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기 #1
어렸을 때부터 걷는 걸 싫어했다. 걷는 행위 자체를 싫어한다기보다는 ‘가만히’, ‘그냥’ 무언가를 하는 걸 못 견뎠다. 가만히 앉아 있기. 가만히 기다리기. 그냥 걷기. 그냥 달리기. 그저 무언가를 하고 있지 않으면 심심하다고 느꼈다. 그 잠깐의 시간을 못 견디는 나를 돌아보며 지금의 시대에서 성장했다면 분명히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정신과를 드나들지 않았을까 싶다. 무엇이 그렇게 심심하고 답답했는지, 왜 그렇게 혼자서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게 싫고, 무언가 자극적인 활동에만 목을 매며 돌아다녔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이해가 안 된다. 그리고 지금의 날 닮은 아들을 보며 역시 이해가 안 되고 미안하다. 그토록 싫어하던 걷기와 친해진 건 와이프의 도움이 컸다. 연애시절부터 같이 걷는 걸 좋아했던 와이프를 따라 나는 같이 걸어 주었다. 그때는 걸어 주었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지금은 내가 먼저 걷자고 이야기하지만. 그게 시작이었을까. 지지리도 지루해서 죽을 것 같던 걷기는 슬금슬금 내 옆을 지키기 시작했다. 일이 막혔을 때,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 생각을 정리할 때 큰 도움을 주던 이 친구는 이제는 불안의 바닷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나를 끄집어내어 주는 일등공신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도움이 되었던 건 아파트 산책로를 아무런 생각 없이 뺑뺑도는 일이었다. 내가 살던 아파트는 중간 동을 둘러싸고 있는 2차선 도로 옆 인도 한편에 우레탄을 깔아 놓은 산책로가 있다. 한 바퀴를 쭉 돌면 7~800m 정도의 거리가 된다. 언제나 나가면 걷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 그 흐름에 몸을 맡겨 같이 둥실둥실 떠다니다 보면 어느 순간 왜 걷고 있는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모르겠는 무아지경의 상태에 빠질 수 있다. 물론 그 과정까지 수많은 방해요소들은 존재한다. 음식물쓰레기 버리는 곳을 지날 때는 코를 찌르는 냄새 때문에 한 번 표정이 일그러지기도 한다. 아파트 단지 뒤쪽 주택가로 가기 위해서 아파트 안쪽으로 질러가는 게 가장 빠르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저 아파트를 지나가며 담배를 피우거나, 길을 방해하는 일들이 종종 생긴다. 사실 크게 방해가 된다기보다는 속 좁은 이기주의의 산물이다. 그래도 계속 걷는다. 그래야 모든 것에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익숙한 길을 아무런 생각 하지 않고 그저 걷다 보면 인생의 불안함이 사라진다. 불안함이 끼어들 새가 없이 건강한 생각들이 땀방울과 함께 샘솟는다. 하지만 그런 뺑뺑이가 지겹고 죽도록 싫은 날이 있다. 성향상 이런 날이 자주 있다. 익숙함에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너무 익숙해지면 지겹고 심심하다. 지독한 심술 아닌가. 불안해서 안정되고 싶지만, 너무 안정되면 답답하다니. 인생은 모순이라더니, 딱 그렇다. 이런 날, 나는 안 가본 곳을 무작정 찾아간다. 지도 앱이 너무나 잘 되어있기에 특별한 걱정 없이 출발하면 된다. 아무 곳이나 무작정 찾아가기보다는 지나다니며 한 번쯤 가보고 싶었던 곳으로 간다. 예를 들면 이사 가고 싶었던 곳에 가서 부동산 임장하는 사람처럼 걸어보거나, 다른 동네까지 걸어서 가려면 어떤 코스로 가야 되는지 찾아보며 걸어가거나, 동네마다 잘 되어 있는 둘레길, 하천 길은 따라서 가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가보는 식이다. 가까운 동네라도, 차 타고 많이 가본 곳이라도 걸어서 가면 완전한 새로움을 맛볼 수 있다. 실제 가는 길을 조합하고 찾을 때는 그저 길만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뇌 속의 신경들도 새롭게 연결되는 짜릿함이 있다. 거기에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실제의 모습을 천천히 걸어가면서 음미한다면, 현재의 내 삶을 돌아보는 좋은 기회가 된다. 불안이 나를 힘들게 할 틈이 없어진다. 그저 나도 한 발자국 앞으로 더 나아가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요즘 새로운 곳으로, 새로운 길로 떠나는 산책길에 또 다른 동반자가 생겼다. 바로 공유 자전거다. 이런 산책에서 집에서 멀어질수록 다시 돌아올 게 걱정되어서 어디서부터 돌아갈지 고민이 되기 마련인데, 요즘은 공유 자전거가 많이 생겨서 갈 수 있는 한 멀리 갔다가 자전거 타고 돌아오면 금방 올 수 있다. 더군다나 전기자전거가 대부분이어서 그리 힘들지 않게 쌩쌩 달리며 오면 꽤나 상쾌한 느낌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다. 물론 생각보다 비싼 가격을 지불해야 되기도 하지만, 매일 타는 것도 아니고!(거의 2시간 탄 적 있는데 몇 만 원이 나와서 깜짝 놀랐다ㅠ) 이제 한 가지 더 바라는 거라면, 아들이나 딸도 이 산책길을 즐기고 같이 걸으며 즐거운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나도 엄마, 아빠가 걷자면 죽자고 안 나가려고 했는데……. 아이들한테 이것까지 바라는 건 너무한 일이려나. 아빠, 엄마, 미안해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