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바람의 땅 파타고니아, #11 W트레킹_ Paine grande
평소에 불면증으로 항상 고생하던 나였는데, 이곳 토레스 델 파이네 트레킹을 하는 동안은 텐트에서 마저 숙면을 취했다. 어젯밤 10시도 되기 전에 곯아떨어져서 아침 6시 전에 눈이 떠졌다. 아주 상쾌하고 가뿐하게 일어났다. 추울까 봐 옷을 있는 데로 다 껴입고 침낭 속에서 자서 그런지 약간의 찌뿌둥함은 있었지만,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나니 생각보다 괜찮았다.
얼른 잠자리를 정리하고 씻고 짐 정리까지, 완벽하게 출발할 준비를 하고 난 다음 아침을 먹으러 갔다. 내가 제일 첫 손님일까 봐 두근거리며 들어갔는데, 이미 몇 테이블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모두 부지런하기도 해라. 건강한 아침을 먹고 점심 겸 간식 주머니를 받아 들고 식당에서 나왔다. 식당 옆에는 돔 모양의 숙박 시설도 있었다. 어제는 미처 보지 못했던 풍경들이 눈에 새롭게 들어왔다. 출발하기 전에 한국인 부부에게 인사하려고 들렀으나 아직 주무시는지 인기척이 없어서 작별인사를 하지 못하고 바로 출발했다.
오늘은 먼저 이탈리아노 산장에 가서 배낭을 내려두고 브리타니코를 향해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서 파이네 그란데의 Pehoe 산장까지 가야 하는 일정이다. 브리타니코 전망대까지 올라가서 두 번째 꼭짓점을 확실히 찍어서 W의 중간을 완성해야 하고, 3박 4일의 트레킹 중에 가장 긴 20km가 넘는 거리를 완주해야 한다.
프란세스 캠핑장에서 이탈리아노 캠핑장까지는 1시간 정도가 걸렸다. 이탈리아노 캠핑장은 자신이 가져온 텐트를 칠 수 있는 곳이다. 캠핑 관리소 앞에는 벌써 배낭들이 즐비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도 배낭을 관리소 옆에 놓아두고 카메라 가방과 점심 주머니를 메고 Britanico 전망대로 향했다. 왕복 7시간 거리이다. 점심 먹고 쉬고 하다 보면 8시간이 걸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부지런히 걸어야 했다.
어제와 그저께 했던 트레킹보다는 조금 더 힘든 코스였다. 길도 가파르고 험한 부분도 종종 있었다. 한참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숨을 몰아쉬며 걷다가 갑자기 내가 뭐 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또 전투적으로 목표지점만 찾아가고 있었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나도 뭔가를 하면 전투적으로 열심히만 하는 버릇이 있다.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고 남들보다 빠르게 그것도 잘해야 한다는 강박과 습성이 있다. 정신없이 걷다가 현타가 왔다. 여기까지 와서 '빨리빨리'를 속으로 외치고 있다니... 바보 같았다. 그 자리에서 뒤 돌아보니 아래로는 그림 같은 풍경의 호수와 옆으로는 눈 쌓인 바위산이 멀리 보였다. 자연을 보러 와서는 자연은 안 보고 또 앞만 보고 달린 것이다.
'이제는 쉬엄쉬엄 가야지. 숙소에 저녁에 도착하면 어때, 오늘 안에 도착하기만 하면 되지.'라는 생각을 하며 템포를 줄였다. 걷다가 울창한 숲을 만나면 폐 깊숙한 곳까지 신선한 공기가 들어가게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천천히 걸었고, 차가운 계곡 물을 만나면 바위에 앉아 소리도 듣고 물도 떠 마셨다. 마음에 드는 구간을 만나면 더 정성스레 사진을 찍고 몇 분이라도 더 머물며 자연을 만끽했다. 그렇게 놀며 쉬며 걸었더니 어느덧 프란세스 전망대에 도착했다. 절반 정도 온 것이었다. 시간은 두 시간 정도 지났다. 빠르게 걷던지 천천히 걷던지 차이는 30분 안팎이다. 별반 차이가 없으니 즐기며 걷는 것이 맞는 이치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 몹쓸 '빨리빨리' 재촉하는 습성은 여기에 좀 버리고 가기로 했다.
Frances 전망대는 거대한 바위산 사이에 빙하를 끼고 있었다. 아탈리아노 캠핑장과 브리타니코 전망대 사이에 있는 곳이다. 보통 시간이 없는 사람들은 여기까지만 보고 돌아간다. 그러나 시간 따위에 쫓기지 않기로 한 나는 완벽한 W의 중간 꼭짓점을 찍기 위해 브리타니코 전망대까지 완주하기로 한 목표를 바꾸지 않았다. 나무만 앙상한 구간과 좀 험하다 싶은 구간을 땡볕 아래 아무 생각 없이 지나고 나니 앞에 거대한 바위산들이 병풍처럼 펼쳐진 Britanico 전망대가 나왔다. 전망대에는 넓은 바위가 있어 앉아서 쉬기에 좋았다. 날씨는 맑았지만 구름이 많았다. 그래도 앞에 보이는 설산이며 바위 봉우리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풍경을 감상하며 간식을 먹고 쉬면서 자연의 거대함과 웅장함을 다시 한번 더 느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더니 다시 내려갈 일이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주위에 사람도 많아지고, 내가 앉은 명당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해야겠다 싶은 생각에 일어났다. 어느새 많아진 사람들 가운데 동양인이 한 명 보였다. 일본인인가? 중국인인가? 선뜻 인사를 할 수 없었다. 눈이 마주치자 내가 "Hola!"라고 인사했더니 그쪽에서 "안녕하세요."라고 했다. 한국인이었다. 화장하지 않은 한국인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아니 거의 만나기 어렵다. 어제 만났던 아주머니도 힘들어 죽겠다고 했지만 화장만은 곱게 하고 계셨었다.
그녀는 배낭여행으로 세계일주 중이라고 했다. 남미를 마지막으로 몇 주 후에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많이 지치고 보통의 여행객과는 달라 보였다. 모자도 없이 반팔 티셔츠와 트레이닝 바지 차림에 1.5L짜리 물통 하나만 들고 여기까지 올라왔다. 처음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같이 내려갔다. 무척 걸음이 빠른 친구였다. 나도 걸음이 빠른 편이라서 보조가 맞긴 했지만 나는 좀 천천히 내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오늘 Chileno 산장까지 13시간 이상을 걸어야 해서 시간이 빠듯하다고 했다. 그녀는 나와는 반대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는 길이었고, 내일 새벽에 삼봉에 오를 예정이라고 했다. 방향은 다르지만 W트레킹 마무리하는 시간은 비슷했다. 어쩌면 내일 토레스 델 파이네를 떠나는 버스에서 만날지도 모르겠다며, 아니면 다른 곳에서도 만날 수 있겠다는 둥 가벼운 대화를 하면서 내려가다가 계곡 물이 세차게 흐르는 곳에서 나는 좀 쉬었다 가겠다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그녀는 물통에 물을 가득 채운 뒤에 어디서든 또 만나자고 활기차게 인사하며 다람쥐처럼 내려갔다. 좀 지쳐 보였지만 젊음으로 활기를 뿜어내던 그녀를 남미 여행 중에 어디선가 만나기를 기대했지만 그 이후에는 만나지 못했다. 아마 훌륭히 세계일주를 끝내고 한국으로 잘 돌아갔으리라 생각된다.
Italiano 산장에 도착한 것은 2시가 다 되어서였다. 관리소 옆에는 아침보다 더 많은 배낭들이 줄지어 있었고, 여행객들도 쉬는 것인지 뭔가를 기다리는 것인지 즐비하니 앉아 있었다. 나는 배낭을 찾아 나무 둥치 한켠에 자리 잡고 앉아서 점심을 먹었다. 여기서 오늘의 숙소인 Paine grande 산장까지는 2시간 반 정도 걸린다고 했다. 점심 먹고 쉬엄쉬엄 걸어도 6시 안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 절대 재촉할 필요가 없었다.
다시 배낭을 메고 출발했다. 한 명만 건널 수 있다는 출렁다리가 나왔다. 마주오는 사람이 건너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올라!'하고 활기차게 인사해 주었다. 그도 근사한 미소와 함께 '올라!'라고 인사했다. 오늘은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지나쳤다. 한 무리의 한국 사람들도 자기들끼리 까르르 웃으며 지나갔다. 길 가는 내내 어떤 영국 여자와는 앞서거니 뒤서거니를 반복하며 동행 아닌 동행을 했다.
어제와 그저께 본 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은 풍경들이었지만 그래도 매 순간이 감동이었다. 그러다 누구나 안타까움과 분노가 인다는 아직도 불 탄 흔적이 있는 구간에 도착했다. 나도 앙상한 나무들과 황량해진 벌판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2011년 12월에 어떤 이스라엘인이 휴지를 태우다 불을 냈는데 거의 몇 달 동안 불을 끌 수 없었다고 했다. 그 잔재들이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이렇게 황폐해진 모습을 보면 그 이스라엘인에게 욕을 안 할 수 없다.
배낭이 점점 무거워지고 다리에 힘이 빠져 자꾸만 주저앉고 싶을 때쯤 멀리서 파이네 그란데 산장이 보였다. W트레킹 코스의 산장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시설도 좋다고 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첫날의 숙소 정도만 되어도 대만족이다. 따뜻하고 푹신한 침대에 누울 생각을 하며 힘을 내서 걸었다. 예상보다 빠르게 6시가 되기 전에 도착했다. 도착해서 보니 깨끗한 텐트가 즐비한 캠핑장도 제법 넓었고, 리셉션도 넓고 직원들도 친절했다. 2층에는 넓은 식당과 Bar가 있었고, 난로가 있는 휴식 공간도 있었다. 직원은 친절하게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시설들과 방을 안내해 주었다.
따뜻한 물에 샤워하고 포근한 이불을 덮고 푹 쉴 수 있다는 기대를 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2층 침대가 세 개 놓인 방에는 침구가 하나도 없었다. 그저 딱딱한 침대만 있을 뿐이었다. 베개도 이불도 아무것도 없었다. 당황스럽고 황당했다. 맞은편 침대에 담요를 덮고 누워있던 사람이 나의 이 황당함을 눈치챘는지, 여긴 침구가 없는 곳이 맞다며, 리셉션에 가서 이불을 달라고 하면 주는데 돈을 더 지불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참 어처구니가 없었다. 분명 여기가 첫날의 Torre norte 산장보다 더 비싼데 침구를 제공하지 않는다니... 망했다 싶었다. 그나마 챙겨 온 작은 무릎담요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물론 돈을 주고 이불을 구해오면 되겠지만, 이미 지불한 이 침대 하나의 비용이 65달러나 되는데 더 이상 숙소에 돈을 쓰기 싫었다. 결국 있는 옷 다 껴입고 재킷과 담요를 덮고 자야 했다. 어제 잤던 텐트보다 더 추웠다.
W트레킹의 마지막 날인 4일째되는 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그레이 빙하 전망대를 다녀올 계획이었기에 전날 저녁에 아껴두었던 컵라면을 먹고 바로 잤다. 춥고 건조했지만 피곤해서인지 곧 잠들었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얼굴이 부어서 눈이 잘 안 떠졌다. 아침 6시도 안 되었다. 일어나서 혹시나 일출을 볼 수 있을까 해서 호수를 향해 나갔다. 문 밖이 바로 호수였다. 구름이 짙게 끼어서 해가 떴는지 알 수 없었다. 구름 사이로 해가 살짝 나왔다. 해를 보며 호수가를 살짝 산책하다가 추워서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잠은 오지 않았는데 좀 더 누워있고 싶어서 딱딱한 침상에 몸을 뉘었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다시 벌떡 일어나서 짐을 챙기고 남아있는 모든 먹거리를 아침으로 챙겨 먹었다. 그리고는 그레이 빙하 전망대를 향해 걸었다.
8시가 안된 시간이었으나 드문드문 사람들이 트레킹을 시작했다. 날씨가 흐려서 좀 추웠다. 전망대까지는 왕복 4시간 정도 예상했다. 12시 30분에 산장 옆 선착장에서 보트를 타야 하기 때문에 12시까지는 돌아와야 했다. 나는 그레이 빙하까지 갈 수 있을 만큼 갔다가 돌아오면 되었다. 사실 전망대까지만 가면 그레이 빙하의 목표지점에서 반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완벽한 W를 그릴 수가 없다. 이 빠진 W가 되는 셈이었다. 그래서 최대한 많이 올라갔다가 돌아오려 쉬지 않고 걸었다. 어쩔 수 없이 또 조급해졌고, 스스로 발길을 재촉했고 결국 이 질긴 습성을 버리지 못했다.
나의 W 트레킹의 마지막 코스나 마찬가지인 그레이 빙하까지의 길은 참 아름다운 길이었다. 4일간 걸었던 토레스 델 파이네의 모든 길들이 그러하듯이. 특히 이 길은 산등성이에서 호수를 따라 걸을 수 있어서 좋았다. 한 시간 좀 넘게 걸었더니 호수에 둥둥 떠 있는 시릴 만큼 푸른빛을 띤 빙하 조각이 보였다. 그 위로도 몇 개의 조각이 더 보였다. 시간을 계산하며 걷느라 온전히 즐길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찬 바람을 맞으며 빙하 조각을 따라 더 걸어 올라갔다. 전망대를 지나쳐 직진만 하며 올라가다가 10시가 좀 넘은 시간이 되자 아쉽게 발길을 돌려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야 비로소 그레이 빙하 전망대를 보았다. 사진도 찍고 한 숨 돌리고, 3박 4일간 무사히 트레킹을 끝낼 수 있었음에 감사하며 잠시 풍경을 보며 감상에 젖었다.
항상 그렇듯이 머물렀던 곳을 떠난다는 것은 아쉬움이 먼저 앞선다. 3박 4일간 걷는 것 외에는 할 것이 없었다고 할 수 있는 W트레킹이었다. 그러나 많은 생각을 했고 , 이러저러한 사람을 만났고, 사소한 일들이 있었다. 좋았던 것은 때로는 아무 생각 없이 머리를 비우고 걸을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온전히 자연을 바라보고 자연과 더불어 숨 쉬는 경험을 했다고 할까. 나흘 동안 휴대폰 스위치를 켜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고 또 그 시간 동안 휴대폰이 없어도 됐다는 것에 감사했다.
보트를 타고 나오면서 내가 4일 동안 걸었던 길을 한눈에 보며, 4일간의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지나고 보니 아주 짧은 시간이었고, 배를 타고 떠나는 이 순간까지도 아쉽다. 내 인생에서 또다시 이 칠레 땅의 토레스 델 파이네에서 W트레킹을 하는 날이 다시 올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을 다시 만난다면 꼭 그 사람과 다시 오고 싶은 곳이다. 그땐 나도 그 누구보다 근사한 미소로 길을 비켜주며 'Hola!'라고 인사할 수 있을 것 같다. 잠깐 스치는 타인에게 따뜻하고 근사한 미소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행복한 일이다. 나도 이곳에서 걷는 시간동안 행복했다. 비록 완전한 행복은 아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