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를 알고 싶었다. 두세 번 만남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잡문집과 다른 책 한 권이었는데, 내 생각에는 글이 난해하다고 느껴져서 몇 장 읽다가 덮었다. 어느 부분에서 감동을 받아야 하는지 무슨 영감을 얻었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지내다 우연히 글 모임 작가분이 무라카미 T 내가 사랑한 티셔츠를 추천했고, 독립 책방 '너의 작업실'에서 다른 몇 권과 함께 주문하여 택배로 받았다. 책 소개 글 중에 어쩌다 보니 에세이 열여덟 편이라고 쓰여있는데, 가볍게 읽다 보니 하루키 책을 처음으로 완독 했다. 너무 가벼워서 한두 시간이면 충분히 읽을 분량이지만 최근 여러 책을 동시에 조금씩 읽고 있다 보니는 2~3주 걸렸다. T와 관련된 소소한 에피소드와 무라카미 생각을 단락별로 별개로 나눠있고, 책의 절반 이상이 무라카미가 수집한 T 사진이라 끊어 읽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책을 통해서 얻은 것은 두 가지이다. 예쁜 T를 사서 입어야겠다와 글쓰기 소재를 지금보다 더 가볍게 다루자는 다짐이다. 책을 읽다가 무심코 옷장을 쳐다봤다. 잘 입지 않는 그래픽 T 2장을 제외하고 대부분 브랜드 로고만 찍혀 있는 운동용 T가 대부분이다. 색깔은 흰, 검, 회가 다수를 이룬다. 조금 더 차려입는다고 해봤자 깃이 있는 폴로 T 정도이다. 폴로 T도 다른 T와 마찬가지로 예쁜 모양이나 멋진 그림은 없고 왼쪽 가슴에 말 타는 사람 하나가 작게 새겨져 있다. 결국 내가 가진 T는 다 똑같다. 마침 큰 딸이 내게 다가왔고, 큰 딸 입고 있는 T가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운 체리 꽃이 한아름 그려져 있다. 하루키가 책에서 T에 대해 아름다움을 계속 묘사했는데, 큰 딸 T도 충분히 견줄 만했다. 뒤따라 오는 막내의 똑같은 T 가 다시 눈에 들어오면서 예쁜 T를 애들만 사줄게 아니라 나도 아름다움을 수집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난 왜 도화지만 입고 있었는지 의문이 든다.
글쓰기 소재는 지금도 가볍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하지만, 책머리와 후반부 인터뷰에 나와 있는 토니 타키타니 T 이야기를 듣고 많이 놀랐다. 1달러에 구입한 T 하나로 단편소설을 창조했고 영화까지 만들었다는 데 깊은 영감을 받았다. 사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몇 번 했다. 멋진 사진이나 그림 하나만을 보고 어떤 이야기가 모여서 완성된 것일지 항상 궁금했고, 작품 설명에 상상력이 보태져서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혼자 생각했다는 모든 것들은 세상에 이미 존재한다. 나만의 영역을 제대로 가미하지 않으면 모방으로 치부한다. 아니면 무의식 중에 기존에 영향받은 것이 발현되는 경우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글을 쓰기 위한 소재는 작고 별 볼 일 없는 것부터 시작하되 자신만의 적절한 표현과 메타포를 잘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부끄럽지만 언어영역에 취약했던 난 메타포를 어제 읽은 박연준 작가 쓰는 기분에서 처음 알았다.
어쩌다 보니 하루키와 첫인사를 하게 되었다. 두세 번 지나쳤지만, 서로 아무 말도 주고받지도 않고 같은 공간에서 침묵만 흐르다 헤어졌다. 다행히 이번에는 짧은 인사를 한 마디씩 주고받았다. 내가 먼저 다가가서 처음 뵙겠다며 영광이라고 했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나에게 예쁜 T를 사서 입고 다니라면서, 글을 가볍게 대하라는 조언까지 해주고 사라졌다. 하고 싶은 말이 생겼지만 현실에서 직접 전해주지는 못한다. 코로나 상황도 좋지 않지만, 일본어를 못해서 대화가 안될 것 같다. 하지만, 다음에는 찐하게 소설 한잔 같이 들이켜야겠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고, 나와 닮은 부분이 있는지 한번 찾아봐야겠다. 나름 고민해서 의미 부여한 내 10234 십 년 글쓰기가 1Q84에서 영감을 받았는지 한번 확인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