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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연 Mar 21. 2023

그네 타기 좋은 나이


  흐리고 푹푹 찌던 여름날, 동네 산책을 나섰다. 보통은 근처에 안 가본 곳이 거의 없어 지루한 산책을 하지만 이날은 익숙한 길에서 뻗어 나온 낯선 골목으로 들어서니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가파른 언덕, 구불구불한 도로, 아슬아슬하게 교차하는 자동차와 오토바이, 다소 그로테스크한 벽화까지.


  습기가 온몸을 휘감았지만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조금 새로운 풍경을 본 것만으로도 기뻤나 보다. 그러다 작은 동네 놀이터를 발견했다. 빨간색, 초록색 그네가 눈에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다가가던 순간, 팻말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놀이기구 사용 연령 6~13세


  팻말을 보고 순간 멈칫했다. 놀이시설의 설립 목적을 생각하면 당연한 문구이지만, 살짝 서운하고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나도 타고 싶은데...' 조금 눈치가 보였지만 놀이터에는 아무도 없었던지라 잠깐 타고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제 어느 쪽으로 가볼까 하고 놀이터에서 나와 잠시 주변 길을 둘러보았다. 주변은 이미 다 아는 길이었다.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게 나을 듯싶어 다시 놀이터로 돌아왔다.


  잠깐 자리를 뜬 사이, 놀이터에는 다른 이용객이 생겼다. 할머님 한 분이 그네를 타고 계셨다. 실례될까 싶어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그네를 타시는 모습이 여느 어린아이와 다름없이 천진해 보였다. 앞으로 뒤로 흔들리는 그네가 나풀거리는 나비 같았다. 결국 두 이용객 모두 팻말의 문구를 어긴 셈이지만 왠지 마음 한구석이 흐뭇해졌다.


  그네가 아니더라도 세상에는 연령 제한이 참 많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술과 담배다. 최근에야 알게 되었지만 PC방도 밤 10시가 되면 신분증 검사를 한다. 드라마나 영화의 연령 제한도 있다. 그렇지만 사람들에게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이렇게 법적으로 명시된 연령 제한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제시된 연령 제한이라는 생각이 든다. 스무 살이 되면 대학에 간다. 입시에 실패했다면 재수 삼수를 해서라도 20대 초반에는 대학에 간다. 대학 생활을 마치고 20대 중후반에는 취업한다. 취업하고 자리를 잡으면 결혼한다. 결혼하고 나면 아이를 낳는다. 참으로 교과서적인 루트다. 나는 동의한 적이 없는데 나를 제외한 모두가 한날한시에 모여 합의하기라도 한 것처럼 다들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똑같은 것을 요구하고, 똑같은 것을 바라며, 똑같은 것을 위해 열심히 살아간다.


  고등학생 시절 나는 대체 왜 꼭 고등학교 졸업 직후 대학에 가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는지 의문이었다. 초중고 기간에 진로를 충분히 탐색할 시간과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았는데 시험공부만 하다가 별안간 대학과 전공을 고르라니 가혹한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대학 한 번 가는 게 그리도 쉬운 일이라면, 아니, 입시가 어려운 건 제쳐두고 등록금이라도 저렴했다면 모르겠지만, 많은 시간과 노력과 돈이 들어가는 중대한 결정인데도 고민할 여유는 그다지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수많은 학생과 학부모가 결정에 들이는 시간을 줄여주기 위해서인지 대학은 대학 서열 순으로, 학과는 취업 잘 되는 인기 학과 순으로 선택하는 기현상이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 그저 자기 성적에 맞추어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대학과 '높은' 학과를 고른다. 그러다 보니 성적이 비슷한 학생들은 꿈조차 비슷해진다. 나는 입시의 끝자락에서 담임선생님께 '높은' 대학의 '낮은' 학과라도 지원해서 나중에 전과하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으나 '교육을 통한 자아실현' 같이 본래의 목적에 충실한 조언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있더라도 그 조언을 따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저 빨리, 공백 없이 단번에 좋은 대학에 합격시키는 데 모두들 혈안이 되어 있었으니까.


  '이때에는 이걸 해야 한다'라는 식의 연령 제한은 늘 우리를 초조하게 한다.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 사람은 당연히 불안에 시달리고, 해낸 사람조차 행복감이 아니라 안도감을 느낀다. 게다가 사회가 요구하는 과업이란 하나를 마치면 바로 다음 과업이 뒤따라오므로, 안도감은 잠시 머무를 뿐 금방 다시 불안감으로 바뀐다. 뒤처질까 걱정하고, 다른 사람은 어디쯤 있나 곁눈질하고, 내 앞에 선 이를 질투하고 내 뒤에 선 이에게 우월감을 느낀다. 그렇게 자기를 좀먹고 서로를 좀먹는다.


  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서 모두들 이탈하면 좋겠다. 각자 알맞은 때에 알맞은 일을 하면 좋겠다. 사람은 자기다운 모습일 때 가장 아름답다. 어떤 기준에도 시선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기 길을 묵묵히 나아가는 발걸음이 아름답다. 사회적 연령 제한 없이 각자 가장 아름답고 편안한 모습으로 살아갔으면 좋겠다. 초등학생이 노는 놀이터에서 나풀나풀 그네를 타는 할머니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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