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고 싶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듣기 싫어하는 이야기 중 손꼽히는 주제는군대이다. 나 역시여러 가지 이유에서 선호하지 않는다. 게다가 태어나기도 전인 1970년대 군대 이야기는 전혀 관심 없었지만, 명절이라는 울타리로 인해서 벗어 날 수 없었다. 특히, 최근 DP에 대한 논란으로 관심이 높아져서 가족들도 평소보다 군 관련 사항을 많이 물었다. 하지만, 내 대답은 항상 똑같다. '잘 모르겠는데요'이다.
명절 식사자리도 마찬가지이다. 가족이 모여서 정치와 군대 이야기를 하면서 은연중 내 눈치를 보면서 대화를 한다. 그러면서도 어차피 반응이 없을 것을 알기에 자신들의 가치관이나 철학을 정치와 군 관련 상황에 엮어서 말한다. 내 귀에 들리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고, 나 역시 말하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는 상황이 이어진다.
추석 당일 오후에 아버지, 매형과 함께 셋이서 집 앞 바닷가를 산책했다. 방파제에 걸터앉아 바다를 바라보면서지루한 정치와 군 이야기가 시작됐다. 난 슬그머니 옆으로 빠지면서 책을 펼쳤다. 재수 없음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퍼포먼스이다.아내나 누나가 옆에 있었다면 한소리 했겠지만, 친절한 두 분께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다양한 주제로 토론을 이어갔다. 맨 정신의 노인과 중년 남성이 바닷가에 앉아서 세상 사는 이야기를 하는 게 신기해서 책을 읽으면서도 한쪽 귀는 열고 있었다. 그러다 대화는 아버지 군대 이야기로 흘러갔다. 예비역 공군 병장으로 42개월 동안 의무를 다했고 1973년에 전역하신 군 선배로는 진심으로 존경한다. 하지만, 비행장 관제탑 밑에서 창고 관리만 한 것으로 알고 있었기에 편히 쉬다 오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힘든 군 생활을 했다는 게 놀라웠다. 특히, 당시 군 선임의 횡포로 고생을 많이 했는데, 어쩔 수 없는 환경이었다며 선임을 두둔하는 것도 어처구니없었다. 당시 선임은 김신조 청와대 습격사건으로 인해서 복무기간이 6개월 연장되어 있던 상태라 화가 충만했고 마침 새로 들어온 아버지와 동기는 스트레스 해소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선임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술을 시작했고, 결국 그 술은 나와 마찰 요소가 되기도 했다. 덕분에 내가 마흔이 될 때까지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하여튼, 당시 힘들게 하루하루를버티며 생활하다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일과시간에 인접 마을로 가서 소주를 세병이나 먹고 숙소로 돌아오기도 했다. 선임들을 벗어나기 위해서 부대에서 나가려고 했는데, 술을 마시다 보니 걱정이 되어서 돌아왔다는 말에 뒤통수가 찌릿했다. 돌아오지 않았으면, 내가 임관조차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을 텐데, 돌아와 주셔서 감사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군대와 낚시 이야기는 많은 양념이가미되고,최근 DP의 영향으로 드라마의 중심에 서고 싶었을 수도 있기에감내하면서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아버지 자서전에 대한 신뢰는딱 거기까지였다. 이어지는 줄거리는 에세이에서 소설로 변했다. 한 번은 비행장 격납고 공사를 하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일주일간 머물렀다는 말에 갑자기 막걸리가 생각났다. 역사를 확인해 본 적은 없으니 우선 작가의 말씀을 더 들어보기로 했다. 대통령이 기거한 일주일 동안 여러 작업을 했는데, 성과가 좋아서 PX 물품도 공짜로 지급해주고 많은 격려를 받았다는 진부한 스토리였다. 소설가도 드문드문 말씀하시는 걸로 봐서 너무 오래되어 기억을 못 하거나 자신의 작품이 SF라고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어색해질까 봐 요즘 작가 놀이를 하는 아들이 거들었다. VIP가 오면 몇 달 전부터 관심이 필요하기 때문에 특정일을 알려준 게 아니고 일주일 정도 기간을 설정하며 행사 당일 반나절만 왔다 갔을 것 같다. 그러면서 행사는 준비 소요가 있으니 일주일 정도 작업할 수 있다고 대본에 살을 보태줬다. 하지만, 대작가께서는 아니란다. 일주일 계셨단다. 더 이상 소설을 이어갈 필요도 들을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 말썽꾸러기나 보러 가자고 권유했다. 그나마, 코로나로 인해서 집안 어르신들이 많이 모이질 못해 다행이다. 공군 대령으로 예편하신 분이나 백마부대 참전용사까지 합세하면 각자 만든 스토리가 제다이의 귀환을 능가하는데, 가끔 나에게 평을 요구하며 난처하게 만든다. 코로나 덕분에 추석명절 문학인의 밤 행사가 취소되어 천만다행이다.
군대 이야기는 다들 힘들었다고 말하면서 웃는다. 보통 우리는 힘들거나 아픈 기억을 되새기면 울거나 쓰린 가슴을 움켜잡는데, 분명, 힘든 기억이라고 말하면서 웃고 있다. 게다가 듣기 싫은 군대 이야기라면서 듣고 있는 내내 공감하며 좋아한다. 사실, 나도 그들이 웃는 이유를 조금은 알고 있다. 하지만 굳이 글로 표현하거나 말할 필요가 없다. 서로 잘 알기 때문에, 결국 행복한 추억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난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기에 웃음으로 추억을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