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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연 Mar 31. 2023

첫 문장의 마침표를 찍다


  지난 1~2주간 오로지 한 가지 일에 몰두했다. 마땅한 요령이 없는 FM 체질인 데다 손이 빠르지 않아 마음이 조급했고 몸은 고생했다. 첫 회사를 다닐 때, 처음 해보는 일에 손이 느리다는 이유로 핀잔을 넘어 경악에 가까운 반응을 마주해야 했던 때보다는 나은 환경이었을까. 속도로 따지면 초등학교 3학년 운동회 때 달리기 3등 도장을 받았던 게 내 최우수 성적이었던 것 같다. 이런 나도 미국의 한 교실에서는 가장 빠른 사람이었던 적이 있었다.


[내가 가장 빨랐을 때]

  수학 시간이었다. 평소처럼 진도를 나가지는 않았고 학기말이고 시험도 끝나서 조금 쉬어갈 시간이 났던 것 같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스도쿠 퍼즐을 인쇄한 종이를 나눠주셨고, 가장 먼저 정답을 맞힌 두 사람에게 초콜릿 바를 상품으로 주겠다고 하셨다. 마침 당시 나는 밤마다 휴대폰으로 하는 스도쿠에 한창 빠져 있었다. easy부터 hard까지 모든 단계를 섭렵하며 게임을 해대던 내게 그날 받은 퍼즐은 너무 쉬웠다. 아마 선생님께서 스도쿠를 처음 접하는 학생을 고려해 그다지 어렵지 않은 것으로 골라오셨을 터였다. 종이를 받자마자 답을 술술 적어 내려갔고 1등으로 마친 뒤 손을 들었다. 학생들과 같이 퍼즐을 풀고 계시던 선생님께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정답지가 따로 있던 게 아니라서 선생님이 직접 푼 뒤 정답을 알려주시려 했는데 내가 먼저 끝내버린 것이다. 내 뒤쪽에 앉아 있던 한 친구는 "Hey! We're still working!"이라고 장난기 섞인 볼멘소리를 했다. 잠시 뒤, 선생님도 퍼즐을 다 푸셨고 초콜릿 바는 내 차지가 되었다. 속도로 1등을 해본 적이 없던 나로서는 나름대로 짜릿하고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그 일로 인해 아시안은 수학을 잘한다는 편견에 무게를 실어줬을지도 모르겠다.


  짜릿하고 재미있었다고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빨랐을 때의 이야기다. 국가번호 82의 나라에서 나는 여전히 느림보에 가까웠다. 이번에 맡은 일도 일반적인 기준보다 이삼일 더 준 거라지만, 그리고 기한보다 만 하루 이상 일찍 제출하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그 일을 받자마자 착수해서 가능한 한 한시도 쉬지 않고 일만 해댔기 때문이다. 그 덕에 허리는 아작이 나서 나중에는 책상 앞에 앉기가 괴로웠고 진통제를 먹으며 버텼다. 작업에 최선을 다했고 기한 내에 비교적 넉넉하게 제출했기 때문에 후회는 남지 않지만, 시스템에 대한 아쉬움은 남는다. 이 일을 하는 데 드는 수고에 비추어 넉넉한 시간과 보상이 주어졌다면 더 좋았을 텐데. 대한민국이 느림보에게 조금 더 친절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첫 문장을 열심히 쓰고 다듬어 마침내 마침표까지 찍은 내게 박수를 보낸다. 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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