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을 가지고 놀던 어린 시절, 인형은 내가 보지 않는 사이에 살아 움직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진짜일까 싶어 장식장 속 죽 늘어선 인형을 몰래 훔쳐본 적도 있었다. 소설 《소공녀》를 영화화한 작품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세라는 정말 자기가 없는 사이 인형이 움직이는지 보려고 방에서 나갔다가 기습적으로 문을 열어젖힌다. 물론 인형은 제자리에 그대로 있다. 그러자 세라가 말한다. "정말 재빠르네!"
나는 내가 이런 인형과 비슷하다고 느낀다. 어릴 적부터 나는 남들이 함께 있는 공간에서 늘 어색하고 뻣뻣해졌다. 뭐만 할라치면 남의 시선을 의식해 집중하기 어려웠다. 학교에서 시험이 끝나 다들 들뜨고 풀어져 있는 시기에 책을 꺼내 들면 "너 책 읽어?!", "뭐야, 공부해?"라는 말이 따라붙었다. 비교적 어릴 때 지하철에서 영어 원서 《마틸다》를 펼쳐 들었다가 주변의 시선과 수군거림을 느껴 괜스레 의식하게 되기도 했다. 물론 남들 앞에서 똑똑해 보이는 것을 무의식 중에 조금은 즐겼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쭐함보다는 불편하다는 감정이 훨씬 더 컸다. 그래서 나중에는 조금 붕 뜨는 시간에 무언가를 할까 하더라도 어차피 집중하지 못할 것 같아 그냥 가만히 앉아 시간을 죽이는 편을 택하게 되었다. 주인이 보고 있을 때는 죽은 듯 가만히 있는 인형처럼.
책을 읽는 행위로만 예시를 들었지만 어떤 행동이든 결국 튀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다. 한국 사회에 사는 사람이라면 흔히 느끼다시피, 우리 사회는 튀는 것을 가만두지 못하고 유별나게 바라보거나 평가하는 특성이 있다. 그 시선이 고운지 곱지 않은지, 평가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는 관계없다. 평가하고 판단한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나쁜 평가를 받으면 당연히 기분이 나빠지기 마련이고, 좋은 평가를 받아도 시기, 질투, 기대 때문에 부담스러워서 불편해진다.
이런 이유로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을 아주 좋아한다. 본가에 살 때는 물론이고 자취하던 때도 아주 잠깐을 제외하면 다른 누군가와 함께 사는 삶을 피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가뭄 속 단비처럼 잠깐씩 찾아오는 혼자만의 시간이 정말 소중하다. 성인이 된 지금도 수행이 부족해(?) 남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한 나머지, 혼자가 되어야 온전히 자유롭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최근 이 꿀맛 같은 시간을 누린 지 불과 한두 시간 만에 예상치 못하게 손님이 다녀간 적이 있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마비된 것처럼 생산적인 일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은 해야 할 일로 가득했지만 먹구름이 낀 것처럼 흐리멍덩했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으며, 몸은 힘 없이 축 늘어졌다. 체념한 채 그저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손님이 생각보다 일찍 길을 나서는 게 아닌가! 다시 혼자가 되자마자 나는 마치 되살아난 인형처럼 활발히 움직이며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생산적인 일--땀을 뻘뻘 흘리며 운동--을 했다. 한 공간에 다른 사람의 존재 여부만으로 이렇게나 내 행동과 컨디션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렇다. 이 글도 혼자 있을 때 쓰고 있다. 혼자 예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