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더하기 상상

Chapter 1.

by iAliceblue



겨울이 막바지에 이르러 그런지 감기에 걸려온 손님들이 많았다. 어느 정도 익숙해진 신은 간단한 약들은 한눈에 확인이 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단지 한꺼번에 사람들이 들이닥치면 요구사항도 많고 쓸데없는 말을 시키며 정신없게 만드는 게 문제면 문제랄까. 특히 나이가 지긋한 손님들이 때때로 말도 안 되는 어깃장을 부리고는 한다. 가령, 병원에서 처방 받아야만 제공 가능한 약을 팔라고 우기거나, 장터도 아닌 약국에서 가격흥정을 시도하며 약값을 깎아달달라고 하는 경우들이 그렇다. 나이를 먹으면 다들 저렇게 뻔뻔해지고 부끄러움이나 예의도 사라지는 건가 싶다. 나이가 벼슬도 아닌데 아무리 손아랫사람이라 한들 하대하며 막무가내인 요구를 스스럼없이 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이지 저렇게 나이 먹고 싶지 않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나이만 많으면 존경이라는 것이 거저 얻어지는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하루 일과는 뻔했다. 십 삼년의 경력을 버리고 직종을 바꿔봤지만, 어떤 일을 하든 손에 익으면 뻔해지는 건가 보다. 가끔은 그만둔 일이 생각날 때가 있다. 활자 가득한, 막 출간된 신간 서적들이 그리울 때도 있다. 지루함 없이 신의 흥미를 끄는 일은 새로운 정보가 가득한 활자들을 읽어내려가는 일이었다. 알지 못했던 상식들, 배우지 못한 다른 분야의 지식들로 빼곡한 활자들은 언제나 그녀를 설레게 했다. 요즘은 경제적이고 휴대성 좋은 전자책을 많이 읽는다고는 하지만, 신은 하얀 종이 위에 인쇄된 활자들을 읽는 것이 가장 좋았다. 책을 읽다 마음에 와닿는 문장이 있으면 그 문장을 손으로 매만진다. 그때, 손에 느껴지는 활자의 촉각이 어떤 느낌이 드냐면 흰종이에 인쇄된 활자들처럼, 꼭 그 문장이 마음에 깊게 각인되는 기분이다. 절대 잊혀지지 않고 문득 생각날 때마다 들여다 보고 또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마음 속 어딘가에 똑같이 새겨지는 그런 기분. 종이를 넘기는 기분도 더없이 좋다. 한장, 한장, 숨을 고르며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천천히 한걸음씩 걸어가는 기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활자들이 죽은 듯한 전자책은 어쩐지 전혀 책을 읽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요즘은 어떤 책들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고작 넉달 정도 지났을 뿐인데 세상에서 한참은 멀어진 느낌이다. 그래서일까. 이 알 수 없는 답답함은 닫힌 세상에 갇힌 기분이다. 신은 점심 휴식 전, 마지막 처방전을 정리하며 핸드폰으로 새로 나온 책을 검색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약국 안으로 찬공기가 밀려들자 우울해졌다. 이제 한숨 돌리고 쉬려고 했는데, 뭐하다 이제서야 처방전을 들고 오냐고...

"어서오세요.”

시무룩하게 건성으로 인사하며 신은 일하는 척 컴퓨터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팔을 뻗어 처방전을 달라고 손짓했다.

"성함이...?"

처방전 대신 이상한 말이 돌아오자 신은 그제야 시선을 들어 앞을 바라보고는 놀라 눈이 둥그래졌다. 우편물을 배달온 우체국 직원이었던 것이다.

"아... 윤신."

흰편인 피부에 속쌍거풀진 말간 눈에 잘생긴 건 아니지만, 이미지가 어느 연예인을 닮은 느낌의 괜찮은 정도의 남자. 물론 취업난인 시기에 계약직인지, 정규직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약국장의 말로는 '잘생겼다'고 한다. 신이 보기에 약국장은 같은 남자라 그런지 여자가 잘생겼다고 하는 기준과는 어딘지 다른 것 같지만 말이다. 잘 생긴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뭐, 반듯해 보이는 게 어디가서 차이고 다닐 인물은 또 아닌 듯하다. 이렇든, 저렇든 심심한 와중에 재미삼아 주고받는 대화들이지 사실, 우체국 직원에게 관심이 있을 리 없다.

"네, 감사합니다."

우체국 직원에게서 우편물을 건네받고 웃으며 인사하곤 신은 다시 자기 일에 집중했다. 고개 숙인 이마 언저리로 그 남자의 시선이 느껴진 것도 같았지만 그게 무슨 별일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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