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바르트와 하느님 - 밀란 쿤데라
삶의 진정성 - 공너싫
“그는 늘 진지한 것과 진지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려 노력했는데, 교사직은 진지하지 않은 것의 범주에 분류했지요. ...의무적인 것이 진지하지 않은 것이라면, 진지한 것은 아마 선택적인 것일 테지요.” (p.299 ~ 300). 우리에게는 특히 신경을 쓰거나 열심히 하는 진지한 분야가 있다. 에드바르트에게 진지한 것은 사랑이었다. 에드바르트의 사랑은 육체적인 집착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은 본인이 직접 선택한 것이고, 그것은 더 이상 육체적인 무언가를 넘어선다고 언급했다. 그 외에도 알리체는 종교를, 교장은 이데올로기를 가장 진지하게 생각했다.
에드바르트는 이데올로기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교장을 불쌍하게 생각했다. “내 삶보다 더 큰 무언가를 위해서 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나는 아마 살아갈 수 없을 거예요. ... 씁쓸한 미소가 교장 얼굴에 드리웠고 에드바르트는 그녀가 거의 불쌍해졌어요.” (p.323). 또한 알리체가 종교를 믿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고, 그녀는 계명을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한다고 비난했다.“옛 혁명의 신봉자들이 상실감을 느끼고 초조하게 대체 전선을 찾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종교 덕분에 그들은 다시금 좋은 쪽에 서 있을 수 있고...” (p.304). 그리고 결국엔 본인이 진지하게 생각하던 사랑마저 하찮은 것이라고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우연과 오류로 이루어진, 진지함도 의미도 없는 그 사랑은 웃음거리밖에 안 되는 하찮은 것이었음을 서글프게 깨달았습니다.” (p.347).
에드바르트는 결국 자신의 인생에서 그 어느 것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에드바르트는 잘못된 것일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 한 분야를 진지하게 대했을 때와 그렇지 않았을 때를 비교해보자. 에드바르트의 형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 가장 진지하다고 생각했다. 교장에게도 자신의 속마음대로 솔직하게 대했고, 결국 학교에서 쫓겨났다. 에드바르트의 형이 진실을 고집하지 않고 거짓으로 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물론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좋은 직장을 구할 확률은 현재보다 늘어났을 것이다. 교장의 경우엔 이데올로기를 가장 진지하게 대했다. 자신보다는 미래를 위해 열심히 교육을 해서 교장의 자리에 올랐다. 이 둘은 각자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대했지만 서로 다른 결과를 맞이한다.
어떤 것을 진지하게 대했는지가 크게 작용했을까? 진실을 추구하는 것은 잘못됐고, 이데올로기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은 좋았는가? 교장은 이후에 젊음을 갈구하며 자신이 교육해야 할 대상인 에드바르트의 앞에 알몸으로 무릎을 꿇게 된다. 알리체는 종교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스스로 단단하고 만족스러운 사람이 되었지만, 결국 신을 배신하고 에드바르트와도 헤어지게 된다. 에드바르트는 사랑을 진지하게 생각하며 직장이 위험해질 정도로 알리체에게 집중했으나, 결국엔 사랑도 하찮은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어느 것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에드바르트는 주기적으로 교장도 만나고 여자들에게도 인기를 끌게 된다.
진지하게 대한 것이 무엇이었는지와 상관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뀌어 버리거나 좋은 결과를 맞이하거나 그 반대가 되는 뒤죽박죽의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다.
무엇이 결과를 불분명하게 만들었나? 여기에 작용한 것에는 시간, 개성, 운이 있다. 이것들은 각각 개별로 적용되지 않고 모두 섞여 구분할 수 없는 형태로 우리의 삶에 작용된다. 삶에는 수많은 변수가 존재하고 항상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삶은 복잡한 것이라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왜 그런 것인지 해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같은 행동을 한 사람들도 시기가 다르면 다른 결과를 불러오고, 같은 시기에 같은 행동을 한 사람들도 다른 결과를 불러오게 된다. 한 사람이 비슷한 시기에 같은 행동을 해도 결과가 달라지기도 하고, 다른 상황에서 다른 사람이 한 행동의 결과가 같아지기도 한다.
우리가 무엇을 진지하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진지하게 대하는지는 우리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삶은 수많은 변수에 의해 계속 바뀌기 때문이다. 한 개인에게도 진지한 것은 계속 바뀐다. 게다가 진지하게 생각하는 분야는 사람들마다 다르다. 자신이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이 남에게는 웃음거리일 수 있다. 남들이 웃음거리에 열 올린다고 생각하는 만큼 그들도 똑같이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그림자가 되거나 정신병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에드바르트는 직접 선택하는 것이 진지한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의무적 이어 보이는 것도 다른 면에서 보면 선택적일 수 있다. “그런데도 그가 그렇게 한 것은, 믿어주십시오, 정말로 해야만 했기 때문이랍니다.”(p.336 ~ 337). 에드바르트는 교장의 가슴에 손을 얹을 수도, 그곳을 뛰쳐나갈 수도 있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어쩔 수 없이 정말 해야 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그곳을 뛰쳐나가고 나서 겪게 될 후폭풍이 더 두려웠을 지도 모른다. 진지한 것과 아닌 것은 의무적인 것과 선택한 것으로 분류되기에는 적절치 않다. 더군다나 삶을 진지하게 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그리고 무엇을 진지하게 볼 것인지는 모두 자신의 선택이다. 그 선택은 본인이 주체적으로 고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이든, 설령 아무것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선택이라도 진지한 것이 된다.
우리는 아직 젊기 때문에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계속 변화한다. “그 아름다운 몸을 자기 자신이 의도적으로 쫓아내 버렸다고 생각하자 자신이 멍청한 놈이라 여겨졌고 자기 뺨을 때리고 싶어졌답니다. 그러나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 이제 달리 바꿀 도리는 없었습니다.” (p.350). 우리에게는 앞으로도 수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분야는 수도 없이 바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은 언젠간 과거가 되고 잊힐 수도, 잊히지 않을 수도 있다.
어느 것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했던 에드바르트는 잘못된 것일까? 에드바르트는 젊고, 아직 변화하는 인생의 중간에 있을 뿐이다. 삶은 무궁무진한 진정성들과 그것을 선택할 수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율성이 주어지기 때문에 더 자유롭고 아름답다.
19. 11. 11 공너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