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얼굴
눈을 떴다. 옆으로 돌아눕는다. 벽이 보인다. 몇 달 전 빗물이 새서 흘러내린 자국이 그대로다. 집주인은 도배를 새로 해준다더니 감감무소식이었다. 그저 물이 흘러내렸다가 마른 자국일 뿐이지만 천장에서부터 바닥까지 세로로 길게 이어지는 물자국은 어딘지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진다. 민영은 벽지를 보고 문득 생각한다.
'꼭 나 같네.'
민영은 한때 매일매일 울었다. 툭 치면 눈물이 나올 정도로 울음이 헤펐다. 연기의 '연' 자도 모르지만 이 정도면 눈물 연기만큼은 자신 있겠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픽 웃음을 흘리기도 했다. 언제든 자유자재로 열 수 있는 인간 수도꼭지가 된 기분이었달까.
그로부터 몇 년이 흘렀다. 이제 민영은 여간해서 잘 울지 않는다. 아예 감정이 메마른 냉혈한이 되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그냥 예전만큼 잘 울지 못하게 되었을 뿐이다. 왠지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가도 불과 몇 초 후면 거짓말처럼 눈물이 쏙 들어갔다. 무슨 자동 눈물 방지 시스템이라도 달려 있는 것 같았다. 이상한 점은 또 있었다. 일상생활을 하다가 전혀 울컥할 포인트가 아닌 곳에서 괜히 눈물이 차오르는 것이었다. 계속 울어 보니 아무리 울어도 피곤하기만 할 뿐 소용없다는 걸 깨달아서였을까? 무의식적으로 잠겨버린 수도꼭지는 물을 제때 내보내지 못한 탓에 고장 나버린 게 분명했다.
비가 와서 습하고 무더웠던 어느 여름날, 민영은 친구 희진과 함께 강변으로 산책을 나갔다. 한동안 연애 문제로 마음고생이 심했던 희진은 민영을 붙잡고 어깨에 기대어 엉엉 울었다. 정말이지 주변 공기가 물방울로 꽉 찬 날이었다.
민영에게는 조금 낯선 경험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으레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이 아닌 다음에야 누가 남들 앞에서 엉엉 우는 모습을 볼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민영은 자기가 뭐라고 자기 앞에서 고민을 털어놓으며 엉엉 우는 희진이 한편으로 고마웠고, 정작 자신은 친구 앞에서 그렇게 기대서 울지 못하리란 생각에 조금은 서글퍼졌다.
'그래도 넌 다른 사람에게 기대서 울 용기가 있구나.'
민영은 희진이 부러웠다. 약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강점이라니 참 아이러니했다. 민영은 약하다. 하지만 약해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 적당히 괜찮은 척,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하며 살았다. 나중에는 스스로도 진짜 괜찮은 건지, 괜찮은 척하는 건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남 앞에서 눈물을 보이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바보같이 뒤틀린 자존심 세우기라는 걸 알면서도 포기할 수 없었다. 어차피 이해받지 못할 거라면 알량한 자존심이라도 지켜야 했다. 그래서 지금도 굳이 쓸데없는 고집을 피우는 중이었다.
"어떤 감정이든 올라오는 대로 느끼고 허용해 주세요."
상담사가 나직이 속삭였다. 민영이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걸까? 그래도 민영은 개의치 않고 다시 감정을 꾹꾹 눌러 담는다. 사실 민영은 이미 이전에 상담사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이 있었다. 갑작스레 울음이 터졌지만 그럼에도 제한된 상담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겠다는 목적지향적 일념 하에 입은 쉬지 않고 이야기를 뱉어내는 꼴이 조금은 우스웠다. 상담사는 '아이구' 하는 작은 탄식을 내뱉으며 조용히 티슈곽을 앞으로 밀어주었다. 그런 상담사의 반응이 특별히 불쾌했던 건 아니다. 오히려 일견 다정하기까지 했다. 다만 어쩔 수 없는 타인의 벽, 그것도 사적으로는 결코 친밀해질 수 없는 상담자와 내담자라는 관계의 벽이 또렷이 느껴졌을 뿐이다. 그래, 결국은 타인이구나. 그것도 조금만 지나면 다시 볼 일 없을 완전한 타인. 민영은 안타까워하는 듯하면서도 정작 다가와주지 않는 그 눈동자를 다시 마주하기가 어쩐지 두려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