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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남세아 Nov 21. 2021

아내가 연준에 빠진 날

'쓰는 기분' 박연준 작가를 만나다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르는 단어 VOU가 쓰인 시를 읽는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혼신을 다해 천천히 읊조린다. 더군다나 그 시를 인용하여 쓴 책 '쓰는 기분' 저자 앞에서 긴장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한 음절씩 천천히 낭독한다.

"시는 눈으로만 보면 모릅니다. 소리 내어 읽어야 느낄 수 있어요"

 시인은 내게 말했다. 그리고 그의 책에도 그렇게 썼다.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김춘수 시인의 VOU를 나에게 낭독하도록 권유했다.

"요즘 열정적으로 창작 활동하고 있는 우기쌤이 해보세요!"

 내 생애 첫 시 낭송은 좋아하는 시인과 늘 함께하는 글벗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떨리는 목소리로 아무런 준비 없이 시작했다. 결과는 뻔하다. 스스로 시를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다른 사람에게 들려준다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존재를 모르는 자색의 아네모네와 읽을 줄 모르는 VOU를 보면서 읽어내기 급급한 상황이었고 결국 활자를 기계음으로 전달한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AI 같아서 부끄럽지만 행복했다.


 그토록 기대했던 박연준 작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몇 주전 너의 작업실 인스타 피드에 작가와 만남 알림이 울렸다. 한 번만 고민해도 참석 못할 것이라는 직감에 DM과 댓글, 그리고 책방지기에게 카톡까지 보내면서 강한 참석 의지를 표명했다. 다행히 선착순 10명이라는 숫자 안에 포함됐다는 회신을 받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선착순이 마감된 다음에도 많은 사람이 연락했고, 제한된다고 알렸는데도 계속해서 간곡하게 부탁한 네 명을 추가로 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작가를 포함한 15명이 소중한 공간 너의 작업실에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박연준 작가를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여름이 식어가는 즈음 연남동 서점 리스본을 방문했다가 '연필을 쥔 사람은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라는 비밀의 책 문구를 보고, 아내가 구입하여 내게 선물했다. 카페에 앉아서 비밀의 책 포장을 뜯자 '쓰는 기분'이 나왔다. 작가 이름을 보고 남류 작가인 줄 알았고, 하루 전 글 모임 피드에 '쓰는 기분' 찬양글이 생각나서 친근함도 들었다. 책장을 넘기고 서문을 읽자마자 소름이 돋았다. 글쓰기를 막 시작한 나에게 잘 어울리는 책이라서, 천천히 읽고 싶었다. 하루에 서너 권씩 책을 바꿔서 들고 다니면서도 '쓰는 기분'은 항상 먼저 챙겼다. 하지만, 구매한 지 두 달 반이나 흐른 지난주에 완독 했다. 그 기간 동안 서평 9편을 브런치에 올렸고, 그보다 두배 정도 되는 책을 읽었다. 책을 읽고 나면 바로 서평 하려고 다짐했지만, '쓰는 기분'은 일주일이 지나도록 쓸 수가 없다. 써야 할 내용이 너무 많아서 결국 서평은 쓰지 않고, 내년 초 필사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책과 관련된 글을 전혀 다루지 않은 것은 아니다. 두 달 반 천천히 읽으면서 얻은 생각과 감정은 그동안 내가 쓴 글에 스며들었고, 박연준 작가와 관련된 많은 내용이 들어있다. 시 비슷한 것도 몇 편 썼다. 계속 수정하고 있지만, 글 모임 게시판이나 인스타 피드에는 편하게 공개했다. 어차피 올려도 되는 것만 올리기 때문이다.

 두 시간 동안 대화한 내용을 놓치기 싫어서 기자처럼 단어와 문장을 수첩에 빼곡하게 적었다. 하나씩만 풀어도 A4용지 한 두장은 거뜬히 쓸 수 있을 것 같다. 함께하는 시간 동안 많은 부분을 공감했다. 특히, 작가가 큰 충격을 받았다는 백석의 시 중 '어린 딸은 도라지 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를 듣고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 말을 전해주는 작가 눈 역시 온전하지 않은 게 보였고, 진정성이 느껴졌다.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으며, 72개 동그라미와 지단 이야기는 흥미롭고 소름 끼쳤다. 직접 시를 낭독해주기도 했고, 서문도 읽어줬다. 시는 언제나 새 고양이로 온다를 읊조릴 때 책방 밖에서 들리는 고양이 소리가 오묘했다.

 사실 '쓰는 기분'을 만난 다음 이상한 일이 많이 일어났다. 지난해 '서촌 그 책방'에서 책방지기가 추천해서 읽지는 못하고 책장에 모셔두었던 모월모일이 박연준 산문집인지 뒤늦게 알았다. 그때 처음 만났는데, 알았다면 그의 책 소란,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등 19권 모두를 읽었을 텐데 아쉽다. 쓰는 기분을 읽는 동안 남류인지 여류 인지도 모르고 봤으며, 나이 많은 남성 작가라고 생각하는 중에 아내가 "당신 또래 여성이야" 란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다. 계속되는 우연은 예전에 한번 만났던 소중한 인연을 다시 보는 것 같았다. 북 토크 중 아내는 '운명'이라는 말을 내뱉다가 멈췄다. 아내 닉네임이 '운명'이었던 것처럼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한 말이었기에 밖으로 표출할 수 없었을 거다. 그만큼 작가가 소중한 사람으로 느껴졌다. 생애 처음 참가한 북 토크에서 인연이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격스럽다. 좋은 시간이었고 함께해서 기뻤다.


 박연준 작가는 정말 솔직한 사람이다. 쓰는 기분에 '솔직함은 재능의 일부다'라는 한 단락이 있다. 아마도 작가의 최고 재능은 솔직함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도 충분히 유명하지만 머지않아 천재 작가이며 시인이라는 칭호가 붙을 게 뻔하다. 앞으로는 더 만나기 힘들 텐데, 작가가 글 쓰는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담은 작품 한 부분을 직접 읽고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경험이 내 세포 속에 깊게 새겨졌다. 나보다  연준을 깊게 새기고 글 쓰기 욕구가 꿈틀거리지만 나서지 못하는 사람이 아직 옆에서 곤히 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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