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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연 May 19. 2023

가쓰오부시의 산책


  오늘도 어김없이 피곤한 아침이 시작되었다. 며칠째 잠이 부족해 자고 일어나도 피로가 가시지 않았고, 연달아 시작된 굵직한 일들로 인해 머릿속도 복작복작 꽉 차 있었다. 새로운 일의 시작이란 늘 그렇듯 양면성을 띤다. 처음에는 생활에 활기를 얹어주는 듯하다가도 조금만 무리하면 이렇게 금세 티를 낸다. 일을 맡았다는 뿌듯함과 감사는 찰나의 기쁨으로 지나가고 그보다 훨씬 무거운 부담감과 책임이 뒤따른다.


  그래도 할 수 있겠지, 괜찮겠지 하며 오전을 버텼는데 아무래도 무리였나 보다. 몸이 자꾸만 축 처져서 똑바로 앉기 힘들었고, 같이 얼굴 보고 일하는 분들 앞에서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못해 계속해서 마른세수를 해 댔다. 앉아있은 지 두어 시간이 넘어가자 급기야 속이 메슥거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점심시간이 되었지만 무얼 먹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그저 피로로만 가득 찼다.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았다. 판단을 내린 나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한낮의 햇살이 내리쬐는 바깥으로 나갔다.


  늦봄과 초여름을 오가는 5월의 정오는 그야말로 눈부셨다. 피로에 떠밀려 산책을 나온 만큼 이 시간 동안이나마 세로토닌이 잘 분비되고 비타민D가 충분히 합성되길 바라며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근처의 천변 길을 따라 걷는데 문득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 나오는 오코노미야끼 위 가다랑어포가 떠올랐다. 얇게 갈려서 오코노미야끼 위에 흩뿌려지는 가다랑어포가 마치 나인 것 같았다.


  '아, 또 이렇게 나를 갈아 넣고 있구나.'



영화 <리틀 포레스트>



  어떤 일을 무리할 정도로 온 힘을 다해서 할 때 흔히 '갈아 넣는다'라는 표현을 쓴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제대로 쉬지 못하는 한국인들에게 잘 어울리는 표현이다. 특별히 의도한 적은 없지만 나는 나를 갈아 넣는 게 특기다. 중학생 때는 무지막지한 토플 듣기 받아쓰기 숙제를 해내겠다고 새벽 5시까지 깨어 있었고, 아프면 쉬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미국에서조차 한국에서의 습관을 버리지 못해 열이 잔뜩 오른 몸을 이끌고 시험공부를 했다. 그렇게 계속 나를 갈아 넣다가 몇 년 전에는 갑작스러운 대상포진과 어지럼증까지 겪었다. 몸이 그만큼 아우성을 친 다음에야 깨달았다. 쉬어야겠다.


  그 일을 겪은 후로 한동안은 비교적 한가롭게 보냈다. 하지만 여전히 제대로 쉬는 법은 잘 알지 못했다. 한가한 시간을 잘 즐기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곧잘 불안해지거나 조급해졌다. 그러니 새로운 일이 찾아든 이 시점에 오래된 습관대로 나를 갈아 넣지 않고 여유롭고 활기차게 보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의식적으로 햇빛을 받으러 나가서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자꾸만 얕아지는 숨을 의식적으로 깊게 쉬었다.





  그때였다. 천변 산책로로 이어지는 경사로 양쪽에 노란 꽃이 잔뜩 핀 것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 식물이나 꽃에 그다지 큰 관심을 두지 않는 나지만 오늘은 자연스럽게 눈길이 그리로 향했다. 마치 VIP가 입장하는 길 양쪽으로 사람들이 몰려 서서 환영해 주는 듯한 모양새였다. 나는 잠시 동안 피로를 벗고 샛노란 꽃들에게 환영받는 기분에 들떴다. 이 쾌활한 기분을 조금 더 느끼고 싶어 짧은 경사로를 몇 번 더 왔다 갔다 하기도 했다.


  산책의 마지막 코스로는 징검다리를 선택했다. 평소 발을 헛디딜까 두려워 웬만하면 징검다리가 아닌 일반 다리를 이용하지만 오늘만큼은 예외였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돌 몇 개를 건너온 뒤 잠시 멈춰 서서 강물을 바라보았다. 돌과 돌 사이를 휘돌아 흐르는 물소리가 맑고 투명했다. 물은 생기 넘치게 콸콸 흘렀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고작 사오십 분 정도가 지나 있었다. 너덜너덜한 가쓰오부시로 시작해 노란 꽃과 징검다리, 투명한 물소리를 만난 덕에 오랜만에 알찼던 산책이 실제보다 더 길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그 후 위장에 꾸역꾸역 죽을 집어넣은 가쓰오부시는 금세 현실로 돌아왔지만 그래도 일상의 작은 추억과 약간의 활기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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