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무시했다. 하지만, 이제는 소설에 무시당해도 할 말이 없다. 첫 소설을 읽고 크게 흔들렸으니 소설이 어디선가 나를 비웃고 있을 것 같다. 실컷 비웃어도 좋다. 어차피, 세상을 보는 다른 눈을 가지게 된 것에 감사한 마음만 남았을 뿐이다.
심원평 작가 '아몬드'를 한 달간 천천히 읽고 많은 감정을 느꼈으며,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에 발을 들여놓았다. 달리기를 처음 시작할 때 기분과 비슷하다. 처음 5km를 완주하고 난 다음 척추를 타고 등 뒤로 올라오는 전율이 느껴지면서 엔도르핀 때문인지 고조된 내 몸은 하늘을 달리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꽉 깨문 어금니로 인해 입 안에서는 피맛이 맴돌았는데, 그 맛조차 감미롭게 느껴졌던 순간과 흡사했다. 아니다. 그때 기분을 몇 단계 뛰어넘었다. 달리기는 뛰는 내내 힘들고 마지막 순간에 쾌감을 느꼈지만, 소설 아몬드는 4부로 구성되어 있는 중간중간 내 심장과 머리를 흔들었고, 어떨 때는 눈을 못 뜨게 했으며,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눈물을 삼키기도 했다. 심지어는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서 밖에 나갈 생각도 잊어버리게 했다.
소설 내용은 사랑과 정성으로 향한다. 할멈과 엄마의 윤재에 대한 사랑, 도라와 곤이의 윤재에 대한 사랑, 곤이 아빠의 곤이에 대한 사랑이 각각의 방법으로 나타나지만 목적지는 다 같았다. 거기에 정성이 더해졌고, 이야기가 전해지는 동안 감성은 고조되고 작가의 치밀한 문체는 계속 감탄을 자아냈다. 표지 모델 윤재의 무표정을 없애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결국 진부한 사랑과 정성이었다. 진부할 수 있는 결론이지만 어쩌면 세상의 단 하나인 진리를 찾는다면 '사랑'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세한 내용은 하나도 모르지만 성경이나 법경, 꾸란도 사랑이 최종 목적지인 것으로 알고 있다.
아몬드는 사랑과 정성이라는 큰 줄기 아래 다양한 이파리가 붙어있다. 작가 의도가 제대로 내게 전달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여러 번 울림이 있었고, 책을 덮고 잠시 눈을 감으며 격앙된 감정을 가라 앉히기 위해서 노력했던 순간도 많았다. 여러 번의 울림은 머릿속에서 앞으로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해야 할지 방향을 다져주기도 했다. 아몬드를 통해서 나에게 다가 온 세 가지 깨달음과 내 삶에 대한 두 가지 질문을 이야기하려 한다.
평범이라는 소중한 선물
"그냥 평범하게 살아" 란 말을 쉽게 했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되었다. 평범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고 평범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 인물들을 접하면서 평범의 가치를 다시 생각했다. 수천만 가지의 신체기관 중 하나인 아몬드보다 작은 편도체가 다른 사람과 조금 다를 뿐인데, 삶에 미치는 영향은 윤재의 삶으로 대변할 수 있다. 곤이도 기구한 삶에서 심리적 불안과 변화로 인해 평범한 아이들과 어울릴 수 없었다. 결국, 둘 다 평범이라는 목표로 다가가고 싶어 했고, 결과는 소설에 잘 나온다. 보편, 통상, 일상 등 평범과 어울리는 단어들을 이루기 위해서 수많은 우연과 노력이 겹쳐서 나타나는데, 하나도 알지 못했고 그냥 가만히 있으면 평범해지는 줄 알았다. 평범 자체를 재단하기도 쉽지 않은데, 너무 쉽게 입 밖으로 꺼냈다. 우린 평범하다고, 보편적인 생각이고 일반적인 행동이며, 무료한 일상을 보낸다는 말을 가볍게 다뤘지만, 이제는 평범하려고 더 노력하고 평범하다는 기분이 들면 감사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한 곳에 몰입하면 많은 것을 놓칠 수 있다. 다양한 관점으로 세상을 보자
이야기에 집중하면서 많은 부분을 놓쳤다. 슈퍼 아저씨의 우둔함과 윤재의 무감각을 보면서 아이가 쓰러져 죽었을 때 누가 가장 슬픈 사람인 줄 생각 못했고, 곤이가 날뛸 때는 악함에 가려져 곤이의 아픔과 윤재에 대한 사랑을 알 수 없었다. 곤이 아빠의 잘못된 훈육과 아내에 대한 사랑에 집중하다 보니 자식을 잃어버리고 아내를 다른 세상에 먼저 보낸 슬픈 아빠의 모습을 놓치기도 했다. 몰입과 집중의 장점은 무궁무진하지만 다른 부분을 헤아리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넓게 보는 것도 중요한데, 넓히는 것보다 한발 더 나아가 다양한 방향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윤재나 곤이 또는 도라나 심 박사의 입장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되새기면서 소설을 읽어보니 색다른 재미를 찾을 수 있었다. 평소에 선입견과 편견을 혐오하던 나도 결국 작가의 화려한 문장력에 유혹되어 이야기에 몰입했고 순간 치우치는 것을 느꼈다. 소설에서 느낀 감정을 매일 나가는 일터에서도 동일하게 받았다. 다르게 보려고 노력하자는 내 작은 가치관 중 하나를 다시 한번 다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아몬드가 땅콩이 될 정도로.
사랑과 정성은 삶에 큰 변화를 준다
소설의 본질을 사랑과 정성이라고 얘기했는데, 나에게 많이 부족한 부분이다. 전반적인 흐름이 한 방향으로 진행이 되었음에도 알아채지 못하고 반전과 아픔을 찾으려 했다. 기적을 이룰 수 있는 것도 사랑과 정성인데, 매번 중간에 포기하다 보니 해피엔딩이 아니라고 불평만 하게 된다. 작은 기적을 알 수 있었고, 기적 속에서 사랑이 보였다. 익히 알고 있는 전개를 통해 느끼는 사랑보다 곤이가 윤재에게 다가서는 이상한 모습에서 더 큰 사랑과 정성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시기와 질투, 그리고 안타까움도 모두 사랑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사랑이라는 단어는 너무나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진리에 가장 가까운 단어라는 것에서 생각이 멈췄다.
내 아이가 윤재나 곤이 같은 아픔을 겪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은 확신이 없기 때문에 다짐이나 깨달음이라는 표현을 할 수 없었다. 작가가 에필로그에서도 자문한 말인데, 나 역시 어떻게 대할지 모른다. 감정이 격해질지 이성으로만 대할지 아니면 그럴 일이 없기 때문에 멋진 척 말만 할지 잘 모르겠다. 다만, 소설을 통해서 고민해볼 기회가 부여된 게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독서가 간접 경험이라면 다양한 상상을 통해서 사고의 영역을 넓히고 행동을 준비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질문을 알게 되었다.
나는 소설을 쓸 수 있을까?
현실로 돌아왔다. 이제 막 글쓰기를 시작한 내게 소설은 어려운 분야이다. 창의성이 조금 있고 상상을 많이 한다고 소설을 쓸 수는 없다. 세상에 없는 인물을 창조하고 다양한 사건과 화젯거리를 만들며 복잡한 관계를 얽히고설켜서 독자들이 각자의 생각으로 작가의 의도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다가가야 한다. 일기 쓰는 것도 버거운 수준이기에 아직 너무 멀리에 떨어져 있는 분야다. 소설을 한번 읽고 글을 생생하게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 눈에 들어온 것을 깊은 고뇌 없이 손으로 다시 모방할 뿐이지만, 반복되고 쌓이면 나만의 문체가 틀을 갖출 것이라 믿는다. 살면서 크게 노력해 본 적이 없는 것을 감사한다. 글쓰기에 혼을 실을 수 있게 지금껏 많은 기운을 모아 둔 것이다. 지치지 않고 소설까지 다가가고 싶지만, 돌아볼 수 있는 여지를 두기 위해서 소설을 쓸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은 질문으로 남기고 싶다.
슬램덩크에서 강백호가 채소연에게 '농구를 좋아합니다'라고 고백했던 장면이 생각난다. 아무 생각 없이 좋다고 하던 때와 달리 진심으로 농구를 좋아하게 된 순간 했던 말과 똑같다. 난 소설을 좋아한다. 단 한편을 보고 좋아한다고 말하는 내가 부끄럽지만 그만큼 푹 빠져 버렸다. 그러면서 과거 나를 반성한다. 꼰대 정신과 선입견에 둘러 쌓여 세상을 바로 보지 못했다. 허구뿐인 세상이며, 이성보다는 감성에 치우치고 화려한 수식으로 본질을 가리는 문학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거추장스러운 존재라고 생각했다. 무더위가 지나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요즘 카디건 같이 멋만 부리는 불필요한 옷을 입고 다니는 행위로 치부했다. 하지만, 캐시미어로 만들어져서 가볍고 따뜻하며 산뜻한 연노랑색의 예쁜 카디건을 너덜거리는 포대자루로 알고 살았던 것이다. 가볍게 읽으면서 감정을 한껏 끌어올릴 수 있고 정독을 통해 행간에 숨겨진 많은 의미를 찾으며, 스스로 작가가 되어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소설을 이제야 만났다. 늦게 알게 되어 아쉬운 마음이 크지만, 지금이라도 내 눈앞에 가려진 멍청한 장막을 한가닥 벗겨준 것에 감사한다. 이제 좁은 틈새로 빛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방향을 알 수 있게 되었고, 정말 거추장스러운 편견과 선입견을 털고 좌우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시각을 넓히고 더 나아가 1인칭 주인공 시점이 아닌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현안을 가져야겠다. 어쩌면, 전지적 작가가 아닌 진짜 소설 작가가 될지도 모르겠다. 소설을 마흔 살 넘어서 처음 읽은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