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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화영 Dec 22. 2020

아는 와이프가 되지 않을 것

당신은 어떤 남편, 어떤 아내인가요?

남편과 내가 소통하는 방법 중에는 ‘함께 드라마 보기’가 있다. 연애할 때에는 최신 개봉작을 모두 섭렵할 정도로 영화를 즐겨 봤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둘만의 공간이 생기면서부터는 편안한 복장과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TV 안방극장을 선호하게 됐다. 신혼 초, 우리는 좋아하는 드라마가 하는 날이면 마치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본방 사수를 위한 칼 퇴근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날도 드라마 시청을 위해 남편이 일찍 퇴근해 들어온 저녁이었을 것이다. 세 아이를 모두 재운 육아 퇴근 후, 소등한 거실에서 남편과 산더미인 빨래를 개키며 드라마 <아는 와이프(한지민, 지성 주연)>를 시청하고 있었다. 마침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인 주혁(배우 지성)이 바뀐 과거로 인해 본인만 기억하는 아내 우진(배우 한지민)을 향해 독백을 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그는 아이를 낳으면서 가사와 육아에 거칠게 변해갔던 와이프를, 그땐 미처 몰랐던 사실을 깨닫고 식탁 위에 잠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담담한 고백을 한다.



 “그때 너는 울고 싶었구나. 그때 너는 위로받고 싶었구나. 그때 너는 사무치게 외로웠구나. 나 내가 제일 힘들다고 생각했다. 내 코가 석 자라고. 그러니 네 몫은 네가 감당하라고 알아도 모르는 척 너를 외면했다. 네가 괴물이 된 게 아니라, 내가 널 괴물로 만든 거였어. 정말 미안하다 우진아..”



가슴이 먹먹해 지던 찰나에 나는 외쳤다.

 “아, 근데 여기서 잠깐! 괴물은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여보 눈에도 내가 괴물처럼 보여?”

 “괴물은 무슨 괴물이야.. 아니야 아~ 그런데 저 말이 참 그렇네.. 쩝”

남편이 말한 참 그런 말은 다음 날 아침까지도 진한 여운을 줬나 보다. 한동안 남편은 저 대사에 빠져 며칠을 헤어 나오지 못했다. 아마도 철없고 순수했던 와이프가 아들 셋이 태어나고부터는 하루가 멀다 하고 목청이 커지면서 순식간에 변하는 모습이 착잡하게 느껴졌나 보다. 한편으로는, ‘일찍 올게’라는 희망고문을 남기고 출근하는 남편에게 독박 육아로 매일 힘들다고 투덜거렸었는데, 홀로 나가 일하는 그 역시 가장이라는 무게에 짓눌려 힘들고 외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되짚어보게 됐다. 서로를 돌볼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는 각자의 바쁜 일상에 치여 우리는 둘 다 외롭게 고립되고 있던 것은 아닐까.

내 마음이 착잡했던 드라마 장면은 육아에 지친 우진이가 야근으로 늦게 귀가한 주혁에게 꽃게 집 개발을 던지는 장면이었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포효하는 모습에 내 모습이 오버랩되어 안쓰러웠다. 몰래카메라로 찍은 나를 들여다보듯 낯이 뜨거웠다. 나도 모르게 속으로 ‘내가 저런 모습이었구나...’라고 나직이 외쳤다. 그리고는 나도 모르게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묵직해진 목구멍과 함께 눈가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엄마로 변해가는 과정 중 육아와 가사에 악다구니를 쓰면서 성격도, 감성도, 말투도 자꾸만 다른 사람으로 변해가는 모습이 사람들이 보기에, 남편이 보기에 괴물로 비치는 내 모습이 참 애닮 팠다.


미디어나 인터넷에서 자극적으로 표현하는 용어들, 괴물이라든가 특히 맘충과 같은 단어를 발견하면 나도 모르게 욱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게 말이야, 방귀야! 너희 엄마도 맘충이라고 부를 수 있겠냐!’고. 한번 형성된 자극적인 단어는 수위를 가리지 않고 요즘 젊은 엄마들이 모두 맘충인 것 마냥 사소한 이슈에도 득달같이 붙여댄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한 채 합성어가 주는 내뱉는 유희에 여기저기 쓰인다. 가끔은 정기적으로 인터넷 용어 중 수위 조절이 불가한 단어들을 모두 긁어서 해당 용어가 쓰인 기록을 한 번에 삭제 폐기해 버리는 프로그램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야근 공화국인 우리나라의 근로 환경 상 저녁 시간을 온전히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는 부모는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 집의 경우 외벌이 남편을 제외하고 보내는 주중 저녁식사가 일반적인 풍경이다. 그로 인해 육아를 비롯한 가사는 오롯이 내 몫이다. 아이를 키우려면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는데 마을을 잃어버린 엄마는 매일 세 아이와 고군분투하며 하루를 연명해간다.

실사에 버금가는 내 모습을 드라마로 확인하고 나니 생각이 많아졌다. 외면하고 지우고 싶은 그냥 좀 아는 와이프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에게 특별했던 나로 돌아갈 것인가. 육아와 가사에 치여 여기저기 생채기가 난 상태로 근근이 버티는 지겨운 하루를 연명해 가기에 아직 인생은 길지 않은가.



*첫 책 <엄마이지만 나로 살기로 했습니다(21세기북스/2020.12.9 출간)>가 나왔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책 정보 바로 가기:

교보문고 https://bit.ly/2K7ymSB

예스24 https://bit.ly/3qDoVLk

알라딘 https://bit.ly/3qQYFNM

인터파크 https://bit.ly/3oCvCv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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