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더하기 상상

Chapter 1.

by iAliceblue

요즘 같이 일하는 민약사에게 큰일이 생겼다. 그래서 하루는 기분이 좋아서 열심히 일했다가 하루는 정신 넋빠진 사람처럼 실수가 잦아 같이 일하기 힘든 날이 되곤 한다. 그 큰일이라는 게 무엇이냐면 바로 그녀의 '결혼' 여부이다. 결혼이라는 것에 있어 적절한 시기란 사회에서 통념되는 관습적인 기준일 뿐이니 그 '시기'에 얽매일 필요는 없지만 마흔이라는 나이가 '결혼'을 하기에 누군가를 쉽게 만날 기회가 자주 주어지지 않는 나이임은 확실하다. 그래서 그녀는 상대를 예전 맞선 상대 중 가장 아쉬웠던 사람을 골라보기로 한 모양이다.

어느 날, 예전 맞선 상대와 연락이 닿았다며 다시 만나볼까 한다고 하더니, 그 남자와 연락이 잘된 다음날은 기분이 몹시 좋은지 일도 잘 도와주고 즐겁게 일하다가 그렇지 않은 다음날은 종일 핸드폰만 들여다보며 혼이 나간 사람처럼 정신 없게 만들었다. 물론 일을 하다 보면 개인적인 일이 직장에 여파를 미칠 때도 있지만 그것을 너무 당연하게 아무렇지 않은 듯 조금의 미안함도 없는 태도는 썩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진짜 너무 티나지 않아요?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민폐잖아요T-T

-그러니까... T-T 미치겠다 T-T 너무 정신 없게 만드네...

신은 조제실에서 조용히 같이 상황을 지켜보던 정은에게 문자를 보내 답답함을 토로했다.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마터면 처방전을 잃어버릴 뻔 한데다 처방전과는 다른 약이 나갈 뻔했다. 그런데도 같이 일하는 사람에게는 전혀 미안함 없이 손님에게만 의례적인 죄송하다는 말만 곱씹을 뿐이다.

"약사님, 그 선본 남자는 언제 만나기로 했어요? 곧 보나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하루 종일 별말 없이 조용히 실수연발 중인 민약사에게 신은 말을 건네 보았다. 어떤 말이라도 건네 상황을 알아보고 그녀의 결혼 여부가 빨리 확실해졌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저렇게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면 결혼상대에게 원하는 것들 중 몇몇은 체념하고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최소한의 기준에 맞춰 누군가를 만나 결혼하면 되지 않았을까? '약사'라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가. 한국 사람들이 '사'자 직업에 목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지만 '사회적 지위'니 하는 말을 운운할 만큼 집안이 대단한 것도 아니고 물려받은 재산이 많은 것도 아니고 사회적 인지도가 있는 알려진 사람도 아니면서, 대체 그녀의 '사회적 지위'에 맞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는 말일까. 신은 살짝 어이가 없었다.

"모르겠어요. 곧 만나러 가려고 비행기표 예약하려 언제쯤 시간이 괜찮겠느냐 문자를 남겼는데 아직 답이 없네요."

아... 초조한 마음에 일본까지 가보려고 했는데 남자가 답이 없었군. 정말 되게 다급했나보다. 며칠 전 신이 먼저 만나러 가보면 어떠냐 했더니, 자존심 없어 보이지 않냐며 그건 좀 아닌 것 같다고 하길래 신은 이렇게 말했었다.

"자존심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는 게 진짜 자존심인 거죠. 그런 자존심은 자존심이 아니니까 먼저 만나러 가도 될 것 같은데..."

"멋진 말이네요."

신의 말 때문이었는지 어쨌는지 결국은 조급함이 자존심을 이긴 모양이다. 그렇게 자존심을 버렸는데도 남자가 답이 없으니, 시무록한 걸 떠나 왜 기분이 별로인 얼굴이었는지 이해가 된다.

"답답하겠어요... 되게 바쁜 사람인가 봐요?"

어쨌거나 신은 대충 민약사의 기분을 맞춰주며 말을 붙였다.

-역시, 연락이 안 되서 저렇게 핸드폰에 목매고 있었던 거네요T-T 제발 좀 빨리 만나주지.. T-T

-T-T 그러게... 이러다 우리가 죽겠다T-T

정은도 상황파악이 됐는지 신의 문자에 깊이 공감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신이씨는 어떤 남자가 좋아요? 나는 아직 외모는 포기가 안 되던데... 같이 다니기 부끄럽잖아요."

대화라도 하며 기분이 좀 나아질 것 같았는지 민약사는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그래, 대화라도 같이 해주면 일하기 덜 피곤할 것 같기는 하다.

"키 크고, 잘생기고 멋있으면 관상용으로는 좋을 것 같아요. 보기에도 흐뭇하고. 근데 그건 그냥 말 그대로 관상용이고 딱히 기준이 없는데 자기 일 열심히 하는 사람이면 좋은 것 같아요. 자기 일이라는 게 직업이 대단하거나 사회적 지위가 있는 그런 거 아니더라도, 정말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도 성실하게 책임감 있게 하는 모습이 멋져 보이거든요. 나는 키가 나만한 사람도 만나 봤어요."

"신이씨랑 키가 비슷했다고요?"

민약사는 정말 놀란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은 겨우 155센티미터가 될까말까한 키였던 것이다. 그녀의 놀란 표정에 신은 웃었다.

"네! 근데 난 외모를 크게 신경 안 써서요. 내가 만나는 사람이 내 허영심을 채워주기 위한 들러리는 아니잖아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지. 그리고 사람들이 내가 아깝다고 생각해줄지도 모르죠"

마지막 말은 백퍼센트 농담이었지만 민약사는 진심으로 들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신은 개의치 않았다. 그랬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연락을 주고 받던 그녀의 구남친은 정말 신과 키가 비슷했다. 전혀 잘 생겼던 것도 아니고 볼록한 뱃살에 동글동글한 얼굴, 그냥 누가 봐도 부담스럽지 않은 편한 모습이었다. 평소 신이 좋아하던 공룡상에 다부진 몸, 큰 키도 아니었지만 어쩐지 자꾸 시선이 가고 열성적으로 자기 일을 하는 모습이 멋있었다. 그리고 외모는 두드러지지 않지만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성격이니 한눈 팔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근데 괜찮은 외모의 사람도 만나 봤지만, 잘생겼든 못생겼든, 한눈 파는 건 똑같더라고요."

"그건 그렇죠."

신의 말에 동의하며 민약사가 웃자 신도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러나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마음은 9기압으로 추출한 에스프레소 열 잔을 연거푸 마신 것처럼 지독히 썼다.


가장 진실은, 신이 남자를 보는 절대적인 기준은 딱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절대 한눈 팔지 않을, 신뢰와 의리가 굳건한 사람.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어제, 오늘, 내일이 다르고 '사랑'이라는 감정은 더욱 변덕스러워 스치는 바람에도 쉽게 흔들리는 것이라지만 신뢰와 의리로 서로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앞으로의 많은 날들을 처음 시작한 그날처럼 서로 존경하고 존중하며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다. 이 절대적인 기준은 지옥같던 그녀의 유년시절에 유일한 희망이었지만, 어른이 된 지금은 결코 닿을 수 없을 거라는 걸 깨닫고 마음 속 깊은 곳에 꼭꼭 숨겨둔 '소원'이다.

결혼을 한다해도 법적으로 부도덕한 한눈을 팔고 다니는데 자유로운 연애에 있어 한눈을 파는 건 당연한 상식인 모양이다. 물론 안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신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극복하지 못할 부정적인 케이스를 살아오는 내내 보아와서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보였다. 그런데도 왜 안 버려지는 걸까. 왜 버리지 못해서 아닌 척 혼자만 숨겨두고 있을까. 그 '소원'을. 마치 누군가 한 사람쯤은 알아채주길 미련하게 바라면서. 그런 자신이 바보같고, 또 너무 미련스럽게 구질구질하게 느껴져서 싫었다. 그럼에도 지독하게 버려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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