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일과 카톡말미에 적는 인사말이다. 나는 '행복한 하루', '즐거운 하루' 대신 '평안한 하루'라고 쓰기를 택했다. 내 삶이 만난 상태 중 최상위 상태가 '평안'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새벽, 엄마와 실없는 대화를 나누다가 공통점을 발견했다. 엄마도 사람들에게 "평안한 하루 되시라"고 인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엄마, 나는 맨 마지막에 인사말 적잖아. 거기다 '평안한 하루 보내세요'나 '평온한 하루 보내세요' 하고 적는다? 즐거운 하루나 행복한 하루보다 그게 더 좋은 상태인 것 같아"
"어머! 엄마도 그렇게 적어. 평안한 하루 되시라고"
"헐 똑같네 우리? 그게 그것 때문인가 보다. 상연이 키우다 보니까 평안한 상태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거지."
(*상연이는 우리 집 막내=쭈니. 희귀 난치병 미토콘드리아 근병증 환자)
상연이와 살면서 가장 좌절할 때는 상연이가 응급실에 실려갈 때다. 경기가 멈추지 않으면 병원에서만 줄 수 있는 주사를 맞으러 가야 한다. 가서 경기를 오래 하게 한 원인이 뭔지 검사로 알기 위함이기도 하다. 만약 병에 걸린 거라면 그에 따라 적절한 치료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검사 후 별 문제가 없다면, 경기를 멈추고 정신이 돌아왔는지 확인한 다음 곧장 집으로 온다. 하지만 코로나 시절에는 2년간 폐렴으로 3~4번을 입원하고 그중 9박 10일을 중환자실에 있었던 적도 있다. "어머니, 상연이를 여태껏 잘 키우셨는데..."하고 끝맺음 없는 말을 들은 것도 그때였다.
그 이후로는 상연이가 별 이유 없이 응급실에 가도 걱정이 된다. 혹시 이게 마지막 순간이진 않을까 하는 불안함이 밀려온다. 응급구조사분들이 열을 재고 증상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동안 나는 상연이만 쳐다본다. 상연이를 들것에 옮긴 다음 밴드로 앞을 고정하고 엘리베이터에 타기 위해 침대를 세우는 동안에도 상연이만 본다. 엘리베이터가 올라올 동안은 혹시 몰라서 손, 발도 잡고 혹시 몰라서 "쭌아~ 금방 와야 돼"하고 목소리를 들려준다. 마음은 마지막이라고 믿지 않지만 몸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평안함이 어찌 최상의 상태가 아닐 수 있을까. 내 가족이 내 앞에서 숨 쉬고 있는 지금이 나는 종종 벅차도록 고맙다. 이 마음에는 전염성이 있는 것 같다. 나는 가족이 아니더라도 지나가며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유 없이 고맙다. 살아줘서, 살고 있어서. 아무 일 없이 살기도 참 힘든 세상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그저 고마운 마음이 든다. 종종 대책 없는 F가 된다.
'여러분은 모두 소중한 사람이에요'
'살아 있기만 해도 할 일을 다한 겁니다'
누군가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뜬구름 잡는 일보다 더 헛되게 들릴지 몰라도 나는 쓴 사람이 진심이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생명과 관해서 큰일을 한 번 겪어본 사람이라면 저런 순진무구한 생각이 정말로 든다. 누군가를 밟고 일어서서 느끼는 다행이 아니라 생명 자체에 대한 경탄에 가깝다.
삶에서 종종 다가오는 큰일들은 내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려주고 나서야 떠난다. 나는 무력감을 느끼고 하염없이 슬퍼진다. 하지만 인생이 한 번 더 기회를 준다면 사람은 바뀌고야 만다. 하루를 소중하게, 가족처럼 가까운 사람을 위할 줄 알며. 그렇게 잘 살 수 있게 된다.
그러니 큰일이 다가와서 주저앉게 되더라도 마냥 슬퍼해하지 말기를. 자기에게 다가오는 메시지에 힘입어 살아보자. 큰 고비를 넘고 나면 부엌 옆 책장에 꽂힌 책 제목이 떠오른다. 엄마가 모은 책들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