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았어요"에 두 글자가 더 추가되면 "듣기 싫다" 혹은 "잔소리 좀 그만하라"는 의미가 된다. 훈제고기, 베이컨, 소시지, 통조림에 넣은 햄을 사랑하는 우리 아이들과 요즘 식단 전쟁을 벌이고 있다. 간호사 엄마는 질병관리청 혹은 맛도 모르는 사람들과 한 편이고, 아이들은 가공식품 회사 혹은 맛을 아는 사람들과 한 편이다. 아이들이 클수록 고집이 세지고, 집에서 먹이지 않던 것을 밖에서 먹고 오기 시작하면서, 엄마가 고수했던 식이 원칙이 흔들리고 있다. 드디어 엄마가 단순히 '잔소리'를 하는 것이 아님을, 과학적인 근거로 증명해 보일 때가 된 것이다.
2018년 세계 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 WHO) 산하 기구인 국제암연구소(International Agency for Research on Cancer, IARC)는 인체에 암을 유발하는 요인에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평가하여 100권이 넘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얼마나 토가 나오는 분량인지, 이 중에 우리나라 기관이 번역하여 홈페이지에 탑재한 것은 단 몇 권이다.
이 연구소는 '발암요인'을 면밀히 평가하기 위해서 과학적으로 연구한 보고서들을 살펴보고, 해당 분야 전문가들과 논의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 결과 현존하는 '발암요인'을 1군, 2A군, 2B군, 3군, 4군의 다섯 가지 그룹으로 정리하여,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저널인 'Lancet'에 발표했다. 이 저널이 어지간히 훌륭한 연구가 아니고서는 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이거야말로 우리 아이들을 설득할 근거로 충분하다며 흡족해했다.
'1군 발암요인'은 인간에게 암을 유발하는 것이 확실하다고 인정되는 요인으로, 자그마치 120가지나 된다. 엄마와 아들의 식단 전쟁에 불을 댕긴 문제의 주인공, '가공육'은 애석하게도 '소금에 절인 생선', '담배', '술', '대기오염' 등과 함께 당당히 1군에 이름을 올렸다.
물론 암이 발생하는데 요인이 단 한 가지인 경우는 드물다.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그리고 얼마나 많은 통조림 햄이나 베이컨을 먹었는지, 가공육 섭취 이외에도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거나 배기가스가 다량 배출되는 도로변에서 살았는지, 암에 걸린 가족은 없는지, 여타의 발암 유전자를 타고났는지를 다 따져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나는 그렇게 이성적이거나 과학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다. 나와 가족, 친구, 이웃에게 해가 될 수 있다면, 단 하나의 가능성, 0.1%의 확률이라도 피하고 싶다. 더구나 그 가능성이 무엇인지 그 실체를 알게 되었다면 그것과 멀어지려고 사력을 다할 것이다.
신문을 안 사다 봐서 그랬는지, 이런 소식을 '한국건강증진협회 교육' 외에 다른 곳에서 들은 기억이 없다. 또다시 나의 의심증을 자가 치료하기 위해서, 인터넷 기사 검색에 열을 올렸다. 몇몇 기사들은 기껏 IARC의 연구 결과를 인용해 놓고, 어떻게 하면 가공육을 '안전하게' 섭취할 수 있는지까지 곁들여 알려주었다.
가공육을 물에 끓이거나 파프리카를 곁들여 먹으면 '1군'에서 '3군'쯤으로 위험도가 낮아진다는 건지, 가공육을 태워먹으면 '1군'에서 '1+++군'쯤 되므로 그거라도 조심하라는 건지, 도통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다. Lancet 할아버지도 울고 갈 이야기였다. 어떻게 하면 폐암에 이환되지 않도록 담배를 안전하게 피울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석면으로 건물을 지어도 그 건물 안에서 암에 안 걸리게 숨을 쉴 수 있는지도 기사로 나와 있겠네, 기가 막혔다.
아니나 다를까, 어떻게 하면 건강을 덜 해치면서 술을 마실 수 있는지 알려주는, 아주 매력적인 기사도 있었다. '소량의 음주는 낮은 심혈관질환 발생률과 관계가 있으나, 그로 인한 이득이 구강, 인두, 후두, 식도, 간, 대장, 여성 유방의 암 발생률을 높이는 위험을 상회하지 못한다'는 연구**가 2018년 발표되어 학계가 술렁인 후였는데 말이다. 음주가 심혈관 질환 발생을 낮추는 효과는 일부에 국한되며, 암에 걸릴 가능성은 음주에 정비례하여 증가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건강 캠페인을 열 때마다 '적정량의 음주를 하면 건강을 해치지 않는다, 절주 하자'라고 부르짖었는데 그게 과학적 근거가 없는 얘기였다는 거다.
음주가 '1군 발암요인'이라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화가 난 사람은 많지 않았나 보다. 그 당시 나는 병원을 벗어나 의료인이 아닌 분들과 함께 일하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모른다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술을 못 마신다. 그 근거는 'Lancet'에 실린 아주 수준 높은 연구다. 유방암으로 죽고 싶지 않아서, 기꺼이 회식자리에서 물 많이 마시고 취해 주겠노라'고 공언했다. 와인과 과실주를 항상 쟁여 놓고, 취기가 올랐다가 말짱히 깨는 재미, 친한 사람들과 하하 호호하는 분위기가 좋아 즐겼던, 나의 행복했던 음주 역사가 이렇게 막을 내렸다.
분명히 국가기관이 호들갑스럽게 보도자료를 냈을 것이고, 웬일로 조용한 언론을 보다가 지쳐서,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어느 홈페이지 한 편에라도 증거자료를 게시하는 것으로 나름의 최선을 다 하는 동안, 가공육과 술에 대한 획기적인 사실은 허망하게 잊혀 갔다. 가공육이 1군 발암요인이라는 과학적 사실은 식품안전보건법의 '긴급대응, 생산, 판매 등의 금지' 조항에는 해당되지 않았나 보다.
담배는, 세계적인 연구기관에서 "자그마치 19가지 암을 유발하는 1군 발암요인이라구요"라고 전 세계에 고발을 해 대도, 절찬리에 팔리고 있지 않나. 우리는 담배, 술, 가공육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콩깍지가 씐 상태일지도 모르겠다. 그 사랑이 과학을 능가하는 믿음을 이끌어 낸 건가 싶다. 그 사랑에 배신당할까 봐 먼저 '손절'한 나는 참말로 외롭다. 이제 더 이상 그 맛을 즐길 수도 없고, 내 아이들을 구하려면 혼자 싸워야 할 것 같아 막막하다. 엊그제 발표된 중앙일보 기사 한 편이 외로움을 달래 줄 뿐이다. 그래도 아직 너무 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