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동안 느리게 책 한 권 읽기] 밝은 밤_최은영
열일곱은 그런 나이가 아니다. 군인들에게 잡혀갈까 봐 두려워하며 잠들지 못하는 나이, 아침마다 옥수수를 삶아 한 광주리를 이고 팔러 다녀야 하는 나이, 죽음을 목전에 둔 엄마의 공포와 노여움과 외로움을 지켜봐야 하는 나이, 영영 자기 혼자 남겨질 것이라는 예감을 하는 나이, 백정이라는 표식 때문에 길을 지나갈 때면 언제나, 어김없이 조롱당하고 위협당하는 나이, 엄마를 버려야 하는 나이, 그렇지만 증조모의 열일곱은 그런 나이였다. (중략) 기래. 가라. 내레 다음 생에선 네 딸로 태어날 테니. 그때 만나자. 그때 다시 만나자. "얘야... 우린 그렇게 다시 만났던 거야" 할머니가 내게 말했다.
사진관에서 나온 그들은 거북이 해변으로 걸어갔다. 더운 날이었지만 바다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새비 아주머니는 모래사장에 풀썩 주저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다가 고무신과 버선을 벗고 치맛자락을 무릎까지 올린 뒤에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큰 파도가 밀려와 종아리까지 물이 닿자 새비 아주머니가 새된 소리를 지르며 큰 소리로 웃었다. 새비 아주머니는 조금 더 깊은 곳까지 걸어갔다 파도가 들이치면 아이처럼 소리를 지르면서 모래사장으로 달려 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할머니와 증조모와 엄마에게 손을 흔들면서 오래도록 바다에서 놀았다. '새비 아주머니는 그날 바다에서 놀았다.' 할머니는 그날의 일을 이 한 문장으로 기억했다. 할머니는 검은 고무공을 새비 아주머니에게 던졌다. 새비 아주머니는 발 앞에 떨어진 고무공을 주어 증조모에게 던졌다. 증조모가 뒷걸음질 쳐서 공을 받고 그 공을 할머니에게 던졌다. 할머니는 다시 새비 아주머니에게 공을 던졌다. 그렇게 세 여자가 모래사장에서 공을 주고받았다. 공을 받기 위해 허둥지둥하는 서로의 어설픈 모습에 모두가 깔깔대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