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한다. 푸릇하던 잎이 색을 바꾸다 어느새 떨어지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 그런 가을에 태어난 나는 어릴 때 유독 책 읽기를 좋아했다. 생일 선물로 세계 명작 전집을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읽기 시작하니 엄마는 아껴 읽으라고 했다. 같은 책을 외울 정도로 반복해서 여러 번 읽은 적도 많았다. 그렇게 읽어도 재미있었다. 가족 외출을 하고 돌아오는 길, 자동차 뒷좌석에 누워 흔들리는 차 안에서 작은 조명에 의지해 책을 읽기도 했다. 그만큼 나는 왜인지 모르게 책에 열정적인 아이였다.
그랬던 내가 점점 자라 중학생이 되었고, 어찌 보면 한창 책을 읽어야 할 청소년기에 나는 그만 책을 잃어버렸다.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책이 더는 읽히지 않았다. 눈으로 아무리 열심히 읽어도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고 마음에도 남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감정이 나를 감쌌다. 얼른 다 읽어내야 한다는 알 수 없는 조급함에 시달렸다. 그리고 책을 읽던 시간은 학원 수업을 듣고 엄청난 양의 과제를 해치우는 시간으로 바뀌어버렸다.
2-3년이 흘러 고등학생이 된 나는 책을 되찾고 싶었다. 팍팍한 고등학교 생활에서 교과과정과 무관한 독서는 일종의 일탈이자 도피이기도 했다. 그래서 실제로 몇 권은 재미있게, 때로는 고집스럽게 끝까지 읽어냈다. 그러나 그때뿐이었다. 잃어버린 책은 온전히 내 품으로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도 책을 좋아하던 내가 한순간 책을 잃어버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원인은 바로 타율(他律)이었다. 초등학생 때까지는 독서를 강요당한 적이 없었으나, 중학생이 되고부터는 생활기록부가 중요해졌고, 대학 입시가 중요해졌다. 무슨 필독서, 무슨 추천 도서 목록이라는 것도 눈앞에 들이밀어졌다. 생활기록부에 독서 내역을 기록하기 위해 책을 읽어야 하는 상황, 어떠한 책을 읽어야 대학 입시에서 유리하다는 말들. 누군가 나를 방에 가둬놓고 책을 읽으라고 강제한 적은 없었지만 그것은 일종의 폭력이었다. 독서를 온전히 내 의지로 할 수 없게 했기 때문이다. 왜, 혼자서는 잘만 하던 일도 막상 멍석 깔아주면 못하겠다고 하지 않는가.
그때부터 나는 독서 그 자체를 목적으로 독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늘 왠지 모르게 불안하고 조급했다. 단지 선생님이나 입학 사정관에게 "저 이 책 읽었어요!"라고 말하기 위해 읽다 보니 책장이 빨리 넘어가지 않으면 초조했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읽으면서도 엄청난 감명을 느끼고 대단한 변화가 있어야만 할 것 같았다.
대학에 가서도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 나는 다른 사람들이 흔히 품는 류의 대학 로망은 없었지만 독서나 공부에 대한 로망은 있었다. 정해진 것만, 필요하다는 것만 공부해야 하는 상황에서 벗어나면 널찍하고 고즈넉한 대학 도서관에 가서 다양한 분야의 책을 마음껏 읽으며 시험공부가 아닌 진짜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어라, 마음만큼 책이 읽히지 않는 현상은 계속됐다. 때로는 '나 이런 책도 읽는다'라며 스스로 과시하고 싶은 욕구 때문인지 수준에 맞지 않는 어려운 책을 골라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또다시 주어진 시험공부와 과제를 하느라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핑계'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한 번에 여러 가지에 집중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고도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다시 책을 만났다. 당시 내 상황에 맞추어 필요한 책을 샀을 뿐인데, 실로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책이 읽히는 게 아닌가. 물론 해당 책의 내용이 어렵지 않은 것도 한몫했겠으나, 나는 마치 책 자체와 화해한 것처럼 느꼈다. 한번 독서의 물꼬를 트고 나니 다시 조금씩 자신감이 붙었고 굉장히 기뻤다. 십 년 넘게 되찾지 못했던 독서를 다시 만난 기분이었다.
그 후로 나는 무엇보다 '내가 읽고 싶은가' 혹은 '나와 관련이 있고 공감할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독서를 이어오고 있다. 빨리, 많이 읽는 재주는 없다. 유명하거나 훌륭하다는 책을 그리 많이 읽어본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남의 기준이 아닌 내 기준에 맞춘 나의 독서가 언제나 즐겁기를 바란다. 어린 시절 내게 독서가 늘 그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