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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유 Jul 20. 2021

부캐는 언제 뇌절하는가?

1절만 하는 게 생각보다 꽤 어렵다

한때 이런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패션 브랜드가 언제 망한다고 생각하나? 구매자가 줄었을 때? 패션계에서 인정받지 못할 때? 틀렸다. 학생들이 입기 시작했을 때다." 결혼 전 돈도 없던 시절에 큰맘먹고 구찌의 블랙 미니백을 샀다. 한동안 열심히 들고 다녔지만 지금 그 가방은 몇 년째 안방 한구석에만 처박혀 있다. 취향이 바뀌어서는 아니다. 여전히 그 가방은 이쁘다. 다만 막내동생 친구 뻘인 고등학생이 비슷한 가방을 들고 다니는 걸 목격한 후부터 나는 그 가방을 들 수가 없었다. 걔네가 들고 다니는 게 진짜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그들이 구찌 로고를 들고 있다는 게 중요했다. 교복 입는 학생들이 드는 순간부터, 길거리 여기저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로고가 낭자해지는 순간부터 브랜드의 간지가 줄어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고급 아웃도어룩이었던 노스페이스가 농고 오빠들 유니폼따리로 전락한 사례가 있음.


비슷한 이야기다. 부캐는 언제 뇌절할까? 지난 몇 년 간 바야흐로 '부캐 열풍'이 불었다. 현실의 인물이 연기하는 가상 인물인 부캐는 유튜브 문화와 어우러져 전성기를 맞이했다. 너도나도 부캐를 만들었다. 재미있었다. 부캐를 만든 이들의 연기력도 훌륭했고, 세계관은 쫀쫀했으며 댓글들은 유쾌했다. 그 한가운데에 피식대학의 B대면 데이트가 있었다. 부캐 문화에 재미를 못 느끼는 사람들도 최준의 코막히는 피글렛 웃음에는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준며든 사람들은 더 넓은 세계를 원했다. 그리고 이호창이 등장했다. 개그맨 이창호, 한사랑산악회의 이택조와 전혀 다른 재벌 3세의 모습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내 취향은 무슨 상황에서도 처자식 부양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할 것 같은 차차차차진석이었기에(...) 그래서 이창호와 최준을 놓고 고민하게 된 결말이 마음에 썩 들진 않았지만 그래도 집중해서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세계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금 얘기하는 부캐의 뇌절을 가장 제대로 보여주는 사례가 여기서 나온다. 개그맨 이창호에게는 욕쟁이 아저씨 이택조, 일에 미쳐 사랑을 몰랐던 재벌 3세 이호창 그리고 또 하나의 부캐가 있었으니 아이돌 그룹 매드몬스터의 2000년생 막내 제이호. 이 괴기스런 얼굴의 캐릭터는 자신의 파트너 탄(개그맨 곽범)과 함께 진짜 아이돌스러운 콘텐츠를 마구 쏟아내며 결국 타이틀곡 '내 루돌프'의 뮤직비디오를 찍어내고 엠카운트다운 무대에까지 섰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개그맨 선후배들의 유튜브 콘텐츠에 출연해주는 한편 각종 방송에도 모습을 드러냈고 화보도 찍었다. 그렇게 '내 루돌프' 활동을 마무리한 그들은 또 다른 곡 '다시 만난 누난 너무 예뻐'를 들고 나왔고, 각종 광고를 섭렵하며, 기자간담회까지 열며 세계관을 더욱 공고히 하려고 했는데...


반응이 예전 같지 않다. 뇌절이라는 반응이 쏟아진다. 새로 유입된 유튜브 팬들로부터가 아니라, 개그맨 이창호와 곽범의 오랜 팬들로부터 나오는 반응이다. 디씨인사이드 곽범 갤러리와 이창호 갤러리에는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하는 마음도 이해하지만 뇌절인 건 어쩔 수 없다"는 게시물이 베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아직 유튜브에는 부캐의 팬을 연기하는 부캐라고 스스로를 설정(?)하고 댓글을 다는 팬들이 많아 보이지만, 한 발 돌아보면 이미 질려버린 팬들도 많다는 이야기다.


매번 새롭게 재미있는 디테일을 살려 보여주는 부캐는 지겹지 않다. 매드몬스터 역시 새로운 컨셉의 아이돌이랍시고 만들어낼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이 존재했을 것이다. 하지만 매드몬스터는 유튜브 바깥의 세상, 전 연령층이 볼 수 있는 지상파나 광고에 출연하며 세계관을 알리는 데 집중하고 있다. 이미 유튜브에서 보여줬던 것들을 재탕할 수밖에 없다.


답을 알고 보는 개그는 재미가 없다. 기존 팬들은 떨어져 나가는데, 그렇다고 세계관이 더 넓은 연령대로 확장되진 않는다. 유튜브 세상을 벗어나 좀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려는 시도가 오히려 뇌절로 이어지는 것이다. 본캐 입장에서는 지금이야말로 이름을 알릴 기회라고 생각해 여기저기 모습을 드러내지만, 기존 팬들 입장에서는 했던 얘기 또 하는 방송은 그만 나오고 유튜브 통해서 다시 재미있는 콘텐츠나 만들어줬으면 싶다. 그렇게 부캐는 뇌절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부캐가 유튜브 세상을 벗어나 일상 생활 여기저기 얼굴을 비추는 순간부터 기존 팬들은 기존에 했던 것들이 반복되니 1절 2절을 넘어 뇌절이라고 느끼게 되는 듯.

매드몬스터 이전에는 펭수가 그랬다. 비록 펭수는 인간이 아니었기에(?) 뇌절이라는 비난을 거세게 받진 않았지만, 물밀듯이 쏟아진 TV 프로그램 및 광고 출연 이후 인기가 예전 같지 않은 건 사실이다. 어디서나 펭수를 접할 수 있게 되자 유튜브에서만 만날 수 있는 캐릭터라는 희소성이 줄어들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유튜브 세상 부캐들의 팬들이 전부 약간은 홍대병 환자인가 싶기도 하지만, 사실 길거리의 모두가 구찌 가방을 들면 구찌 가방에 눈길이 안 가는 게 인간의 마음인 걸 상기해보면 홍대병이 아니라도 그럴 수 있겠다 싶기도 하고. 어쨌든 부캐의 줄타기는 어렵다. 유튜브를 통해 인기를 끌 수는 있지만, 너무 많은 대중에게 노출되는 순간 뇌절이 돼 버리고 만다.


적정선을 지키는 게 어렵지만, 동시에 물 들어올 때 열심히 노를 저으려는 본캐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B대면 데이트 속 최준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딱 정점일 때 박수받고 떠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선 안 넘고, 뇌절하지 않는 부캐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05학번이즈백' 처럼 다른 플랫폼을 통한 등장을 자제하고 자체 유튜브 채널에서만 활동해야 하는 걸까? 어쨌든 브랜드의 명운이 학생들의 손에 들어간 순간 바닥을 치는 것처럼, 부캐는 다수의 눈에 밟힐 때 뇌절하는 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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