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해보면 읭? 스럽지만서도, 게임오버였다
또 무료하게 2주가 지났다.
몸은 슬슬 괜찮아졌고, 나는 젊음의 패기로 다시 술담배에 손을 댔다. 이별의 아픔도 조금씩 아물어가고 있었다. 그는 한국 땅에 있지도 않고, 연락도 불가능했다. 그랬기에 이전의 이별보다 극복이 쉬웠다.
그 날도 친구와 만났다. 가장 좋아하는 파란색 롱 원피스를 입고 화장도 예쁘게 한 채로. 우리끼리 술도 꽤 마신 채 공원에 앉아 낄낄대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웬 이상한 남자가 자꾸 뚜껑이 따진 캔맥주를 먹으라며 건넸다. 싫다고 안 먹는다고 했는데, 남자는 끈질겼다. 조금 무섭기도 하던 찰나에 갑자기...
"이 새끼야 너 뭐야."
엄마야.
그때 그 싸나운 남자였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지나가다가 봤다고 한다. 그냥 그 순간에 여길 지나고 싶다고 생각했다나. 우리가 주말마다 여기서 논다고 했던 걸 기억했던 모양이다. 어쨌든 눈빛부터 싸나운 그 남자의 매서운 말에 그 이상한 남자는 자리를 피했다. 그런데 싸나운 남자의 눈길이 우리 손에 있던 담배에 꽂혔다.
"뭐야. 너네 담배 피냐?"
"네. 피실래여?ㅋㅋ"
그러자 그는 정색을 하고
"꺼. 바로 꺼. 딱 바로 꺼."
하는 것이었다.
뭐 도움이 된 사람이니까. 재수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우리는 담배를 끄고 낄낄댔다. 싸나운 남자는 후배랑 술을 마시고 있었다고 했나? 하여간 우리를 데리고 우리가 처음 만난 장소인 그놈의 마익스캐빈에 갔다. 분위기는 한참 무르익어 있었다. 그 자리에 모두가 흥에 겨워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텐션 한껏 오른 나에게, 싸나운 남자는 번호부터 달라고 했다. 낄낄대면서 번호를 찍어줬다. 남자는 계속 내 손을 잡았고 내가 뿌리치는데도 계속 내 보호자라도 되는 마냥 내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나는 무척 짜증이 났지만 어쩌다 보니 마익스캐빈에서 나와 싸나운 남자와, 친구와 함께 나와 신촌주막으로 향했다. 몇 잔 마시다가, 친구는 너무 취해서 집에 가겠다고 했다.
나는 낯선 데다 싸나워 보이기까지 하는 남자랑 둘이 있기 싫었다. 진심으로 나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랬기에 나는 친구에게 그냥 몇 바퀴 산책이나 하고 오자고 했다. 하지만 싸나운 남자는 계속 친구를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를 무시하고 친구와 잠시 나갔고, 친구는 다행히 술이 조금 깼다.
이번엔 내가 문제였다. 술이 확 올라온 것이다. 주막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화장실에서 토를 했다. 아주 시원하게.
이때부터의 기억은 또렷하다.
가게를 나설 무렵 친구는 화장실에 갔고, 남자는 나에게 저번처럼 해장국이나 먹으러 가자고 했다. 어느새 새벽 5시였다. 나는 알겠다고 하고 남자가 계산하는 동안 가게 밖에 서 있었다. 새벽 공기는 차가웠다. 토를 한 직후라 더했다. 덜덜 떨고 있는데 남자가 나왔다.
"왜 그래?"
"추워서... 추워서요..."
"추워? 그래 그럼 이리와!"
그리고 대뜸 이 남자가 나를 껴안았다.
당황한 나는 남자를 밀쳤다.
"뭐 하시는 거에요!"
그러자 남자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너. 너 맘에 든다. 현유, 너 내꺼야. 너 나랑 결혼할 거다."
라고 대뜸 고백을 했다.
어안이 벙벙...
지금이야 부부의 연을 맺어서 다행인데 요즘 시대에 다시 읽기에는 읭?스러운 부분이 있다는 걸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안다. 계속 읽다보면 내가 왜 그랬는지 알 수 있다. 어쨌든 그 싸나운 남자의 대학 후배라는 사람과 내 친구는 동향이었고, 두 사람이 공통의 주제로 이야기하며 쫓아오는 동안 나는 그 남자와 둘이 앞장서서 해장국집으로 가게 됐다. 해장국집은 이번에도 멀었다. 그리고 남자는 계속 내 손을 잡으려 했다.
"아 정말 진짜 왜이러세요..."
친구가 많이 취하지만 않았어도 나는 정말 도망쳐버렸을 것이다. 정말 이 남자가 갑자기 미쳤나? 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저번에는 취했어도 이러지는 않았는데...
그 와중에 그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정말 사랑에 빠진 남자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건 내가 모를 수 없는 표정이었기 때문에 나는 더 당황했다.
연기파인가?
아니면 술에 취하면 모든 여자에게 다 그런 건가?
하지만 저번에도 술에 취한 것 같았지만 저러진 않았는데.
그러다 결국 해장국집에서 쇼부가 났다.
역시 사랑스러운 눈길로 나를 보던 그는 내가 줄곧 배고파하던 걸 알고 있었나보다. 그는 감자탕 4인분에 뼈까지 추가해 줬다. 그리고 나를 보고 사랑스럽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우리 현유~ 배고픈 것 같아서."
이거에 빠져들 내가 아니다. 감자탕을 기다리는 동안 마주앉은 그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내 친구나 자기 후배는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
"현유는 이상형이 어떻게 돼. 어떤 남자 스타일 좋아해."
두말할 것도 없다.
"혼다요. 혼다 케이스케."
그 당시 내가 사랑했던 혼다 케이스케의 모습은 이러했다.
그런데 그 남자가 갑자기 오오, 이런 표정을 짓더니 안경을 벗고 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리고 딱 한 마디를 했는데 이 말에 게임이 그냥 끝나버렸다.
"나, S대 혼다인데?"
근데 새삼 진짜 혼다랑 엄청 닮았던 것이다.
쌍꺼풀 없이 눈꼬리가 쳐졌지만 싸나운 눈빛, 갸름한 턱, 시꺼먼 피부, 두꺼운 입술, 182cm의 키, 그리고 축구 좋아하는 남자.
게임 오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