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바람의 땅 파타고니아, #13 Bariloche _아르헨티나
바릴로체로 가는 길은 멀고도 힘들었다. 나는 두 번의 버스를 갈아타야 해서 더 그렇게 느껴졌고, 직행 버스라 해도 국경을 건너야 해서 8시간 이상 걸린다고 했다. 나는 물론 더 오래 걸렸다. 아침 일찍 푸에르토 몬트에서 출발한 버스는 점심때쯤에 오소르노에 도착했다. 터미널 근처에 시장 같은 곳이 있어서 구경하고 점심도 먹고 놀다가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국경을 통과해서 겨우 바릴로체에 도착하니 저녁 6시가 다 되어갔다. 그나마 다행히도 해가 길어서 6시라도 오후 같았고, 곧바로 숙소에 짐을 던져놓고 호수가를 향해 걸었다.
바릴로체는 남미의 스위스라고 할 만큼 풍경이 아름답다. 그래서 남미 사람들도 신혼여행으로 많이 가는 휴양도시라고 했다. 신혼여행지로 유영하다길래 건너뛰려다가 파라과이에 사는 교포 친구가 여길 그냥 지나치면 나중에 엄청 후회할 것이라며 강추했다. 그래서 나도 관광이나 좀 하면서 쉬었다가는 셈 치고 들르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아무리 뜀박질을 일삼는 배낭여행객이라도 럭셔리한 관광지에서 하루 이틀 정도는 여유롭게 보낼 수 있는 사치를 좀 부려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친구가 덧붙인 말은, 초콜릿이 아주 유명하다며 꼭 초콜라떼(Chocolate, 핫초코)를 마시고 오라고 했다. 사실 난 초콜릿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이 초콜릿을 좋아하니 이왕 온 김에 선물로 초콜릿을 사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이곳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다 같은 호수였다. 호수를 마주하고 있는 집들은 해양 도시를 방불케 할 만큼 시원하고 멋스러웠다. 호숫가에 있는 사람들은 흡사 해변을 즐기는 듯했다. 또한 호숫가에 공원이며 산책로가 아주 잘 정돈되어 있어서 산책하기 참 좋았다. 공원을 지나 호숫가와 가까운 센트로시비고 광장을 지나 메인 관광거리인 미트레 거리로 들어서니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역시 관광지라서 여행객보다는 관광객이 더 많아 보였다. 드문드문 투어를 다니는 팀들도 보이고 관광객들 사이에서 일상을 즐기는 현지인들도 보였다. 생각보다 호화로운 동네였다.
친구가 말한 그 유명하다는 초콜릿 가게를 찾아 두리번거리며 거리를 걸었다. 버스킹 하는 가수나 곡예를 넘는 공연팀들을 거리 곳곳의 모퉁이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두 군데의 큰 초콜릿 가게를 발견했는데 사람들이 엄청 북적였다. 그 외에도 크고 작은 초콜릿 가게들이 즐비했다. 나는 그중에서 좀 한적한 가게의 카페로 가서 먼저 초콜라떼를 시켰다. (초콜릿 가게는 대부분 판매하는 곳 한쪽에 카페가 같이 있었다.) 웨이터가 가져온 초콜라떼는 내가 흔히 알고있던 핫초코와는 달리 아주 진하고 끈적해 보였다. 마치 초콜릿 원액처럼 걸쭉하고 짙은 색깔이었다. 그런 비주얼과는 달리 맛은 그리 달지 않았다. 한 번 입에 대니 끊을 수가 없는 맛처럼 계속 마시게 됐다. 약간 뜨거웠지만 거의 단숨에 마시듯 다 마셔버렸다. 저녁이어서 약간 쌀쌀해진 날씨에 딱 좋은 음료였다. 내가 지금까지 마신 초콜라떼 가운데 과연 최고였다. 아니 그전에 마신 것은 모두 가짜였다. 나는 다음날도, 그 다음다음날도 떠나기 직전까지 중독된 듯 매일 한두 잔씩은 마셨다.
초콜라떼를 마시고 쇼핑을 좀 하다가 내일 할만한 투어를 신청하려 했는데 어둑해진 바람에 바로 숙소로 돌아왔다. 호스텔에도 투어 상품을 팔기 때문에 호스텔에서 신청하면 내일 호수 투어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만약 투어를 못하게되면 그냥 하루종일 빈둥거리며 시내나 돌아다니면서 놀아도 좋을것 같았다. 호스텔 로비에서 투어 상품을 보고 있는데, 어떤 남자 여행객이 아주 많은 정보를 주었다. 버스 투어도 많지만 굳이 비싸게 패키지 투어 하지 않아도 된다며, 자전거로 7개 호수로 둘러싸인 호수길을 둘러볼 수 있다며 아주 솔깃한 제안을 해 주었다. 나는 그 남자의 말을 호스텔 직원에게 확인하고 좀 더 정확한 정보를 얻어서 내일 자전거 하이킹을 하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호스텔에서 제공하는 아침식사는 아주 훌륭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즉석에서 요리해주는 달걀 스크램블이 있어서 아주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식사도 괜찮았지만 이곳의 직원들은 참 친절했다. 어제 투어를 물어본 직원은 자전거를 빌리는 곳까지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데 버스 카드가 있냐며 걱정해 주었다. 없다고 하니까 호스텔에 있는 여분의 카드를 빌려주었다. 빈 버스카드였지만 충전해서 쓰고 반납하라고 했다. 이렇게 기대하지 않거나 예상하지 못한 친절을 받게 되면 그날은 더 기분이 좋고 여행은 더없이 즐거워진다.
호스텔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Campanario 전망대에서 내렸다. 이 언덕 꼭대기의 전망대에 올라가면 바릴로체를 둘러싸고 있는 호수들을 모두 볼 수 있다고 했다. 꼭대기까지 가는 케이블카가 입구에 있었지만 나의 고생을 사서 하는 습성은 케이블카를 지나쳐 등산로를 찾아 올라가게 만들었다. 바릴로체에서는 이 도시의 특성에 맞게 정말 휴양만 하고 편하게 쉬다가 가려고 했는데, 하루 만에 다시 몸을 고되게 만들며 여행하는 습성을 되찾고 말았다. 패키지 투어는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 내게 몸을 혹사시키지 않는 여행은 어림없지!
캄파나리오 전망대까지는 그렇게 힘들지 않게 올라갈 수 있었다. 중간에 약간 경사가 심해서 힘든 부분도 있었으나 30분 정도도 안 걸렸다. 꼭대기에는 전망대를 잘 꾸며 놓았다. 카페도 있고 여러 군데의 포토존도 있어서 사진도 찍고 좀 쉬다가 내려왔다. 전망대에서 내려와서 도로를 조금 걸어가니 자전거 대여점이 나왔다. 직원들은 친절했고 뭔가 프로페셔널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들은 자세하게 안전교육을 시켰고, 지도를 제공하며 들르면 좋을 뷰포인트를 표시해 주었다. 그리고 꼭 6시 전까지 돌아와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그렇지 않으면 벌금을 물게 될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들의 염려를 뒤로하고 힘차게 페달을 밟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출발했다. 태양빛이 가장 뜨거운 정오가 가까워지고 있는 시간이었다.
내가 정한 첫 번째 방문지는 스위스 마을이었다. 호수 도로인 Circuito Chico에서 벗어나 안쪽으로 한참을 들어가야 하지만 예쁜 소품을 많이 파는 마켓이 열리는 곳이라고 해서 가고 싶었다. 도로에서 스위스마을 표지판을 따라 들어갔더니 비포장 도로가 나왔다. 자전거로 가기에는 너무 힘든 곳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외에는 자전거를 탄 사람이 안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 길인데 차라도 한대 지나가면 황토색 먼지가 일어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꾸역꾸역 페달을 밟아 들어가니 계곡이 나오고, 농장 같은 집들을 지나 마켓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에서 바로 들어올 수 있었다.
작은 오두막으로 만든 가게들이며 부스들이 아기자기한 공예품들을 팔고 있었다. 깨끗하고 정갈한 곳이었다. 나무 받침대나 도마를 만들어서 이름을 새겨주는 곳이 있어서 작은 나무도마 두 개를 샀다. 아저씨는 돋보기로 태양열을 가해서 나무에 이름을 새겨 주었다. 신기한 구경들을 마치고 마침 점심시간이 다 되었기에 소시지와 맥주로 점심을 해결했다. 맥주는 나중에 파타고니아 수제 맥주집에서 마시려고 했는데 갈증도 나고 해서 서 우선 마셨는데 결과적으론 잘한 거였다. 결국 파타고니아 맥주집을 찾지 못했고 비슷한 집을 찾긴 했는데 맞는지도 모르겠고 문이 잠겨 있었다.
스위스 마을에서 나와서 다시 시르쿠이토치코(Circuito Chico) 도로를 돌았다. 두어 군데의 전망대를 지나고 산책로 입구에서 피톤치드를 흡입하며 쉬기도 하면서 나름 즐거운 하이킹을 이어갔다. 그러나 세 시간 정도 자전거를 타고 다니니 다리도 아프고 아무리 쉬엄쉬엄 간다 해도 힘들었다. 더군다나 6시 전까지 한 바퀴를 다 돌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번갈아가며 나왔고 짙은 숲의 나무 사이로 잘 닦아놓은 내리막길 도로를 바람을 가르며 내려갈 때는 기분이 최고였다. 게다가 오가는 차가 한 대도 없는 상태에서 혼자 도로를 점령해서 달리는 기분은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상쾌하고 신났다.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샤오샤오 언덕의 호텔까지 올라가니 종착지까지 거의 다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샤오샤오 호텔은 최고급 호텔인 모양이었다. 들어가기에는 두려운 호텔이라 밖에서 호텔 주위의 풍광만 구경하다가 내려왔다. 이후로는 차가 많아서 자전거 타기에 조금 힘들기도 했지만, 샛길로 빠져서 어쩌다 발견한 동화 속에서나 있을 법한 길 덕분에 잠깐씩 쉬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샤오샤오 호텔 이후의 마지막 구간이 제일 힘들었다.
시르쿠 이토 치코(Circuito Chico)를 한 바퀴 다 돈 지점인 자전거 대여점에 도착한 시간은 6시 15분 전이었다. 다행히도 6시를 넘기지 않았고, 무사히 자전거를 반납하며 직원에게 칭찬도 받았다. 그는 무사히 시간 안에 돌아와서 축하한다고 했다. 정말 지나고 보니 축하받을만한 일이었다. 사실 위험하기도 하고 힘든 일이었다. 6시간 넘게 자전거를 타고 여행한다는 것은 등산이나 트레킹만큼 힘들었다. 마지막 구간에서는 사실 자전거를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기에 타다 끌다를 반복하며 그래도 마지막까지 완주한 나 자신이 좀 대견스러웠다.
중심지인 미트레거리에 가자마자 초콜릿 가게에 가서 초콜라떼부터 한 잔 했다. 그리고 여유롭게 초콜릿 쇼핑을 하고 마지막으로 광장과 해변같은 호숫가를 걸었다. 호숫가에 앉아서 붉은 노을이 세상을 붉게 물들이는 마법과 같은 시간을 경험했다.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인 노을 속에 내 마음도 물들이며 바릴로체에 온 것에 대해 진심으로 기뻐했다. 노을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다가 문득 외로움과 허기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하루 종일 자전거를 끌고 다니느라 고생한 나에게 근사한 저녁을 사주고 싶어서 식당을 찾아다녔는데, 너무 호화롭거나 좋아 보이는 곳들엔 선뜻 들어갈 수가 없었다. 모두 환하고 반짝이는 조명 아래서 누군가와 웃으며 즐거운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왠지 나는 그곳에 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들어가기가 꺼려졌다. 그래서 포기하고 작은 로컬 식당을 찾다가 마트를 발견했다. 마트에서 와인과 저녁으로 먹을 만한 것들을 사서 호스텔의 발코니에서 야경을 보며 혼자만의 만찬을 즐겼다. 나름 근사한 저녁이었다. 바릴로체에서의 시간이 이렇게 저물어가는게 아쉬울 정도로 혼자였지만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째 잠깐의 동행도 없이 내내 혼자였지만 조금 덜 외로웠는데 이제 외로움도 이 여행의 한 부분이 된 듯했다.
바릴로체는 남미의 보석과도 같은 곳이었다. 유독 휘황찬란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것들이 많았다. 유럽의 어느 도시에 온 듯한 착각이 들만큼 유럽풍으로 꾸며놓은 곳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곳에서 가장 잊지 못할 풍경은 해변과 같은 호숫가에서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과 세상을 붉은빛으로 물들인 노을이었다. 자연의 경이로움은 사람과 어우러질 때 더 빛을 발한다. 그러나 인위적인 것과는 애초에 대적이 안된다. 그리고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맛, 걸쭉하고 진한 초콜라떼! 다른 그 어떤 곳에서도 맛볼 수 없는 맛이었다. 이곳도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오고 싶은 곳 중에 하나가 되었다. 다시 오게된다면 그땐 꼭 아주 호화로운 관광을 하고 말 것이다.
Que rico chocol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