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역을 나와 주변을 둘러보니서너 개 초록사이렌이 눈에 들어온다. 평소사이렌을 좋아하는 사람 중 한 명이기 때문에 선택지가 많은 환경이 좋기만 하다.한적해 보이는 곳으로 들어가서손님 과반수 이상이마시는 뜨거운 검정 물을 주문한다.
이 집검정 물특징은 맛과 향보다 끓는점을 훨씬 넘길 것 같은 온도이다. 그래서직원은검정 물을 건네주며뜨거우니까 조심하라고 친절하게 안내한다. 오랜 시간검정 물을단련했기때문에 경고는 무시한 채 입술을 머그잔 주둥이에 살며시 가져다 댄다.
검정 물한 모금 들이키면입술과 혓바닥을 거쳐서 목까지넘어가는과정을온전하게 느낄 수 있다. 뜨겁기만 하면 다가올수 없는 묘한 기분이다.
스타벅스 명동 별다방점
시원한 얼음이가득한검은 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차가운 검은 물은 콜라와 색깔이 비슷하다. 당연히 목 넘김이 조금 다르지만 뜨거운 검정 물이나 차가운 검은 물의향과 맛,촉감조차 잘 모르기때문에알코올이 지나갈 때 보다두배정도 좋다는것만 안다.세상은 잠시 멈추고 미간은 구겨지며 목에서는 묵직한 저음이 나오는데,크와 캬가 아닌 음과 아에가깝다.
이어서 진행되는 검정 물에 대한 반응 알고리즘은 한결같다. 몸과 융합되는 순간 동공은 확장되고 머리가 맑아지며 각성된 육신은 방금 깨어난 뇌의 지시에 따라서 다음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준다.어떤 날은 책을 읽고 또 다른 날은 글을 쓴다. 하릴없이 뉴스를 보거나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언제나 시작은 검정 물로막혀있던 혈을뚫는 행위로부터 시작한다.
스타벅스 북한산 진관 DT점
담배나 술은 안 해도 검정 물을 마시지 않는 경우는 흔치 않다.두메산골에 사시는 여든을 훨씬 넘긴 어르신도 자기취향에 맞게즐길정도로우리 삶 속에 깊숙하게스며들어있다. 주변에가게를 차렸거나 바리스타 친구가 한 명도 없다면 인간관계를 의심해 볼만하다.
나 역시 매일 한잔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일곱 시 삼십 분 집 앞 초록 사이렌 드라이브 스루에 들어서면 간단한 주문 절차를 거쳐 뜨거운 한잔을 받는다. 뜨거운 한잔을 통해서 하루를 각성하며 시작한다.예전에는값이 터무니없이 비싸며 거품가득하다고 생각했는데,어느샌가 살아가는 데 당연히 지출해야 할 통신료나 대중교통비처럼 느껴진다.
스타벅스 양평 DT
맛도 대부분비슷하다.단지 신맛과 탄맛 정도만 알고 농도의 진하기와 묽은 정도를 구분할 뿐이다. 맛있다고 해서 자주 마셨고 자주 마시다 보니 습관처럼 마신다. 배전도나 산도는 거의 모르고 아로마 역시 생두를 로스팅하는 향이 구수하다 정도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수준이다.
속물들이 맛도 모르면서 허세 가득하다고 말하며 고유의 맛과 향보다는 브랜드에 빠졌다며 조롱하기도 한다. 반면에맛과 향을 넘어 문화를 즐긴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솔직히 뭐가 중요한지 모르겠다. 그냥 마시고 싶어서 마셨고, 꾸준하게 마시다 보니 습관이 되어 다시 찾는데, 허세든 문화든 좋은 사람은 행하고 싫은 사람은 행하지 아니하면 될 것 같다.
초록색 사이렌이 가득한 세상이 좋다고 했지만 사실 나는 파란 병에 빠져서 허우적거렸다. 파란 병에서 날 감동시킨 대표 메뉴는 황톳물이다. 하얀 우유에 잘 구운 까만 콩 원액이 들어가면 검정 물 향과 맛에 고소함이 더해지는데, 미숫가루와 비슷한 느낌이다.
몇 해전 일본 여행에서 만난 황톳물은 검정 물만 고집하던 나를 변절자로 만들었다. 국내에 돌아와서 같은 맛을 찾으려고 이곳저곳을 다녔지만 만날 수 없었다. 때마침 반일감정이 커지면서 일본에 갈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서 검정 물로 돌아서려는 찰나 국내에서도 파란 병 1호 점을 개업한다는 기사를 접할 수 있었다. 뛸 듯 기뻤지만, 언론이 엄청나게 홍보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렸고, 결국 인기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시각까지 함께 다가왔다.
블루보틀 도쿄 1호점과 교토점
단지, 황톳물이 좋아서 한잔 마시고 싶은 생각에 방문한 성수동 지하실에 자리 잡은 공장 콘셉트의 가게를 들어가기 위해서 무려 두세 시간 이상 줄을 서야 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세 시간의 줄 속에 갇힌 마흔 살 중년 남성은 혹여 방송에 노출될까 봐 꽁꽁 싸매고 신세를 한탄하기도 했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개업한 지 삼일이 지난 평일 이른 아침에 갔지만이미삼십여 명정도가 앞에 있었다. 발길을 돌릴까 여러 번 고민했지만그리웠던 맛을 다시 느낄 수 있다는 생각에 한참을대기한 다음입장할수 있었다.
실내는 적색 벽돌장식이 눈에 들어왔고, 느리게 내려주는 가게 콘셉트에 맞게 한쪽에는 드리퍼가 줄지어 있었다. 다른 한쪽에는 검은색을 내는 구운 콩이 가득 쌓여 있었으며, 구운 콩 뒤로 보이는 콩 굽는 기계는 공장 느낌이 들기에 충분할 정도로 설치되어 있었다.계산하는 부스는 세개였는데, 국내 1호점을 개장한 자부심 가득한 직원들이 호기심 어린 손님들을 반겼다.
블루보틀 국내 1호점(성수점)
내 차례가 되었다. 미리 검색한 정보도 없었고, 단지 도쿄에서 마셨던 느낌이 좋아서 찾아왔기 때문에 메뉴도자세히 알지 못했다. 친절한 직원은 시그니처 메뉴는 미국의 한 지역 이름을 딴 황톳물이라고 안내했다. 혼자서 여러 잔 마시기는 부담스러워서 오리지널과 미제 사이에서 고민했다. 결국 미제를 선택했고 당연히 생각했던 맛과 달랐다. 분위기가 달라진 게 아니라 음료 자체가 달랐기 때문에 맛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다시 두 시간 정도 줄을 서면 오리지널을 마실 수 있었지만, 그럴 용기는 생기지 않았다. 다만 아쉬운 마음에 꾸준하게 방문했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전에 느꼈던 감동을 고스란히 받을 수 있었다.
몇 달 뒤 2호점을 시작으로 우후죽순 생겨났고, 현재 제주점과 팝업 스토어까지 포함하면 십여 개가 영업 중이다. 파란 병 덕후처럼 모든 지점을 다니면서 맛을 봤지만, 유독 맛있는 지점이 있다. 맥도널드 감자튀김 맛이 본인과 맞는 지점이 있다는 이상한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정말 다른 맛이 느껴진다. 그런데, 자세하게 설명은 못하겠다. 미묘한 맛 차이가 아니라 뇌 속 작은 알갱이를 자극하는 어떤 것에 의해서 오류를 일으키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 가장 맛있는 황톳물은 이 글을 쓰는 오늘도 생각날 정도이다.
한적 할리 없는 곳에서 한적하게(삼청, 역삼, 한남, 더현대)
초록 사이렌에 대한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파란 병과 마찬가지로 이슈가 되었던 시기에 한 시간 줄 속에서 신세를 한탄했던 적이 있다. 십여 년 전부터 꾸준하게 초록 사이렌에서 검정 물을 마시다 보니 가게에서 선물을 자주 받았다. 최근 선물 받은 오징어 냄새나는 가방도 네 개나 확보했으며, 집에서 쓰는 많은 생필품에는 사이렌이나 별이 가득하다. 텀블러와 컵도 십여 개 있으며,다이어리는연도별로 전 품목을 가지고 있으며 잘 쓰고 있다.
마흔 살이 넘은 아저씨가 사이렌 오더 주문이나 드라이브 스루에서 주문할 때 직원이 누르는 순서에 맞게 '디카페인 검정 물 톨 사이즈에 샷 추가해주세요'라고 친절하게 주문하고 '추가로 주문할 것 없습니다'까지 줄줄줄 나오는 수준이다.
그냥 좋아서 마시다 보니 선물을 받았는데, 하필 어여쁜 핑크 레이디 백이 이슈가 되면서 가볍게 받던 선물을받는 게 어려워졌다. 그렇다고 열심히 채운 프리퀀시를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결국 상품교환을위해한적한 동네 매장을 찾아서 오픈 전부터 대기했다. 다행히 두 개를 받았지만 그날 저녁뉴스에서 보도한 쓸데없는 것에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 중 한 명이 되었다. 논란이 되자 가게는 상품 신청 및 수령을 예약제로 바꾸면서 더 이상 가게 앞에서장사진을 볼일도 없고 그 속에 깊숙이 포진한 다음 걱정할 필요도 없어졌다.
이슈가 되었던 품목
핸드폰 사진첩 속 초록 사이렌과파란 병 추억 사진이 가득하다. 맛과 향의 본질도 가게를 통해 형성된 문화도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한 공간도 중요하지만 어느새 우리 삶 속에 깊숙하게 들어왔고, 이제는 함께한 추억이 가득한 소중한 공간이 되었다. 행복한 추억이 가득한 곳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늘따라존경하는 주례 선생님의 주례사가 귓가에 맴돈다. '행복한 사람은 행복한 추억을 많이 가진 사람이다. 두 사람은 평생 행복한 추억을 어떻게 만들지 고민하고 또 고민해라.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