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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나 Aug 03. 2021

할 일없이 서성이는 것도 여행이다

외로운 바람의 땅 파타고니아, #12 Puerto Montt

W 트레킹을 끝내고 나면 녹초가 되어서 쓰러질 줄 알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쌩쌩했고 몸도 마음도 가벼웠다. 며칠 전에 다음 도시로 떠나는 일정을 하루 늦출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토레스 델 파이네에서 돌아오는 날 바로 떠나기로 미리 표를 사 두었다. 그래서 푸에르토 나탈레스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맡겨둔 호스텔에 가서 배낭을 찾아 메고 바로 또 버스터미널로 왔다. 


한 시간 정도 기다려야 해서 불편한 의자에서 배낭에 기대어 쉬고 있었다. 무슨 이유로 며칠 전과 상황이 좀 달려졌는지 표를 구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표를 사려고 모여든 사람들도 많았고 각 버스회사 부스마다 줄이 길었다. 그중에서 한국인으로 보이는(한국의 아웃도어 브랜드를 입고 있는) 네댓 명의 중년의 남자들도 분주하게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뭔가 곤란한 모양으로 언성을 높였다가, 모였다가, 흩어졌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남미 여행 중에 한국인을 만나는 건 흔한 일이 아니라서 보통은 인사를 하는데, 그때는 귀찮기도 하고 왠지 산사람 같은 외모의 그분들에게 굳이 아는 체를 하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들 가둔데 두 명이 내 앞을 지나가며 표가 이렇게 비싸다느니 며칠을 더 있어야 하느니 하고 중얼거렸다. 얼마 후 그들은 다시 모여서 뭐라 뭐라 심각하게 이야기하더니 길게 한숨을 쉬고 체념한 듯 축 처진 어깨에 엄청난 크기의 배낭들을 들쳐 메고 정류장을 나가려고 했다. 출입구 반대쪽으로, 문이 있을지 의심스러운 구석 쪽으로 가는 그들의 힘없는 뒷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난 절대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 아니다. 약간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있어서 남의 일에 개입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랬던 성향이 해외 생활과 배낭여행을 하면서 오지랖이란 것을 배워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내 속에서 오지랖이 꾸물꾸물 올라오는 데는 몇 초가 안 걸렸다. 나는 바로 그들을 쫓아가서 뒷문으로 보이는 출구로 막 빠져나가는 마지막 아저씨를 불렀다. 


한국인을 만나서 반갑다며 인사하고 무슨 문제가 있으시냐고 물었더니 반색하시며 동료들을 불러 세웠다. 그들은 엘 칼라파테로 가려고 하는데 표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있다는 표는 사흘 후에 있는데 가격이 엘 칼라파테에서 올 때보다 두 배나 더 달라고 해서 표를 사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정확하게 잘 알아보지도 못하고 답답하기만 했단다. 그래서 포기하고 며칠이든 여기 푸에르토 나탈레스에서 기다려보기로 하고 숙소를 찾아서 가려던 참이었다고 했다. 그들은 O트레킹을 목표로 토레스 델 파이네에 입성했는데, 반 정도 올라가니까 길이 막혀서 더는 갈 수도 없었고, 어떻게든 넘어보려 했으나 관리인들이 제지를 해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다시 동쪽에서 서쪽으로 W만 두 번하고 내려왔다고 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들도 오늘 나와 같은 보트를 타고 토레스 델 파이네에서 나왔던 것이었다. 그들 중 한 분이 나를 Pehoe 산장 숙소에서 보았다고도 했다. 아침에 보았을 때도 일본인이라 생각했는데, 터미널에서 또 보고 일본인이라 확신했다고 했다. 그런데 반전이었다며... (사실 대부분은 나를 일본인으로 본다. 일본인들 마저도 일본어로 대뜸 말을 걸곤 했었다. 그리 기분 좋은 소리는 아니다.) 


그들에게 내가 스페인어를 좀 할 줄 아니까 다시 창구에 가서 버스표를 좀 알아봐 드릴까라고 물어보고 그들 중에 총무 역할을 하시는 분과 몇 개의 버스회사 창구를 돌았다. 그중에서 내일 출발하는 버스를 찾게 되었고, 다행히 가격도 올 때와 크게 차이가 안 난다는 버스표를 구할 수 있었다. 나도 내가 올 때 탔던 버스와 가격을 비교해 보았는데 오히려 더 쌌다. 이런저런 이야기 하면서 버스표 결재하는 것까지 도와드리고 나니 나의 버스 시간도 다 되었다. 그분들은 덕분에 표를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며 고맙다고 몇 번이나 인사를 했다. 그들은 엘 칼라파테 트레킹을 했지만, 남은 시간을 다시 엘 칼라파테로 가서 못다 한 등산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했다. 그분들 중에 한 분이 지리산 자락 어디에서 아웃도어 매장을 하고 있으니 한국에 오면 놀러 오라고 그때 신세를 갚겠다며 유쾌하게 말씀하셨다. 그들은 젊었을 때부터 함께 산에 오른 산악회 회원으로 이제 정년을 앞두고 몇 년 동안 준비했던 큰 목표인 토레스 델 파이네 O트레킹을 실행하러 왔다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 보니 그들이 좀 달리 보이고 좀 멋져 보였다. 산사람 같은 외모들도 이해가 되었고, 그 나이에 친구들과 떠날 수 있었던 용기와 우정에 박수를 보내며 그들과 헤어졌다. 




나의 다음 목적지는 아르헨티나 바릴로체지만, 푸에르토 나탈레스에서 바릴로체를 가기 위해서는 몇 개의 도시를 거쳐야 했다. 칠레는 모두 알다시피 길쭉한 나라여서 버스로만 이동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고 어렵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먼저 푼타 아레나스로 가서 비행기를 타고 푸에르토 몬트로 이동할 것이다. 그곳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아르헨티나 국경을 넘어 바릴로체로 가는 여정이다. 보통 이런 루트로 간다고 해서 나도 덜 모험적인 이 길을 택했다. 


푸에르토 나탈레스에서 푼타 아레나스까지는 버스로 3시간 정도 걸렸다. 사실 푼타 아레나스는 비행기 탈 일이 없었다면 들르지 않았을 곳이어서 별다른 정보를 찾아보지 않았다. 숙소에서 잠만 자고 아침에 바로 비행기를 탈 예정이었는데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 버스터미널에서 내려 걸어서 숙소까지 이동하고 약간의 휴식을 취했음에도 밖은 아직 어둡지 않았다. 그래서 숙소에서 가까운 방파제가 있는 바닷가로 나갔다. 날씨 탓인지 분위기가 을씨년스러웠다. 낡은 선착장과 뼈대만 남은 선착장에 앉은 펭귄을 닮은 새들마저도 지쳐 보였다. 구석구석 공장의 잔해들이 남아 있어서 왠지 한물간 공업도시 같다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짠내와 기름 냄새가 뒤섞인 시멘트로 포장된 바닷가를 할 일없이 서성이다 보니 나도 쓸쓸해졌다. 



쓸쓸해진 기분에 맥주라도 한 잔 해야겠다 싶어 저녁을 먹을만한 식당을 찾으러 목적을 갖고 걸었다. 숙소 근처에 작은 로컬 식당들이 드문드문 있었다. 해산물 파스타며, 피자며, 중국요리점도 있었으나 선 듯 들어가기가 어려워, 본 곳 중에 가장 좋아 보이는 폅을 겸한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직원이 추천한 해산물 모둠 요리 같은 것을 시켜 맥주도 좀 마셨다. 그다지 맛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워낙 해산물을 좋아하니 무난하게 잘 먹었던 것 같다. 어느새 어두워진 거리가 좀 무서웠기에 뛰다 걷다를 반복하며 무사히 숙소로 돌아갔다. 남미의 어느 도시든지 밤이면 거리가 무섭다. 게다가 사람을 마주치면 더 무서워지는 곳이 남미의 밤거리이다. 


푼타 아레나스는 거의 대부분의 여행객들이 푸에르토 나탈레스를 오가기 위해 들르는 곳이다. 그래서 공항에서 바로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다. 물론 푸에르토 나탈레스에서 온다면 공항에서 내릴 수도 있다. 나처럼 1박 조차도 하지 않고 곧바로 이동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일부러 펭귄 투어를 하러 오기도 하는 곳이다. 물론 우수아이아가 최남단이라 대부분 그쪽으로 가서 펭귄 투어를 하지만 푼타 아레나스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호스텔에서 알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여기 와서 알게 된 것은 이곳에 유명한 한국 라면집이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사전 정보가 없어서 가 보지는 못했지만 자기 전에 호스텔의 직원과 같은 방 여행객에게서 들었다. 미리 알았더라면 들렀을 텐데 좀 아쉬웠다. 


다음날, 호스텔 주인이 불러준 콜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갔다. 주인은 알아듣지도 못하게 영어와 스페인어를 섞어가며 택시를 타야 한다고 아주아주 강력하게 권했다. 버스가 있긴 하지만 현지인들도 공항 갈 때는 대부분 콜택시를 이용한다고 하니 이유가 있겠지 싶어서 굳이 모험하지 않으려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푼타 아레나스 공항은 아담하고 작았다. 역시 작고 아담한 경비행기 같은 저가항공사의 비행기를 타고 푸에르트 몬트로 향했다. 약간의 아쉬움과 시원섭섭함이 남는 푼타 아레나스에서의 짧은 하룻밤이었다. 




푸에르토 몬트 역시 나에게는 바릴로체로 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들른 도시에 불과했다. 그래도 바로 이동만 하는 것은 아쉬울 것 같아서 여기서도 딱히 볼 것은 없지만 1박만 하기로 했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미리 예약해둔 숙소로 갔는데 택시 기사가 헤매는 바람에 숙소 주변을 돌고 돌다 결국엔 내려서 걸어 다니며 겨우 찾았다. 내가 예약한 곳은 분명 호스텔이었는데, 가정집의 2층 만을 호스텔로 쓰는 민박집 같은 곳이었다. 그래도 칠레 가정집에서 묵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좋았다. 주인아주머니와 그의 아들과 딸도 아주 친절했다. 딸은 통역을 담당하고 아들은 벨보이 일을 담당하고 있는 듯했다.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는 길에 버려진 개들을 위해 때가 되면 먹이를 문 앞에 내놓기도 했다. 덕분에 그 집 주위에는 그 집 개 두 마리를 비롯해 항상 개들이 북적였다. 그 집에 딸린 작은 정원에서 길에 서성이는 개들을 보는 것도 소소한 재미였다. 


숙소 주변의 동네가 아담하고 깨끗해서 산책하기에 좋았다. 작은 정원이 딸린 나무로 지은 뾰족 지붕의 집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붙어있어서 정다웠다. 사실 며칠 아무 생각 없이 머물기에 딱 좋은 마을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일 떠날 것이기에 버스표를 예약하러 버스터미널로 갔다. 이곳이 약간 불편한 건 대중교통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숙소에서 몇 블록 떨어진 큰길에서 콜렉티보(작은 마을버스)를 탈 수 있다고 해서 기다렸는데 좀처럼 오지 않아서 택시를 탔다. 그런데 택시가 합승이 가능했다. 내가 처음 세운 택시에는 이미 한 명이 타고 있었는데 버스터미널에 간다고 하니 타라고 했다. 무서워서 타지 않고 다음에 온 빈 택시를 세웠다. 그런데 그 택시도 가다가 손을 드는 사람을 태웠다. 나에게 양해를 구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또 태웠다. 아마도 택시 합승이 당연한 일인 듯했다. 합법인지 불법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7~80년대에도 그랬던 것처럼. 어떻게 보면 경제적이고 재미있는 일이지만 사실 속으로는 도착하기 전까지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모른다. 혹시나 이들이 모두 한 통속이고 나를 어떻게 하려고 이러나 싶어서 겁이나 쫄보처럼 졸아 있었다. 다행히도 무사히 버스터미널 앞에서 내릴 수 있었지만 또다시 타기는 싫었다. 


버스터미널에서 바릴로체로 가는 버스의 표는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정보와는 달리 내일 바릴로체로 바로 가는 버스표가 없다고 했다. 몇 군데의 버스회사 창구를 돌아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내일모레 출발하는 직행은 있다고 하지만 하루 더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기된 얼굴로 버스 회사 직원에게 다른 방법이 없냐고 물으니 오소르노(Osorno)라는 도시로 가서 거기서 바릴로체 가는 버스를 타라는 거였다. 만약 오소르노에 갔는데 버스가 없으면 어쩌냐며 발끈했더니 여기에서 표를 미리 예약할 수 있다고 했다. 환승하는데 한 시간 반의 틈이 있었지만 나는 직원의 말을 믿고 그렇게 하기로 하고 버스표를 샀다. 


버스표를 해결하고 나니 이제 할 일이 없었다. 터미널 앞에 있는 해변을 좀 걷다가 문득 생각난 시장에 가보기로 했다. 앙헬모 시장은 터미널과 가까웠다. 점심시간이 지난 시간이라 조금 한산해 보였는데, 다행히도 시에스타(Siesta, 낮잠시간)가 없었고 식당이며 길에서 상인들이 호객행위로 분주했다. 항구 도시라 그런지 해산물이 넘쳐났다. 여러 가지 세비체도 작은 일회용 컵에 담아 팔고 있었다. 나는 2층 식당가로 올라가 전망 좋은 자리에 앉아 맥주와 세비체를 시켰다. 그리고 직원에게 요리를 추천받아 '쿠란토'라는 음식을 시켰다. 그런데! 나온 요리는 정말 입을 쩍 벌리게 만들었다. 커다란 홍합에 둘러싸인 닭다리와 고기, 소시지들이 큰 양푼이 같은 그릇 한가득 들어있었다. 다 못 먹더라도 절대 포장해 갈 수 없을 것 같은 비주얼의 음식을 나는 꾸역꾸역 거의 한 시간 넘게 먹어 치웠다. 결국 다 먹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먹어서 식사비가 아깝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코 싼 것은 아니었다. 저녁까지 때운 셈 치고 기분 좋게 일어났다. 


푸에르토 몬트에는 해안 산책로가 잘 되어 있었다. 시장에서 나와서 바다 쪽으로 향해 걸었더니 길이 쭉 이어졌다. 현지인들에게도 명소인 듯한 곳이었다. 나들이 나온 가족들이며 연인들이 드문드문 앉아 놀고 있었다. 해안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니 숙소와 가까워졌다. 배도 부르니 숙소까지 걸어갈 요량으로 사람 구경, 풍경 구경하면서 천천히 걸었다. 덥지 않은 날씨와 현지인들의 들뜬 분위기, 비릿한 바다 냄새를 즐길 수 있었다.  



이동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것 없었던  텅 빈 하루였지만, 어쨌든 뭔가를 했고, 느슨했지만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냈다. 푼타 아레나스와 푸에르토 몬트는 분위기가 비슷했다. 비행기를 타고 이동했다는 사실을 빼면 같은 도시라고 느낄 수 있을 만큼 비슷했다. 단지 날씨 덕분에 어제는 좀 쓸쓸했고 오늘은 좀 경쾌하다는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자유로운 배낭여행을 하면서도 여행지에서 꼭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정해놓은 것 없이 목적이 없는 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서성이는 것도 좋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엔 뭐가 있나 싶어 같이 들여다 보고, 한적한 곳에서 연인들 주위를 걸어 다니는 것도, 좀 좋아 보이는 가게 앞을 서성이는 것도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이고 어찌 보면 여행이다. 기대한 것이 없으니 조금만 좋아도 만족도가 확 올라간다. 그런 의미에서 어제오늘, 이동뿐이었지만 참 좋은 여행을 한 것 같다. 


Muchas graci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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