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르는 단어 VOU가 쓰인 시를 읽는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혼신을 다해 천천히 읊조린다. 더군다나 그 시를 인용하여 쓴 책 '쓰는 기분' 저자 앞에서 긴장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한 음절씩 천천히 낭독한다.
"시는 눈으로만 보면 모릅니다. 소리 내어 읽어야 느낄 수 있어요"
시인은 내게 말했다. 그리고 그의 책에도 그렇게 썼다.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김춘수 시인의 VOU를 나에게 낭독하도록 권유했다.
"요즘 열정적으로 창작 활동하고 있는 우기쌤이 해보세요!"
내 생애 첫 시 낭송은 좋아하는 시인과 늘 함께하는 글벗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떨리는 목소리로 아무런 준비 없이 시작했다. 결과는 뻔하다. 스스로 시를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다른 사람에게 들려준다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존재를 모르는 자색의 아네모네와 읽을 줄 모르는 VOU를 보면서 읽어내기 급급한 상황이었고 결국 활자를 기계음으로 전달한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AI 같아서 부끄럽지만 행복했다.
그토록 기대했던 박연준 작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몇 주전 너의 작업실 인스타 피드에 작가와 만남 알림이 울렸다. 한 번만 고민해도 참석 못할 것이라는 직감에 DM과 댓글, 그리고 책방지기에게 카톡까지 보내면서 강한 참석 의지를 표명했다. 다행히 선착순 10명이라는 숫자 안에 포함됐다는 회신을 받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선착순이 마감된 다음에도 많은 사람이 연락했고, 제한된다고 알렸는데도 계속해서 간곡하게 부탁한 네 명을 추가로 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작가를 포함한 15명이 소중한 공간 너의 작업실에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박연준 작가를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여름이 식어가는 즈음 연남동 서점 리스본을 방문했다가 '연필을 쥔 사람은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라는 비밀의 책 문구를 보고, 아내가 구입하여 내게 선물했다. 카페에 앉아서 비밀의 책 포장을 뜯자 '쓰는 기분'이 나왔다. 작가 이름을 보고 남류 작가인 줄 알았고, 하루 전 글 모임 피드에 '쓰는 기분' 찬양글이 생각나서 친근함도 들었다. 책장을 넘기고 서문을 읽자마자 소름이 돋았다. 글쓰기를 막 시작한 나에게 잘 어울리는 책이라서, 천천히 읽고 싶었다. 하루에 서너 권씩 책을 바꿔서 들고 다니면서도 '쓰는 기분'은 항상 먼저 챙겼다. 하지만, 구매한 지 두 달 반이나 흐른 지난주에 완독 했다. 그 기간 동안 서평 9편을 브런치에 올렸고, 그보다 두배 정도 되는 책을 읽었다. 책을 읽고 나면 바로 서평 하려고 다짐했지만, '쓰는 기분'은 일주일이 지나도록 쓸 수가 없다. 써야 할 내용이 너무 많아서 결국 서평은 쓰지 않고, 내년 초 필사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책과 관련된 글을 전혀 다루지 않은 것은 아니다. 두 달 반 천천히 읽으면서 얻은 생각과 감정은 그동안 내가 쓴 글에 스며들었고, 박연준 작가와 관련된 많은 내용이 들어있다. 시 비슷한 것도 몇 편 썼다. 계속 수정하고 있지만, 글 모임 게시판이나 인스타 피드에는 편하게 공개했다. 어차피 올려도 되는 것만 올리기 때문이다.
두 시간 동안 대화한 내용을 놓치기 싫어서 기자처럼 단어와 문장을 수첩에 빼곡하게 적었다. 하나씩만 풀어도 A4용지 한 두장은 거뜬히 쓸 수 있을 것 같다. 함께하는 시간 동안 많은 부분을 공감했다. 특히, 작가가 큰 충격을 받았다는 백석의 시 중 '어린 딸은 도라지 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를 듣고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 말을 전해주는 작가 눈 역시 온전하지 않은 게 보였고, 진정성이 느껴졌다.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으며, 72개 동그라미와 지단 이야기는 흥미롭고 소름 끼쳤다. 직접 시를 낭독해주기도 했고, 서문도 읽어줬다. 시는 언제나 새 고양이로 온다를 읊조릴 때 책방 밖에서 들리는 고양이 소리가 오묘했다.
사실 '쓰는 기분'을 만난 다음 이상한 일이 많이 일어났다. 지난해 '서촌 그 책방'에서 책방지기가 추천해서 읽지는 못하고 책장에 모셔두었던 모월모일이 박연준 산문집인지 뒤늦게 알았다. 그때 처음 만났는데, 알았다면 그의 책 소란,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등 19권 모두를 읽었을 텐데 아쉽다. 쓰는 기분을 읽는 동안 남류인지 여류 인지도 모르고 봤으며, 나이 많은 남성 작가라고 생각하는 중에 아내가 "당신 또래 여성이야"란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다. 계속되는 우연은 예전에 한번 만났던 소중한 인연을 다시 보는 것 같았다. 북 토크 중 아내는 '운명'이라는 말을 내뱉다가 멈췄다. 아내 닉네임이 '운명'이었던 것처럼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한 말이었기에 밖으로 표출할 수 없었을 거다. 그만큼 작가가 소중한 사람으로 느껴졌다. 생애 처음 참가한 북 토크에서 인연이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격스럽다. 좋은 시간이었고 함께해서 기뻤다.
박연준 작가는 정말 솔직한 사람이다. 쓰는 기분에 '솔직함은 재능의 일부다'라는 한 단락이 있다. 아마도 작가의 최고 재능은 솔직함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도 충분히 유명하지만 머지않아 천재 작가이며 시인이라는 칭호가 붙을 게 뻔하다. 앞으로는 더 만나기 힘들 텐데, 작가가 글 쓰는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담은 작품 한 부분을 직접 읽고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경험이 내 세포 속에 깊게 새겨졌다. 나보다더 연준을 깊게새기고 글 쓰기 욕구가 꿈틀거리지만 나서지 못하는 사람이아직옆에서 곤히 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