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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나 Aug 15. 2021

나는 화산과는 인연이없나 보다

외로운 바람의 땅 파타고니아, #14 Pucon _다시 칠레

바릴로체에서 푸콘으로 가는 버스는 아침 10시에 있었다. 물론 바릴로체에 도착하던 날 터미널에서 바로 버스표를 구입했었다. (남미 배낭여행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 목적지의 버스표를 도착과 함께 바로 구매해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호숫가를 한번 더 산책하고 문이 열린 카페에 가서 초콜라떼를 한잔하고 여유롭게 터미널까지 걸어갔다. 터미널로 가면서도 아쉬운 구석이 많아 하루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이 나를 흔들었지만, 어디든 떠날 때는 아쉬운 법이라며 모질게 발걸음을 옮겼다. 


버스의 출발 시간은 여느 남미 버스와 마찬가지로 지연되었다. 이제 남미 시간은 이삼십 분 늦어져도 별로 신경 쓰이지 않고 그러려니 한다. 다행히 버스 안이 좀 쾌적해서 이러저러한 불편들은 참을 수 있었다. 그리고 푸콘으로 향하는 길에서의 풍경들은 또 다른 재미를 주었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긴 했지만 깨어있는 동안 본 풍경들은 눈을 번쩍 뜨이게 해 주었다. 


버스는 가끔씩 정차를 했는데 아마 짐 검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국경 가까이에서는 경찰들이 버스에 올라 둘러보기도 했다. 국경을 통과하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칠레 입국은 항상 짐 검사가 까다로웠다. 나는 예전에 국경에서 아보카도 때문에 곤란했던 경험이 있어서 칠레 입국할 때는 그 어떤 음식물도 가져가지 않는다. 사실 초콜릿이 좀 걱정되긴 했는데 포장된 가공식품은 괜찮다고 했다. 짐 검사를 하면서 나란히 서있던 아르헨티나 사람과 이야기를 했는데 내가 알지 못한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칠레에는 나무도 반입이 안된다고 했다. 그럼 내가 산 도마는 어떡하지? 몹시 걱정이 되었지만 무사히 넘어갔다. 아마 공예품이라 괜찮았던 것 같다. 


그렇게  한참만에 국경을 통과하고 오소르노와 또 다른 도시를 들르고 하면서 시간이 점점 지체되었다. 급기야는 버스가 정차하더니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움직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다들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마냥 기다리기만 하다가 나중에 알고 보니 버스가 고장이 나서 수리 중이라고 했다. 남미 여행을 나름 많이 다녔는데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다행히 곧 버스는 출발했다. 푸콘까지 가는 길은 멀고 멀었다. 창밖은 어두워졌고 나는 점점 불안해졌다. 내가 예약한 호스텔은 밤 11시 이후에는 문을 닫으니 필히 그전에 체크인을 해야 한다고 주의사항에 표시되어 있었다. 시계는 밤 10시가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푸콘은 멀었다고 했다. 나는 버스 기사에게 몇 시에 도착하냐고, 11시 전에 도착할 수 있냐고 몇 번이나 물었지만 그는 알 수 없다고만 답했다. 이럴 땐 정말 답답했다. 이들은 뭐든 정확하게 답하는 게 없다.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보고 건너편에 앉은 친절한 아주머니가 사정을 물었다. 내가 여차 저차 한 호스텔 사정을 이야기하니까 버스기사에게 가서 뭐라 뭐라 말하더니 전화기를 받아왔다. 나보고 호스텔에 전화를 하라고 했다. 나는 호스텔 예약 바우처를 꺼내서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아주머니에게 전화를 좀 해 달라고 부탁했다. 아주머니는 친절하게도 전화를 걸어 "여기에 한국 아가씨가 있는데, 버스가 늦어져서 아마 11시 이후에 도착할 것 같다. 너희가 좀 기다려 줄 수 있느냐"라고 말해주었다. 그쪽에서 내 이름을 확인하고 다행히 기다려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오라고 했다. 너무 고마운 마음에 아주머니에게 뭐라도 주고 싶었으나 마땅히 줄 만한 게 없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 작은 한국 기념품이라도 들고 다녀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고, 초콜릿이 생각났으나 짐칸의 배낭에 있어서 꺼낼 수 없었고, 고마운 마음과 송구한 마음이 뒤죽박죽 되어서 어쩔 줄 몰랐다. 


버스는 11시가 훌쩍 넘어서 푸콘에 도착했다. 배낭을 찾아 메고 그 친절한 아주머니를 찾으니 어느새 가고 없으셨다. 나는 바로 택시를 타고 호스텔로 향했다. 사실 버스터미널과 그렇게 멀지 않지만 밤이었기 때문에 걸어가는 것은 무리였다. 차로 5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호스텔에는 다행히도 불이 켜져 있었고 직원 한 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맙다고 몇 번이나 인사했더니 그 직원도 더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그러나 안내해준 방이 정말 뜨악할 만큼 작았다. 배낭도 들여놓지 못할 정도로 작은, 캡슐호텔을 연상시킬 만큼 숨 막히는 공간이었다. 사실 예약할 때 1인실인데 너무 싸다 싶은 생각이 있었다. 싼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좋은 것도 있었다. 방에 천창이 있었는데 누우면 바로 코 앞에서 하늘의 별들이 반짝였고 아침에는 누워서 창문을 열고 하늘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푸른 잔디밭이 있는 마당도 좋았다. 휴식하기에 정말 최적인 호스텔이었다. 방이 너무 좁은 건 아쉽지만, 나머지 시설들은 훌륭했다. 



다음날 아침 새소리에 잠에서 깨어나 기분 좋고 상쾌한 하루를 시작했다. 푸콘 중심 거리로 나가 내가 온 목적인 화산 투어를 신청하러 다녔다. 여행사 세 곳을 찾아다녔는데 같은 말을 했다. 아니, 처음엔 이들의 장황한 설명을 나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남미 사람들은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뭔가 장황하게 에둘러서 말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장황한 말들을 요약하면 딱 한 줄로, '요즘 날씨를 예상할 수 없어서(혹은 안 좋아서) 화산 트레킹은 할 수 없다.'라는 것이었다. 지금 이렇게 날씨가 좋은데 날씨가 안 좋다니 이해가 안 되었다. 내가 화산 트레킹을 갈 수 있는 날은 내일밖에 없는데... 내일은 비야리카 화산 트레킹을 할 수 없다는 말을 재차 확인하고는 딱히 뭘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푸콘엔 다른 액티비티도 많지만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딱 하나! 비야리카 화산 트레킹 밖에 없었다. 



이제 이 시간들을 뭘 해야 할지 몰라 무작정 거리를 걸어 다녔다. 그러다 우연히 버스 터미널까지 가게 되었고, 어제 늦게 도착한 탓에 예매하지 못한 산티아고행 버스표를 예매했다. 마음은 푸콘에 며칠 더 머무르면서 트레킹을 하고 돌아가고 싶었지만, 4일 후에 파라과이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예매해 놓았기 때문에 일정을 늦출 수도 없었다. (싼 비행기표를 사면 예약 일정 변경이 안 되는 단점이 있다.) 


하루 종일 푸콘의 거리나 쏘다녀야겠다는 생각으로 발길 가는 데로 걸었다. 푸콘은 그렇게 큰 도시가 아니라서 그렇게 무작정 걷다 보니 공원도 나오고 호수도 나왔다. 공원에는 휴일도 아닌데 엄청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공원 입구에 관광안내소가 있어서 지도 한 장을 받아 나왔다. 나는 휴대폰의 지도 앱도 잘 사용하긴 하지만 종이 지도를 좋아해서 여행지에 종이 지도가 있으면 받아서 챙겨둔다. 안내소 직원에게 '플라야 네그로'라는 곳을 추천받아서 내일은 그곳으로 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안내소 직원이 지도에 위치를 표시해 주고 버스로 가는 방법도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호수에서 보이는 비야리카 화산은 정말 환상 그 자체였다. 푸콘에서는 어디를 가든 비야리카 화산이 보였다. 그런데 비야리카 화산 외에도 두세 개의 화산이 푸콘에 있다고 하는데, 다른 산들은 시내에서 육안으로 보이진 않았다. 호수에는 유람선이 운행되고 있었다. 유람선이라도 탈까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흥에 겨운 사람들과 섞이고 싶지 않았다. 



호수 산책로를 벗어나 예쁜 집들을 구경하며 걷다 보니 또 공원이 나왔는데 아까와는 다른 곳이었다. 알고 보니 그곳은 해변 입구였다. 공원인 줄 알았으나 주차장이었고, 주차장을 가로질러 걸어가다 보니 해변이 보였다. 바다가 아니라 호수였지만 바닷가 해변을 방불케 했다. 드문드문 파라솔과 썬배드에서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이 보였고, 호수에서 수영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그런데 모래색이 우리나라 모래와 다른 검은색이었다. 자세히 말하면 회색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여기가 '플라야 네그로(검은 해변)'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푸콘의 모래색은 화산 폭발의 영향으로 모두 검은색에 가깝다. 호수 앞에는 리조트인지 호텔인지 모를, 하지만 좋아 보이는, 아주 호사스러운 숙박시설이 즐비했다. 


푸콘 시내에는 예쁜 카페나 레스토랑도 많았다. 푸콘 전통음식으로 점심을 먹고 혹시나 다른 소식이 있나 싶어 다시 여행사를 찾아갔다. 그러나 여전히 트레킹은 안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직원이 다시 한번 권하는 투어 상품을 고심하며 찬찬히 살펴보았다. 산 정상까지는 올라갈 수는 없는데 초입, 그러니까 산기슭까지 올라갈 수 있는 투어가 있었다. 처음엔 의미 없는 투어라 생각해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것마저도 하지 않으면 여기 푸콘까지 와서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갈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썩 내키지는 않지만 아쉬운 마음에 투어 신청을 했다. 


내일 할 일이 생겼으니 오늘 검은 해변에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으로 급 계획을 수정했다. 오후가 되었지만 해는 길었고 세네 시간 플라야 네그로에 가서 놀다가 오면 되겠다 싶어 버스를 탔다. 노곤한 오후 햇살에 버스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졸았다는 것에 화들짝 놀라서 깼다. 이런 정신 나간... 시내버스에서 졸다니! 정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말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시내버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항상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플라야 네그로는 오전에 본 해변보다 조금 더 큰 호수와 해변이 있었다. 물론 사람들은 더 많았다. 사람들은 큰 튜브를 들고 수영하러 호수로 갔다. 호수 해변에는 비치타월이나 담요를 깔고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 누워 자는 사람들, 카드놀이하는 사람들이 제각각 즐겁고 편하게 휴식하고 있었다. 나도 그들 옆에 앉아있기도 하고, 해변을 따라서 걸어가 보기도 했다. 날씨는 더웠고, 간간히 시원한 바람이 호수에서 불어왔다. 다행히도 우리나라 여름처럼 습하지 않아서 그늘에 앉아 있으면 곧 시원해졌다. 나무 그늘에 앉아 맥주와 세비체를 먹고 혼자 청승스럽게 호수만 물끄러미 보다가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와서 해질녘의 화산 풍경을 보았다. 내 방 앞의 테라스는 해질녘의 풍경을 보기엔 최고의 전망대였다. 한 폭의 수채화 같은 풍경이 서서히 색깔이 달라졌다. 환상적이면서도 고요한 화산 마을 풍경을 보면서 테라스에서 시원한 맥주를 마시는 시간이 정말 행복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고즈넉한 정경이 나를 감쌌다. 

 




다음날 아침 8시 전에 여행사 사무실 앞으로 갔다. 8시까지 오라고 했는데 시간 맞춰 간 사람은 나 혼자 밖에 없었다. 10분쯤 지나 한 둘 모였는데, 나를 포함해 모두 6명이었다. 투어 미니버스는 8시 반쯤 화산을 향해 출발했다. (사실 이때 내가 간 화산이 어딘지는 정확하게 모르겠다. 비야리카 화산인지, 아니면 푸콘에 있다는 또 다른 화산들 중에 하나인지, 그 이름도 잊어버렸고 어디에도 기록이 없다.) 버스는 한 시간 정도 달려 오프로드를 쿨렁쿨렁 지나가더니 안개가 자욱한 벌판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우리는 줄지어 벌판을 지나 약간 경사진 언덕길을 올랐는데 앞에는 온통 구름이 끼어서 화산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산인지 언덕인지 분간이 안 되었다. 가이드가 바닥을 보라며, 예전에 화산이 폭발했을 때 만들어진 돌들이라는 설명을 해 주었다. 구름에 모든 것이 가려서 산을 볼 수 없으니 바닥에 돌이라도 보라는 듯한 멋쩍은 설명이었다. 


우리는 줄을 지어 가이드가 이끄는 데로 걸어갔다. 나무는 하나도 없고 풀과 들꽃들이 드문드문 살아 숨 쉬는 산기슭이었다. 걷다 보니 경사진 곳도 나와서 아마 언덕을 몇 개는 넘은 것 같았다. 바위덩이만 지나가기도 했고, 화산재인지 화산재로 된 모래인지 발이 푹푹 빠지는 구간도 있었다. 거의 한 시간 넘게 그렇게 어렵지않은 트레킹 코스를 걸었다. 그래도 구름은 걷히지 않았고 마그마는커녕 화산의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아르헨티나 커플은 높은 수위를 넘나들며 사진 찍어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진 찍기 위한 포즈인지 애정행각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 둘을 뺀 나머지는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셋과 나, 그리고 젊은 남자 가이드였다. 그들은 별로 신경 안 쓰는 듯했지만 가끔 불쾌해하긴 마찬가지였다. 



아쉽기만 한 화산 투어를 끝내고 시내로 왔다. 점심을 먹고 카페에서 맥주나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신기한 것은 시내는 정말 날씨가 좋았다. 햇빛도 쨍쨍하고 비야리카 화산도 잘 보였다. 오전에 봤던 구름 가득한 산 아래의 장면은 어디 꿈이라도 꾼 것 같은 괴리감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목적을 갖고 온 곳에서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가려니 아쉬움이 아주 크게 느껴졌다. 그러나 이 또한 여행인 것을, 언제나 변수가 있고, 덕분에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고 보니 몇 해 전에도 과테말라 안티구아에서 화산 트레킹을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날씨가 엉망이었다. 출발할 때는 괜찮아서 일단 올라갔는데 등산 중반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주위엔 온통 희뿌연 구름뿐이었다. 그래도 그땐 최대한 올라갈 수 있는 데까지 가이드가 이끌고 가서 약간의 마그마를 보고 내려오긴 했었다. 비를 맞고 내려오면서 미끄러지고 넘어지면서 바지까지 다 찢어졌던 흑역사가 기억이 났다. 난 아무래도 화산과는 인연이 없는 것 같다. 만약 다음에 또 화산 트레킹의 기회가 생긴다면 두고 봐야겠다. 그땐 날씨가 어떨는지, 유황 가스를 마시며 마그마를 볼 수 있을지 다음을 기대해 봐야겠다. 아니다, 어쩜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고 올라가려 기 쓰지 말아야 할까... 살짝 고민이 된다. 




저녁 버스시간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고 해도 길어서 다시 호수로 갔다. 호숫가에 앉아 오가는 배들을 보고 있다가 호숫가 잔디밭에 핀 들꽃들 사진을 찍고 있었다. 푸콘에는 예쁜 들꽃들이 참 많았다. 아무 곳에서나 어디에나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하물며 화산재와 흘러내린 마그마로 만들어진 돌들 사이에서도 싱싱하게 피어있었다. 나이가 들어서일까... 꽃들이 예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한참 꽃에 빠져 사진을 찍고 있는데. "아이고 예뻐라~" 하고 누군가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머리가 새하얀 할머니였는데 한국분이셨다. 할머니는 다가오시면서 아주 정겨운 미소를 지으셨다. 일어나서 인사를 드렸더니 "아, 한국 사람이었네. 반가워요."라며 아주 반가워해주셨다. 나도 며칠 만에 한국어로 이야기할 상대를 찾아 참 반가웠다. 할머니와 풀밭에 나란히 앉아 호수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할머니는 60대 중반으로 보였다. 젊을 때부터 혼자 배낭여행을 해보는 것이 꿈이어서, 작년에 딸과 함께 중미 지역을 여행하고 용기를 얻어 이번에는 혼자 남미를 여행 중이라고 했다. 물론 딸은 극구 반대했지만 죽기 전에 혼자 배낭여행해보는 것이 소원이라면서 딸의 반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고 했다. 겨우 3개월 허락받고 여행을 다니고 있는데, 좋은 것도 많지만 역시 힘에 부치는 것은 사실이라고 하셨다. 할머니는 나보고 젊을 때 많이 다니라고 하시며 크게 웃으셨다. 내겐 그 웃음이 약간 쓸쓸하고 공허하게 들렸다. 


할머니도 내일 산티아고에 가신다고 하셔서 몇 가지 정보를 드리고, 푸콘에 대해서도 몇 가지 정보를 드렸다. 어제 푸콘에 와서 자고 숙소가 마음에 안 들어서 오늘 숙소를 바꿨는데 더 마음에 안 든다며 숙소에 들어가기가 싫으시다고 하셨다. 할머니와 공원으로 산책을 갔다. 그리고 아직 호수 해변을 못 보셨다길래 어제 본 그 놀라운 바닷가 해변 같은 호수 해변에도 모시고 갔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할머니와 걸으며, 또 호수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눴던 시간들이 참 좋았다. 성품이 차분하고 말투가 조용조용한 분이어서 이야기 나누는데 불편함이 없었다. 그리고 행여나 다른 이에게 해가 되지 않을까 무척 조심하시는 분이었다. 사실 난 보통은 나보다 나이 많은 어른들과 길게 이야기를 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호수에 내리치는 은은한 햇살을 보면서 나무 그늘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하던 그날 오후가 그림처럼 추억으로 남았다. 


저녁때가 다 되어서 나는 할머니께 작별 인사를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서 남은 (사다 놓고 미처 먹지 못한) 음식들로 저녁식사를 하고 산티아고로 향할 준비를 했다. 테라스에서 몇 번이나 마지막이라며 화산을 보고 사진을 찍고 또 찍고 하며 시간 가는 것이 아쉬웠다. 


파타고니아의 마지막 여행지인 푸콘은 내게 많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고즈넉한 저녁 풍경은 매일 봐도 좋을 것 같았고, 어디서나 보이는 눈 덮인 화산은 매일 다른 풍경을 봐야 했던 여행자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즐길만한 액티비티가 많은 동네였지만 굳이 액티비티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즐거운 동네였다. 


배낭을 정리해서 나오면서 체크아웃하고 로비에 잠시 있는 동안 주인 여자와 이야기를 했는데, 그 여자가 프랑스인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도착한 날부터 사흘 동안 오가며 인사를 나눴는데, 전혀 외국인일 거라는 생각을 못했다. 그녀는 몇 년 전에 친구와 남미 배낭여행을 다니다 이곳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친구와 호스텔을 열게 되었다고 했다. 정말 꿈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라며 나는 그녀가 부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며, 온갖 찬사를 보냈다. 사실 나도 내가 좋아하는 여행지에서 호스텔을 운영해보는 것이 꿈이다. 그러나 그 꿈은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 자신이 너무 잘 알고 있기에 그저 꿈으로만 간직하고 있었다. 


여행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 멋진 삶을 살고 있는 듯하다. 나도 어쩌면 그 할머니처럼 60이 넘은 나이에 내 꿈을 이루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인생은 생각보다 길고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도 작은 희망을 가져 보기로 했다. 


¡Vam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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