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상수의 겨울 (과거)
상수는 겨울이 되자 연희에게 눈썰매 타러가자, 스키 타러가자, 빙어 낚시하러 가자 등 겨울에 할 수 있는 온갖 활동들을 모두 하고 싶어했다. 상수는 1년 휴학계를 내고, 몸 편한 아르바이트를 해서 한가했고, 연희는 취업준비를 하느라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었지만 바쁘진 않았다. 하지만 아카데미 학생들이랑 조별 과제를 해야했고, 그들과 어울려서 노느라 상수를 만나는 건 일주일의 한두번 정도였다.
연희는 상수가 매일 물어보는 “내일 뭐해?”가 “나랑은 언제 놀러갈거야?”라는 말로 들려 부담이 되었고, “우리 겨울 가기 전에 눈썰매, 빙어낚시, 스키장 다 가야하는데 언제가지?”란 말이 힘겨웠다. 연희는 상수의 말에 “우리 겨울에 할 수 있는 거 지금 다하면 내년 겨울엔 뭐해? 좀 남겨두자~”라는 말로 상수를 진정시켰다. 점점 매일 1시간씩 하던 두 사람의 통화가 짧아져 10분, 5분이 되어갔다.
그러다 일이 터졌다. 상수가 또 연희의 연락만을 기다리던 밤이었다.
아카데미 학생들과 술을 마신다는 연희의 연락이 끊겼고, 새벽 2시가 다 돼서야 상수의 기다림은 끝났다. 연희가 전화를 걸어 [상수야.. 엉엉] 하며 울었다.
“흠흠 무슨 일이야? 너 어디니?” 연희를 기다리느라 잠을 안자고 있었지만 오랜시간 말을 안해 목이 잠긴 상수였다. 전화를 받자마자 연희의 우는 소리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나, 여기 몰라.. 정류장 보이는데.. 택시 불렀는데 아저씨가 막 화내 엉엉]
[아니 아가씨, 지금 뭐 어쩌자는거예요?]
격앙된 남자 목소리가 들렸고, 상수는 연희에게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이연희, 너 지금 어떤가게 보여?” 라고 말했다. [한솥 설렁탕. 엉엉] 연희는 상수 집에서 꽤 가까운 거리에서 일을 치르고 있었고, 택시를 타고 곧바로 연희가 있는 곳으로 갔다. 이렇게 술에 취할거면 연락이라도 잘 되던가, 옆에 있는 그 아저씨는 뭔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연희에게 큰일이 나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아 택시아저씨에게 빨리 가달라고 쪼며 갔다. 차로 10분 거리를 약 5분만에 도착했고, 울고 있는 연희는 상수를 보자마자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안겼고, 옆에 있는 아저씨는 어이없어 했다.
“무슨 일인가요?”
“아니 이 아가씨가 대리를 불러놓고, 차가 없대. 그럼 나는 여기 왜 온거야! 여기 온 건 돈으로 처리를 해달라. 했더니 택시를 안탔는데 어떻게 돈을 내녜!”
“상수야, 나는 콜택시 불렀어 엉엉. 근데 아저씨가 나 안태워주고, 돈을 달래잖아.”
상황은 이러했다. 어플로 택시를 부르는 건 상상도 못하던 시절, 연희는 속이 안좋아 버스에서 내렸고, 속이 괜찮아지자 근처 슈퍼마켓에 있는 사장님에게 택시를 불러달라고 했다. 연희가 술에 취해 대리기사를 불러달라고 했던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택시가 아닌 대리 기사가 왔고, 차가 없는 걸 보고 황당해 여기 온 건 돈으로 처리해달라고 하는 상황이었다. 상수는 지갑에서 현금 2만원을 꺼내 대리 기사에게 줬고, 연희와 함께 택시를 타고 상수의 집으로 왔다. 지난 여름, 카페에서 한 커플과 일어난 소동에서도 연희에게 이런 감정을 내가 느꼈던가, 라고 상수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다음날, 숙취 때문에 머리를 싸매며 일어난 연희는 상수가 아르바이트 가기 전 차려놓은 콩나물국을 먹으며 상수에게 전화를 걸어 미안하다고 사죄했다. 연희는 전화기 너머 상수의 목소리가 건조하다는 걸 느꼈지만 콩나물국을 해놓고 간 마음을 위안삼으며 자신에게 큰 실망은 안했을거라 생각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연희는 그동안 상수에게 소홀했던 자신을 반성하며 썰매장을 알아보고, 상수가 아르바이트 쉬는 월요일에 함께 가자고 했다. 상수는 취한 연희를 데리고 택시에 탔을 때 느낀 감정은 잠깐 느꼈던 찰나의 감정이라고 생각하고, 두 사람의 사이는 제자리를 찾아갔다. 썰매장을 가기 3일 전, 연희가 상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수야, 어떡하지. 나 월요일부터 출근해야할 것 같아. 어제 면접 본 곳에서 월요일부터 출근하래. 너랑 눈썰매장 가기로 했는데 어떡하지?]
상수가 아무 말 못하도록 연희가 따다다 말을 했다. 연희의 꿈은 방송작가로 오랫동안 그 꿈을 갖고, 이제 그 첫시작을 할 때였다. 상수도 그걸 알기에 “어쩔 수 없지. 잘됐다 연희야”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여자친구가 취업을 했는데 고작 눈썰매장 가지 못해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게 창피하고 후회스러워서 연희에게 ‘취업 정말 축하해! 내일 내가 맛있는 것 사줄게.’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연희의 취업으로 휴학생이던 두 사람의 관계에 변화가 생겼지만 상수는 여전히 연희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유명 예능프로그램의 막내작가로 취업한 연희는 늦은 새벽까지 일해 상수와 전화는 커녕 잠 자기도 부족해 보였고, ‘우리 내일 뭐 먹지?’가 대화의 시작이었던 두 사람은 이제 ‘우리 언제봐’로 대화를 시작했고, 끝을 맺었다. 꿈을 이룬 연희가 대단하고, 축하할 일인데 상수의 마음이 허했다. 연희를 보고 싶을 때 못 보는 허한 상수의 마음처럼 연희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러지 않을 것 같아 슬펐다.
일주일을 꼬박 일하고, 딱 하루 연희에게 쉬는 날이 생겼다. 상수는 여자친구에게 만나자는 말이 이렇게 어렵게 입이 떼어질 일인가 싶어 결심한다. 연희에게 전화를 걸었고, 연희는 자는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상수의 결심이 점점 다른 결심으로 바뀌어갈 때 연희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자다 깨서 갈라질대로 갈라진 연희의 목소리였다.
“응 연희야, 자고 있었어?”
[응.. 상수야 어떡하지.. 나 너무 피곤해. 우리 만나야하는데..]
“아니야 괜찮아. 연희야. 연희야, 우리 여기서 끝낼까? 너를 기다리는 건 항상 재밌는 일이었는데 이제는 좀 지쳐..”
[응? 갑자기? 왜그래…]
상수가 원하던 반응이 아니었다. 전화기를 뚫고서라도 상수를 만나러 와주길 바랬는데 연희는 아직 잠에 취해있었다.
“연희야, 지금 너와 나는 연애할 때가 아닌 것 같아. 끊을게.”
두 사람은 김연우의 노랫속 주인공처럼 82번 번호를 누르지 않고, 그냥 010으로 시작하는 번호로 전화를 걸어도 쉽게 걸 수 있었는데, 상수는 그 주인공들보다 연희와 더 멀어진 것 같았다. 상수는 연희에게 전화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택시와 버스 모든 교통수단을 멀리하고 그냥 걷기만 했다. 이별 버스, 이별 택시, 이별 지하철 모두 싫었다. 단지 걸었다.
상수와 연희는 그렇게 끝이 났다. 그 뒤로 연희에게 연락이 왔고, 상수도 연락을 했고 반복되었지만 결국 그들은 헤어지고 말았다. 사계절이 시작될 때 처음 만났고, 사계절이 끝날 때 헤어졌다. 누군가에겐 길고, 누군가에겐 짧은 약 1년동안 서로의 사랑의 제철에 만나 맛있게 사랑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