 한다. 캠핑할 자리도 사전에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산장이나 텐트 예약에 성공한 경우라면 텐트를 짊어지고 와야 하는 수고는 덜 수 있다. 토레스 델 파이네 트레킹은 1월이 성수기라서, 1월에 W트레킹을 하기 위해 3박의 숙소를 모두 예약하기란 쉽지 않다. 나도 거의 5개월 전부터 수도 없이 시도한 결과 산장 2박과 텐트 1박의 숙소를 구할 수 있었다. 산장은 물론 텐트 숙박비도 호텔 못지않게 비쌌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숙박할 장소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을 얻은 거나 다름없었다. 



Cuernos 산장에서 에너지를 재충전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거의 한 시가 다 되었다. 2시 전에 Italiano 캠핑장에 도착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빠르게 걸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마음을 온통 빼앗길 정도로 예쁜 길이 나왔다. 투명한 호수의 물을 보며 걸을 수 있는 구간이었다. 토레스 델 파이네의 모든 길들이 아름다웠지만, 나는 이 구간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자갈 때문에 걷는 건 조금 힘들었지만 이 길을 벗어나기가 싫었다. 나는 또 시간을 잊고 호수를 바라보며 한참을 쉬었다. 호수의 물은 얼음물처럼 차가웠다. 


호수가를 벗어나자 얼마간의 산길이 지속되었다. 산길을 걷다가 개울을 건너고 보니 나의 둘째 날 숙박지인 Camping Frances가 불쑥 나왔다. 사실 Cuernos 산장에서 한 시간 반 밖에 걸리지 않았다. 캠핑 관리실 입구에 Britanico 등산로는 2시 이후에는 닫힌다는 안내 메모가 있었다. 시간은 이미 2시가 훨씬 지나있었고 italiano 산장까지 가더라도 Britanico 봉우리를 보러 올라가지는 못 할 것 같았다. Britanico 등산은 내일 아침으로 미뤄야 했다. 그렇게 보면 오늘은 별로 걷지도 않았다. 14km 정도를 6시간에 걸쳐 걸었기에 별로 힘들지도 않았다. 그러나 딱히 더 전진할 곳이 없어서 Frances 캠핑 관리실에서 관리인이 오기를 기다렸다. 



Frances 캠핑장은 유료 캠핑장이다. 위치는 좀 애매하게 Cuernos와 Italiano 사이에 있는데, Italiano 캠핑장 바로 밑에 있다고 보면 된다. 유료 캠핑장이어서 텐트존도 지정되어있고, 대여하는 텐트가 즐비하게 쳐져있었다. 캠핑장 근처에는 카페도 있고 식당도 운영되고 있었다. 샤워실과 화장실도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거의 30분 넘게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관리인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사람은 점점 많아졌고, 모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빨리 텐트에라도 들어가서 쉬고 싶은데 관리인은 올 기미도 안 보였다. 거의 4시가 다 되어서 관리인이 나타났다. 그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무표정하게 텐트를 배정해 주었다. 이 좋은 공기를 마시며 좋은 자연환경 속에 살면서 왜 저리 무표정해졌는지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혈기왕성한 젊은이에게 매일이 이런 산속에서의 생활이라면 조금 힘들 것 같다는 이해심도 생겼다.  


나의 텐트는 비교적 관리실과 가까운 6번 텐트였다. 텐트는 작지 않았고 3~4인용 정도는 되어 보였다. 안에는 침낭과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 물론 1인용으로. 텐트라서 밤에 추울까 봐 걱정이 되었지만 침낭 덕분에 그렇게 춥지는 않았다. 사실 나는 Frances 캠핑의 텐트를 다른 숙소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했다. 5개월 전부터 숙소를 컨텍했음에도 불구하고 Italiano에는 이미 숙소가 없었고, 이곳에도 텐트만 선택하는 사양은 마감이어서 패키지로 밖에 선택할 수 없었는데 이 패키지는 텐트임에도 불구하고 130달러였다. (텐트 + 저녁 + 아침 식사 포함, 아마도 식사 비용이 차지하는 부분이 큰 것 같았다.) 이 텐트는 내 배낭여행 사상 가장 비싼 숙소였다. 나는 100달러 이상짜리 호텔에서 한 번도 묵었던 적이 없는데, 이 텐트는 웬만한 호텔방보다 비쌌지만 이마저도 없었다면 W트레킹을 포기해야 할 상황이었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선택했다. 그러나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텐트도 아늑했고, 저녁과 아침에 제공된 식사도 맛있었다. 그리고 간식 주머니도 제공했는데, 음료와 샌드위치, 초코바 등이 들어있어서 점심으로 먹을 수 있었다. 



샤워실에서 따뜻한 물로 샤워도 하고 텐트에서 쉬다가 저녁을 먹으러 가려고 나왔는데 관리실 앞에서 한국인 부부를 만났다. 50대 정도로 보이는 중년 부부였는데, 텐트를 메고 W트레킹 중이라고 했다. 그들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는 중이었는데, 오늘 늦게야 여기에 도착했다고 했다. 거의 6시가 다 된 시간인데 미리 예약하지 않아서 여기서 텐트를 칠 수 없다고 다른 곳으로 출발하라는 말을 듣고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던 참이었다. 나는 한국인이라서 반갑기도 했고, 뭐라도 도움이 되고자 다시 관리실에 가서 사정을 해보기도 했다. 그래도 안돼서 내 텐트라도 같이 쓰자고 제안했고, 아저씨는 자기는 밖에서 자도 되니 부인만이라도 같이 신세를 좀 지겠다고 했다. 그래서 내 텐트로 안내해서 내부도 보여주고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며 대책을 세우고 있으려니 관리인이 우리를 불렀다. 7시가 넘으면 더 오는 사람이 없으니 저쪽 구석에 텐트를 치라고 했다. 단, 7시까지는 칠 수 없다고, 약간 굳은 얼굴로 무심하게 말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두 분은 몇 번이나 관리인에게 인사를 하고 텐트 칠 구석 자리에 짐을 놓고 저녁을 준비하러 가셨다. 캠핑존에서 요리할 수 있는 주방처럼 된 구역이 따로 있어서 요리하기도 편리해 보였다. 두 분은 부대찌개 라면을 끓이실 거라며 같이 먹자고 몇 번이나 내 손을 끌었으나, 그게 얼마나 귀한 음식인지를 알기에 선뜻 같이 먹을 수가 없었다. 서로 도와가며 저녁을 준비하는 두 분의 모습이 인생의 동반자이자 여행의 동행 같아 보기에 너무 좋았다. 그들처럼 인생이든 여행이든 함께 걸어간다는 것이 어떤 느낌이고 기분인지 감히 짐작 조차 할 수 없다. 


나는 한사코 그들의 호의를 거절하고 식당으로 가서 오랜만에 식사다운 식사를 했다. 비록 파스타였지만 만족스러운 맛이었다. 식당에서 마주 앉은 여행객들과 수다를 좀 떨다보니 낮의 울적했던 기분이 말끔히 사라지고 진정한 여행자가 된 듯한, 아주 고조된 기분으로 텐트로 돌아왔다. 


그러나 캠핑장에서는 어두워지고 나서는 더 이상 할 것이 없었다. 저녁부터 날씨가 흐려져서 별도 보이지 않는 아주 새까만 밤하늘을 텐트에서 고개만 내밀고 바라보다 코가 시려져서 얼른 들어오고 말았다. 렌튼 불빛에 의지해 일기를 쓰고 불을 끄고 누웠다. 세상이 칠흑 같은 어둠과 정적 같은 고요 속에 묻혔다. 까만 어둠 속에서 내일 걸어야 할 길과 시간을 계산하며, 내일 만날 풍경과 길에 대한 상상을 하며 잠을 청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동행이 생긴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이라며 나름 기도도 해 보았다.


 내일이 가장 긴 트레킹이 될 것이다. 그래도 지치지 않고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도 큰 소리로 인사해야겠다. 근사한 미소와 함께 Ho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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