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움직이기 #2

by 현예

MBTI처럼 사람을 단순히 16개의 부류로 나눌 순 없다고 확신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유형의 성격검사의 유행으로 꽤나 많은 도움을 받은 편이다. 팀장을 할 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직원들을 MBTI를 통해 원래 그런 성격이란 걸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특히나 극 J인 나로서는 타임라인을 잘 못 지키고, 지키려고 그다지 노력도 하지 않는 것 같아 보일 땐 스트레스를 받고 속으로 삭히기 일쑤였다. 그렇다. 나는 MBTI에서 이야기하는 소위 극 J이다. 여행을 가도 시간별로 어디를 갈지, 밥은 어디서 먹을지, 어디서 휴식을 할 건지 정해져 있지 않으면 못 견딘다. 불분명함, 무계획함은 내 속을 뒤집는 단어 중 가장 높은 티어에 속한다. 더군다나 낯선 곳을 가는데, 어린아이들 둘이나 데리고 가면서, 계획이 없는 여행은 납득할 수 없다. ​이런 J로서의 빡빡함은 일할 땐 나름 도움이 되었지만 살아가며 스트레스를 더 유발하기도 하다. 특히나 이렇게 여행 계획을 빡빡 히 세우고 나서 지켜지지 않았을 땐 스스로 불안해진다. 계획대로 되지 않음에 화가 난다. 통제가 되지 않는 아이들이 싫다. 그걸 방관하고 있는 와이프는 더 싫다(와이프는 완전 P에 속한다). 이러고 있는 내가 제일 싫다. 결국 나는 빵 터져버리고 만다. 이런 양상은 일상생활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통제 욕구가 커서 그런지 내가 계획하고 생각한 대로 되지 않았을 때 기분이 안 좋아진다. 슬슬 불안해진다.

뒤늦게서야 세상에 내 맘대로 되는 게 그리 많지 않다는 걸 알게 되고 나서는 빡빡하게 계획을 세우는 습관을 조금씩 바꾸고 있다. 예를 들어 아이들과 공주와 부여로 백제 여행을 떠난다며 그전에는 몇 시에 출발해서 어느 휴게소에서 한 번 쉬고 어떤 맛집에서 밥을 먹고 어떤 박물관과 유적지에서 얼마동안의 시간을 보낸 뒤 어디 가서 자리를 잡고 잔다 등이 내 머릿속에 정리되어 있어야만 했다. 특히나 카라반을 가지고 다니면서부턴 좀 더 심해졌다. 카라반을 어디다 세우며, 화장실은 있는지, 차박이 가능한 곳인지에 대한 여부 때문에 더 신경이 곤두섰다. 하지만 이런 나의 성향이 점점 가족 여행을 망치고 나 혼자만의 불안의 세계로 내가 스스로 들어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내 맘대로 되는 게 많진 않지만 적어도 나는 내 맘대로 할 수 있어야 되지 않을까. 큰 방향, 맥락만 있다면 세세한 계획은 몸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흘러가도록 놔둬보자고 다짐했다.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스스로 생각했던 계획에 집착하지 않게 됐다. 불안하지 않게 됐다. 이토록 쉬웠던 마음의 편안인데 뭘 그리 집착하고 통제하려고 했는지 이제야 돌이켜보니 후회스럽다. 물론 여전히 머릿속에 아무런 계획을 안 세울 순 없다. 적어도 집착은 하지 않는 것뿐인 것 같다. 그래도 이제야 불안하지 않다면 이게 어딘가.​

와이프는 동해 바다가 보고 싶다는 말을 시기별로 꼭 한 번씩은 한다. 각 계절별로 이유도 가지가지다. 그러면 내 머릿속에는 거리에 대한 부담감부터 확 다가온다. 적어도 3시간은 운전해서 가야 되는데, 지금은 겨울이라 카라반을 끌고 가더라도 부담스러운 날씨인데, 주말 내에 동해안 갔다 오기는 아까운데, 그렇다고 주중에 갈 순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바다 앞에서 책을 손에 쥐고 맛있는 커피를 한잔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니, 갑자기 엔도르핀이 솟기 시작한다. 안 그래도 요즘 커피에 푹 빠져있는데 그쪽의 유명한 카페 혹은 지나가다 예뻐 보이고 커피도 맛있어 보이는 어느 카페라도 가보고 싶었다. 요즘엔 독립서점도 많이 생겨 예쁜 서점까지도 많은 곳이 바로 강릉, 속초더라. 포켓몬고를 바다 가서 해보고 싶다는 아들, 맛있는 빵을 먹고 가족이 붙어 있었으면 좋겠다는 딸, 그저 바다를 보면 좋겠다는 와이프의 모든 요구가 맞아 들어간다. 이렇게 우린 충동적으로 아침에 강릉으로 향한다. ​사실 아직 출발하지도 않았지만, 떠나려고 마음먹은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설레고 즐거운 상태인 것 같다. 어디론가 다 같이 떠난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즐거운 이유는 아마 현실에 대한 불만족에서 출발하는 일탈이 아니라, 지금 현실도 충분히 아름답고 불안하지 않지만 거기에 추가적으로 더 행복하기 위해 떠나는 일탈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전자 같은 상황이라면 그저 회피하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에 오히려 더 불안할 듯하다. 하지만 그런 불안한 마음 없이 떠나는 일상의 연속에서의 작은 일탈은 삶에 충분한 긍정적인 자극으로 작용한다. 아직 차가 많이 막히진 않을 거고, 가면서 미루어 놓았던 많은 이야기들도 나눌 것이고, 아름다운 바다를 보며 배도 채우는 시간은 우리 가족에겐 또 다른 추억이 되지 않을까. 일단 떠나보자. 그저 넷이 있으면 좋은데, 가면 뭐든, 어떻게든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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