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콘에서 저녁 9시 45분 야간 버스를 타고 산티아고에 도착하니 아침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시내에 예약해둔 호스텔로 향했다. 역시 야간 버스는 힘들었다. 침대칸에서 잠자는 것 밖에 한 게 없음에도 피곤하고 온몸이 찌뿌둥했다. 차라리 좀 걸으니 몸이 풀리고 편해지는 느낌이었다.
지하철을 탈 때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지만(지하철 교통 카드를 사느라 좀 힘들었다.) 무사히 호스텔에 도착했다. 호스텔은 산티아고 중앙 광장인 아르마스 광장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내가 자주 이용하는 CLH(Che Lagasrto Hostel) 호스텔은 체인점인데 산티아고 지점의 호스텔 위치는 여러모로 편한 곳에 있었다. 호스텔 환경도 쾌적하고 직원들도 친절했다. 내가 이렇게 호스텔을 마음에 들어 한 것에는 또 다른 큰 이유가 있다.
지치고 남루한 모습으로 호스텔에 들어섰는데 직원은 따뜻하게 나를 맞아 주었다. 그리고 예약 확인을 하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가 너에게 줄 선물이 있어. 넌 여성 도미토리를 예약했지만 네가 원한다면 특실로 바꿔줄 수 있어."
난 처음엔 좀 얼떨떨했다. 그래서 '돈을 더 내야 하는 거냐'라고 물었고,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우리의 선물 같은 거야. 돈을 더 낼 필요는 없어"
난 놀라서 되물었다. 그리고 약간의 의심도 생겼다.
"정말 공짜야??? 왜?"라는 나의 질문에 직원은 이미 예약할 때 계산을 했기 때문에 추가적인 계산은 할 필요 없고, 부킹닷컴(호스텔을 예약한 사이트)의 프로모션과 같은 거라고 설명하면서 덧붙였다.
"넌 우리의 좋은 고객이야."
직원은 내가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보고 기분 좋게 웃었다. 그리고 나를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아직 11시도 안 된 시간이었지만 체크인이 가능했던 것은 방이 비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환호성을 지르며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안내해준 직원에게 연신 고맙다고 하면서 방을 둘러보았다. 작은 거실과 주방까지 딸린 이 특실은 단연코 내 배낭여행 역사에서 가장 크고 좋은 방인 것은 틀림없었다. 몸과 마음이 서서히 지쳐가던, 긴 여행의 말미에 커다란 선물을 받은 느낌이었다.
하루 종일 방에만 있어도 좋을 것 같았지만 샤워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내가 산티아고에 온 것은 이번이 세 번째이다. 하지만 매번 이틀 혹은 사흘 정도로 짧게 머물다 갔기 때문에 아직 가 보고 싶은 곳이 많았다. 지난번에 가고 싶었으나 못 가봤던 곳도 있지만 산티아고 중앙 시장 같은 곳은 또 가고 싶은 곳이다. 싱싱한 수산물도 많고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이 많아서였다. 점심도 먹고 구경도 할 겸 우선 시장으로 향했다. 시장은 한창 점심 장사로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나는 수산물 파는 곳으로 가서 싱싱한 생굴을 몇 개 사 먹었다. 초고추장이 없는 것이 정말 아쉬웠다. 그리고 혼자 앉아도 피해가 안 될만한 식당에서 칠레의 시인 네루다가 즐겨 먹었다는 해물탕을 먹었다. 생선 튀김도 먹고 싶었지만, 둘 다 먹기엔 너무 많아서 생선 튀김은 내일 먹기로 했다.
점심을 먹고도 시장을 떠나지 않고 둘러보다가 싱싱한 연어를 보게 되었다. 주인에게 회로 먹어도 되냐고 물었더니 더 싱싱한 것도 있다며 아이스박스에서 연어 한 마리를 꺼내더니 그 자리에서 손질해 주었다. 한 마리에서 거의 4분의 1 분량을 샀는데 아무래도 너무 많은 것 같았다. 그래도 연어회를 먹을 수 있다니 밤새도록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내가 해외 생활에서 가장 아쉬운 것은 한국처럼 활어회를 마음껏 먹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호스텔로 가서 연어를 냉장고에 고이 모셔놓고 나왔다. 도미토리였다면 꿈도 못 꿨을 텐데, 혼자 길을 걸으면서도 웃음이 나올 정도로 행복해졌다.
다시 아르마스 광장으로 나왔다. 아르마스 광장은 항상 지날 때마다 느끼지만 다른 남미 도시의 광장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항상 활기가 넘친다고 해야 하나... 뭔가 칠레만의 그런 느낌이 있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과 함께 걸으니 나도 이곳에서 사는 사람이 된 듯했고, 잠시 산티아고에서 산다면 얼떨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산티아고에 왔을 때마다 가려다 못 간 산크리스토발 언덕을 이번에는 꼭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가는 길에 산타루시아 언덕의 입구도 발견했다. 사실 지난번에 친구와 왔을 때 입구를 찾지 못해 다른 곳에서 헤맸었는데, 이렇게 우연히 나타나다니 실소가 나왔다. 산타루시아 언덕은 돌아오는 길에 보고 다시 길을 재촉해서 걸었다. 처음에는 버스를 타려고 했는데 걷다 보니 구글 앱 지도상으로 금방 가까워지는 것으로 보여서 계속 걸었다. 거리가 잘 정돈된 곳도 있었지만 지저분한 곳도 더러 있었다. 그래도 공원은 정말 잘 가꿔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크리스토발 언덕에 올라가는 푸니쿨라(케이블카와 비슷)를 타는 곳이 나왔다.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날은 푸니쿨라 운행이 안된다고 했다. 대신 버스를 타고 올라갈 수 있는데 줄이 엄청 길었다. 다행히도 줄은 금방금방 줄었고 버스를 타고 정상 가까운 주차장까지 올라갔다. 그 이후로는 걸어야 했는데, 땡볕이라 쉽지 않았다.
산크리스토발 언덕은 산티아고 도시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었다. 정상에는 전통 공예품 전시도 있었고 현대미술작품의 전시회도 있었다. 그리고 성당과 큰 마리아 상이 있었다. 대부분 거기까지 올라가 사진을 찍고 내려오는 정도로 산크리스토발 언덕에 다녀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약간 고생스러운 면도 있었으나, 산티아고에 왔다면 한 번쯤은 올라가 보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산크리스토발 언덕에서 내려오니 6시가 다 되었다. 3시쯤에 올라갔으니 산크리스토발 언덕 구경은 3시간이면 충분했다. 산타루시아 언덕을 향해 걷는데 아까와는 다른 거리가 나왔다. 우리나라 대학교 앞의 거리처럼 젊은 학생들이 많이 보였고 그라피티로 어지러운 술집과 식당들이 즐비했다. 그 길을 빠져나오니 깨끗하고 세련된 펍들이 많이 보였다. 맥주 한잔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산타루시아 언덕에 가야 하니 참기로 했다.
산타루시아 언덕에 도착했을 땐 출입이 통제된 이후였다. 산책 코스인 안 쪽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입구에 있는 건물 안으로 올라가서 노란색 건물의 꼭대기와 그 주변까지는 올라갈 수 있었다. 산타루시아 언덕의 안 쪽은 약간 산책 코스처럼 길이 나 있었는데 아침에 산책하기에 좋을 것 같았다. 내일 일찍 일어난다면 아침에 다시 한번 와야겠다고 생각하며 내려왔다. (그러나 나의 게으름으로 또다시 가지는 못했다.)
내일이 사실상 이번 여행의 마지막 날이자 산티아고에서의 마지막 날이기 때문에 할 일이 많았다. 몇 번이나 가보려다 못 간 모네다 궁전에도 가 보고 싶었고, 국립미술관과 MAVI 미술관에도 가 보고 싶었다. 내일 오후 비행기인데 다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미술관 구경은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또 촉박한 마음으로 가 봤자 의미가 없는 곳이기에 한나절만에 두 군데를 간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밤에 연어회 만찬을 즐기며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아야겠다며 미루고는, 마트에서 장을 보고 해가 지기 시작한 거리를 좀 더 돌아다녔다. 시내의 거리마다 사람들로 붐볐고 버스킹하는 사람들이며, 길바닥에 공예품이나 옷들을 늘어놓고 파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시위대가 지나갔다.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비폭력 평화 시위를 하는 모양이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여자의 얼굴이 그려진 피켓과 '성폭력 피해자', '그녀를 위해'라는 문구를 보았다. 아무래도 성폭력과 관련된 사건이 있었나 보았다. 칠레도 역사적으로 보면 민주화 운동이 거세게 휘몰아쳤었고, 지금도 사회 운동이 쉼 없이 일어나고 있는 나라이다. 남미 나라들의 역사를 보면 큰 틀에서 식민지 - 독립 - 독재 - 민주화 운동 등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우리나라와 참 닮은 구석이 많다. 하긴 여타 다른 약소국도 마찬가지겠지만.
시위대를 보고 울적해졌던 마음은 방으로 돌아와서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시원한 방에서 샤워하고, 냉장고에서 잘 숙성된 연어와 시원한 화이트 와인을 마시는 순간은 정말 모든 시름과 피곤이 물러가는 시간이었다. 비록 간장과 양파밖에 곁들일 것이 없어 살짝 아쉬웠고,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연어회를 혼자 다 먹느라 새벽까지 먹어야 했지만 오랜만에 먹는 즐거움을 찾았다.
CLH호스텔의 또 한 가지 장점은 아침이 정말 잘 나온다는 것이다. 어젯밤의 혼만찬(?) 덕분에 늦잠을 자고 9시가 다 되어서야 아침 식사하러 내려갔다.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잘 준비된 식사를 안 먹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식당 입구 로비에서 그저께 푸콘에서 만났던 할머니를 다시 만났다. 초췌한 모습의 할머니는 어젯밤 버스를 타고 산티아고에 왔는데, 버스에서 만난 한국 청년들을 따라 여기 이 호스텔에 오셨다고 했다. 그런데 예약을 하지 않아서, 체크 아웃이 끝나는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체크인을 할 수 있기에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고 했다. 같이 온 청년 두 명과 여대생 한 명도 같은 처지로 소파에 축 늘어져서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는 반갑다며 손을 잡고 연신 말씀하셨다. 그런 할머니를 두고 혼자 식당으로 가려니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하필 식당은 로비 중앙인 프런트 옆에 있었고 밖에서도 안이 환하게 다 보였다. 프런트에 어제 나를 안내해준 직원이 있어서 그 직원에게 이 할머니 얼마나 기다려야 하냐, 지금 체크인할 방이 없느냐며 물었더니, 알아보겠다며 잠시만 기다리라 하고는 어디론가 가버렸다. 곧 돌아온 직원이 다행히 지금 여자 도미토리에 침대 하나가 났는데 지금 들어갈 수는 없고, 청소 후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지금 체크인하고 짐까지 맡아주겠다고 했다. 할머니에게 통역을 해 주고 체크인하시는 것까지 도와주었다.
그리고 센스 있는 직원이 할머니께 나와 같이 아침식사를 하게 해 주었다. 할머니는 고맙다고 하시면서도 함께 온 청년들이 마음에 걸린다며 혼자 먹는 건 좀 그렇다고 안 먹겠다고 했다. 나는 따뜻한 수프라도 좀 드시라고 재차 권했고 그 청년들도 자기들은 괜찮다고 가서 드시라고 할머니를 떠밀었다. 그들에게 등 떠밀리면서 할머니는 자기가 아침을 살 테니 같이 먹자고 말씀하셨지만 청년들은 아주 재치 있게 사양했다. 기분 좋은 실랑이가 잠깐 이어지고 겨우 할머니와 아침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아침 식사 마감시간이 다 되어서 음식은 많이 없었지만 그래도 과일이며 빵이며, 먹을 것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오랜만에 먹은 만족스러운 아침 식사였다.
아침식사 후에 할머니와 함께 방으로 왔다. 내가 짐 정리를 할 동안 욕실을 사용하시고 시내 나갈 채비를 하셨다. 우리는 오늘 내가 공항 가기 전까지 같이 다니기로 했다. 이미 오전 시간이 다 가고 있었기 때문에 국립미술관 한 곳만 갔다가 중앙 시장에 가기로 했다.
국립미술관은 다행히 문이 열려있었고 입장료는 무료였다. 다양한 미술품과 조각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미술관에 견학 온 학생들과 미술관 안에서 살아있는 현장 수업을 하는 교사가 인상적이었다. 그들은 작품 하나를 보고 미술관 중앙에 동그랗게 둘러앉아 그 작품에 대해서 토론했다. 초등학생들이었는데 제법 토론이 되었고 교사에게 질문도 많이 했다. 그들을 보며 나도 언젠가 저런 수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관에서 나와서 다시 중앙 시장으로 갔다. 이미 점심시간은 넘었지만 여전히 식당들은 문을 열어놓았다. 나는 어제 갔던 식당에 다시 가서 할머니는 해물탕을, 나는 생선 튀김과 맥주를 주문했다. 칠레에서의 마지막 식사라 아쉬웠다. 할 수 있다면 두세 개의 메뉴를 먹고 싶었지만 사실 아침에 먹은 것들도 다 소화되지 않았다. 식당의 주인은 내가 어제도 왔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봤다. 내가 맛있어서 오늘은 친구도 데리고 왔다고 자랑했더니 최고라며 엄지척을 해주었다. 나는 남미 사람들의 이런 친근함이 참 좋다. 어제 처음 봤지만 오늘 또 보면 정말 친구가 된 것처럼 친근하게 인사한다. 그리고 한국사람을 정말 좋아한다. 남미에서 한국인이라고 하면 대우가 달라질 정도로 한국이라는 나라는 남미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있다.
할머니와는 점심 식사를 하고 시장에서 헤어졌다. 할머니는 한사코 내게 점심을 사주고 싶었다며 내 점심값까지 계산하셨다. 그리고 시장이 참 흥미롭다고 하면서 어딜 가도 시장만 한 관광지가 없다며 시장을 더 둘러보겠다고 하셨다. 우리는 서로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며 작별 인사를 했다. 인파 속으로 멀어지는 할머니가 남은 여행을 잘하시고 건강하게 귀국하시길 진정 마음으로 기도했다.
오전에 숙소에서 공항으로 가는 합승 리무진을 예약해 두었었다. 나는 예약 시간에 맞춰 호스텔에 도착했지만 버스는 여전히 오지 않았고, 예약 시간보다 30분이나 지나서야 호스텔 앞에 나타났다. 리무진을 타고 가며 이제 아순시온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파라과이로 돌아가면 이번 여행은 끝이구나 싶은 생각이 안도감과 함께 밀려왔다.
산티아고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왠지 모르게 센티한 느낌이 왔다. 뭔가 이번 여행이 끝나는 것이 아쉽기도 한 반면에 이제 끝이 보여서 후련하기도 했다. 생각보다 외로웠고 생각보다 고생스럽지 않았지만, 그저 집에 가서 발 뻗고 편히 쉬고 싶었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다음 여행지를 위해 매일 짐을 싸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제일 기뻤다. 여행은 매일 새로운 곳에 대한 설렘을 주기도 하지만 매일 짐을 싸야 하는 고단함을 주기도 한다. 그 고단함에서 벗어나는 길은 여행을 끝내는 것이다.
나의 이 고단함은 이제 오늘까지이다. 이 고단함이 그리울 때까지 당분간 배낭여행은 멈추어야겠다. 착륙하는 비행기에서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었음에 세상의 모든 신들에게 마음으로 감사의 기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