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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자라 Feb 18. 2023

코로나는 전쟁이다

중증 장애인 동생을 둔 누나의 코로나 분투기

우리 가족에게 코로나는 전시상황과 다름없었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 생존의 문제였다.



코로나는 전쟁이다


우리 가족은 코로나 시절 내내 남들보다 큰 불안을 안고 살았다. 가족 중 누군가가 코로나에 걸린다면, 특히 거실에서 함께 생활하는 엄마와 내가 걸린다면, 동생은 100프로 걸리는 것이다. 그럼 병원에서는 입원을 시켜줄지, 어떤 약으로 낫게 할지, 폐렴으로 악화되면 열이 나고 경기도 할 텐데 나쁜 일이 벌어지진 않을지. 걱정이 많았다.


코로나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완벽히 막을 수도 없었기에 우리 가족이 최대한 조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는 물을 수 있다. "백신 맞으면 되지 않나요?"라고. 사실 동생에게 백신을 맞히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동생은 의사소통이 안 되기 때문에 아플 때에도 원인을 찾기가 힘든데, 나타나는 증상에 따라 가족끼리 추측할 뿐이다. 그런 아이에게 백신을 맞히기엔 리스크가 너무 컸다. 담당 교수님도 권하지 않았다.



코로나로부터 멀어지기


나는 등하교 시에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차를 태워주시거나 부득이한 경우에는 택시를 탔다. 가족 외식은 3년 동안 한 번도 없었고, 최근 1년 사이쯤 되어서야 어머니랑 외식도 가끔 한다. 

코로나가 대부분에게 위험했을 때는 배달음식으로 버텼다. 손에 장갑을 끼고, 배달원이 이미 두고 갔지만 마스크까지 낀 채로 음식을 들였다. 비닐장갑에 다시 소독약을 뿌리고, 걸어두고, 비닐은 바로 베란다에서 분리수거를 하는 게 눈 감은 채 가능할 때까지 그렇게 지냈다.



전쟁통에도 웃음은 산다


그렇다고 "항상 불안하고 우울하기만 했나요?"라고 묻는다면, 당연 그렇지 않았다. 


백신을 맞고 대면수업을 하기 시작했을 때다. 나는 코로나 덕에 성인이 되어서도 엄마가 싸주는 도시락을 먹었다. 차에서 이동하면서 먹은 끼니는 생각보다 다채로웠고, 맛도 좋았다. 끝내 차의 꿀렁거림에 몸을 편히 맡기진 못했지만. 비빔밥, 냉동만두, 된장국과 소시지부침, 오이무침, 김밥, 김치볶음밥, 계란말이, 간장게장밥, 떡갈비 등 메뉴도 다양했다. 내가 코로나 걱정 없이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밥. 전쟁 속에 피어나는 기쁨은 이런 사소한 끼니도 충만하게 보도록 만드는 걸까?

엄마는 참 대단하다. 예민하고 소심한 내가 식당에서 혼자 밥도 못 먹을까 봐, 동생한테 옮길까 봐 걱정하는 줄을 알고, 3시간 자고 눈을 비비며 일어나 도시락을 싸주셨다. 고3도 아니고 대학생을 위해서. 엄마는 자기도 도시락 까먹는 재미가 있다며 괜찮다고 했다. 마무리 멘트마저 완벽한 이기적인 엄마다.



코로나 때문에 오빠랑 다툰 썰


철저히 내향인 엄마, 나와는 다르게 아빠와 오빠는 외향적이다. 누군가를 늘 만나러 나가고, 집에도 늦게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아빠는 일을 한다 치지만, 내가 보기에 오빠는 '이유 없이'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 같다. 어제 본 친구를 오늘 또 본다는 오빠를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어느 날 밤에 오빠가 또 동네 친구를 만난다고 옷을 입고 나오는 게 아닌가. 거실에 있던 나는 오빠한테 왜 나가냐고, 쭈니 걱정도 안 되냐고 쏘아붙였다. 오빠는 "조심할게~"라고 말했지만, 나는 '꼭 나가야 하는지'가 이해가 안 돼 계속 대립했다. 

나는 결국 엉엉 울고 말았다. 동생이 잘못되면 어떡하냐는 얘기로까지 흘러갔다. 그때 나는 진심으로 그런 걱정을 했다. 엄마와 아빠가 죽을 둥 살 둥 해서 키워낸 아이가 고작 코로나에 스러진다면? 나는 살아갈 힘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날 쌓였던 걱정을 쏟아낸 것 같다. 하필 오빠에게. 오빠는 무척 당황스러웠을 거다. 다행히 순한 오빠는 화도 내지 않고 날 달래주었다.


하지만 오빠는 내가 운 그날도 나갔다. 뒤통수를 확 갈겨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웃긴 건, 우리 집에서 오빠가 제일 늦게까지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더 할 말이 없다. 정말 조심했나 보다.



이제 와서, 괜찮아


지금은 동생도, 우리 가족도 모두 코로나를 한 번씩 앓고 지나갔으니 웃으며 얘기할 수 있지만, 백신이 나오기 전에는 학교도 못 나가고 정말 상황이 심각했다. 폐렴으로 중환자실에서 생사를 오갔던 동생이 생각나 나는 그때가 전쟁 속인 것같이 떨었다. 정말 무서웠다.


잘 지나갈 수 있었음에 감사하다. 그 속에서 우리 가족만 겪을 수 있었던 재미와 행복도 있었고, 나가지 않음으로 인해 집에서 할 수 있는 많은 일을 발견했고, 나가기 싫을 때 억지로 핑계를 대지 않아도 되었으니. 

집에 투병생활을 하는 분이 있다면, 가족들은 아마 살아가면서 일상에 집중하게 될 거다. 하루를 잘 보내는 것이 그들에겐 최대 과제다. 과거와 미래를 고민하지 말고 그렇게 살아가시면 좋은 일도 졸졸 따라온다.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는 분들이 그리 많지는 않다. 여러분은 귀중한 데에 시간을 쏟고 있다고 생각하셔도 된다.


세상엔 '생각보다 괜찮은' 일이 많은 것 같다. 그게 나를 벌벌 떨게 했던 일이었대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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