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호흡증 경기로 실려간 동생, 중환자실 입원 기록
동생이 경기를 멈추지 않았다. 원래 희귀 난치성 질환을 앓고 있고 무호흡증 경기를 하는 아이지만, 이번엔 여느 때와 달랐다. 집에서 놓을 수 있는 자가 주사의 최대치를 맞고도 멎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파르르르…’를 넘어 ‘꾸욱…꾹’ 접히는 동생 손을 보며 내 심장도 빠르게 뛰고 있었다. 무서웠다. 나는 강제로 꺾여가는 동생의 손을 잡고 “쭌아…쭌아…” 부르고만 있었다. 아빠가 119를 부르고 상황 설명을 하는 사이에 정신이 좀 들었다. 정신이 맑아졌다는 게 아니라, 현 상황을 자각하게 되었다. “또 병원에 가야만 하는구나..”
119 구조대원분들은 금방 도착했다. 들것에 동생을 얹고, 몸을 일으켜 세워 엘리베이터를 타는 동안에도 동생은 계속 파르르 떨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힘이 자기를 제압하는 게 얼마나 무서울까’ 아무것도 못하는 나를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코로나 시절이라 엄마만 동행해서 병원으로 갔다. 거실에 넓게 펼쳐진 이불 위에는 동생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이불 위를 차가운 소독제로 덮고, 구조대원들이 밟고 지나간 자리를 물티슈로 닦았다. 아빠와 나는 말없이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의 연락만을 기다리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몇 시간 후 엄마에게서 연락이 왔다. 경기를 멈추기 위해서 센 약을 투여하고 있으나 아직 멈추지 않는다고 했다. 코로나 때문에 방호복과 페이스실드를 착용한 엄마를 사진으로 마주했다. 엄마의 낯선 모습에 울컥, 병원에 가서도 계속 떨고 있는 동생 생각에 또 울컥했다. ‘도대체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왜 아무것도 못 하는가.’ 동생은 코로나 전에 1번, 코로나 이후 3번이나 응급실에 실려 갔다. 첫 번째는 폐렴이 원인이었고, 중환자실에 11박 12일이나 있었다. 두 번째도 역시 폐렴, 중환자실에 9박 10일 있었고, 세 번째는 딱히 원인을 찾지 못했고 증상도 경미해서 일반 병실에서 경기만 멈추게 한 뒤 퇴원했다. 이번이 4번째였다.
동생의 경기는 다음 날이 되어도 잡히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산소 포화도가 떨어지니 중환자실로 가야 한다고 했다. 엄마는 코로나로 면회가 안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손을 많이 탄 동생이 중환자실에 간다는 건, 우리가 동생을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맨날 말 걸어주고, 볼과 귀를 쓰다듬어주고, 안아서 둥실둥실해주던 사람들이 없으니 말이다. 심지어 면회가 안 되니 더 외로울 것 같았다. 동생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동생이 불쌍했다. 코로나 전에 입원했을 땐 중환자실 면회가 가능해서 가족이 돌아가며 면회를 다녀왔었다. 그때 동생의 모습이 정말 안쓰러웠다. 몸은 얼음장같이 차고, 의사 표현도 못 하는 아이가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는 듯한 얼굴에, 인기척이 나면 이번엔 또 자기 몸에 뭘 할까 무서워하는 듯한 표정… 나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불안해하는 동생의 얼굴을. 그때 생각이 많이 났다. 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동생 생각을 한참 하는데 “띵동-” 벨이 울렸다. 무슨 택배인가 싶어 나가 봤더니, 며칠 전 신협 이벤트에서 당첨된 어부바 저금통이 왔다. 처음으로 이벤트에 당첨됐다고 엄청 기뻐했었는데, 그 사이에 동생이 입원하다 보니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택배를 보자마자 동생이 금방 나아 돌아올 것을 확신했다. 사람 인생에는 논리적으로 풀 수 없는 기운 같은 게 있지 않은가. 어부바 저금통은 엄마 돼지 한 마리가 등에 아기 돼지 세 마리를 업고 있는 모양인데, 우리 집이 딱 삼 남매다. 광고를 볼 때마다 우리 집 같다고 엄마한테 얘기했었는데, 마침 침울한 이때 저금통이 배송되다니! 이건 분명 좋은 신호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매일매일 막내 돼지를 쓰다듬으며 “쭌아, 빨리 집에 와.”, “쭌아, 옆에 누나 팔 꼭 붙잡고 있어.”라고 말해줬다. 동전도 많이 넣어두고, 오가면서 잘 지내고 있는지 물어도 보았다. 엄마는 불안할 때면 저금통을 꼭 안고 잤다.
중환자실에 간 다음 날, 동생의 경기가 멎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엄마와 나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됐구나.” 약을 많이 맞아서 경기가 멎는다고 해도 며칠은 잘 거라고 했다. 그전에도 자고 일어나서 컨디션이 돌아왔으니, 며칠이 가든 괜찮다고 했다. 이제 깨어나서 평소처럼 숨을 쉬고, 움직이고, 콧줄로 음식물을 먹고, 용변을 보면 된다. 갈 길이 구만리 같지만, 이전의 경험으로 봐서는 경기가 멈추는 것, 그리고 자가 호흡이 가능할 것. 그 두 가지만 정상적이면 일반 병실로 올 수 있었다. 고비를 넘긴 것 같아 다행이었다. 전화를 끊고 곧장 저금통의 막내 돼지에다 대고 “고생했네. 푹 자고 빨리 보자.”라며 말을 건넸다. 기분이 나아졌다. 나는 아무것도 도움이 안 되는 누나라고 생각했는데, 이벤트에 응모한 스스로가 너무나 기특했다. 이벤트에 당첨되어 행운의 상징이 집에 들어올 수 있었으니 말이다.
동생은 중환자실에 7박 8일을 있었지만, 대부분 자면서 시간을 보냈다. 깨고 나서는 호흡도 잘 되어 금방 일반 병실로 옮겼다. 며칠 동안 엄마의 간호를 받고 나서 무사히 퇴원했다. 동생의 입원은 분명 무서운 일이었고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이전 3번의 입원보다는 훨씬 마음이 평안했다. 행운의 저금통 덕에 우리 가족은 힘을 낼 수 있었다. 이 일 이후로 세상에 별거 아닌 물건이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주는 만큼 그 물건도 집에 자리를 잡는다. 누군가는 우연이다, 억지다 할지 몰라도 내가 의미를 부여하면 내게는 상징이고 기적이다. 내 마음이 편해지고 행복해진다면 과한 의미 부여도 좋다. 마음이 정돈되면 행동도 그에 맞춰 따라가게 되니까.
동생이 커가면서 앞으로 더 많이 응급실을 들락날락할지도 모르겠다. 그때마다 내가 굳건히 서 있기를 바라지만, 그것도 장담하긴 어렵다. 다만, 이번에 우리 집을 쏙 빼닮은 저금통 덕에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으니, 다음에도 의지할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한 것이라곤 동생에게 마음이 전달되기를 빌며, 힘내라고 응원하며, 저금통의 막내 돼지를 쓰다듬는 일뿐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평안을 얻었고 가족들의 불안을 덜 수 있었다. 서랍장을 지날 때마다 괜히 한 번씩 쓰다듬게 되는 저금통, 용도를 떠나 행운의 상징이 되어준 너에게 참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동생을 지켜줘서 고맙다, 돼지 저금통아!
이 글은 21년도에 좋은생각 청년이야기대상에 냈다가 떨어진 글이에요. 조금 윤문 해서 올려봅니다. 동생이 한창 병원에 들락날락하던 시기라 정말 힘들었는데, 지금은 다행히 1년 넘게 병원에 실려가는 일 없이 잘 지내고 있어요. 앞으로도 그럴 일 없길 바라며..ㅎ
혹시 누군가 입원하고 계신 분들 힘내세요. 언제든 희망은 찾아올 수 있어요. 제가 응원하겠습니다! 모두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