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보글보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영경 Jun 24. 2022

나쁜 남자, 그를 사랑한 추억

구름 위를 걷는 마법사 이야기

나쁜 남자 그를 사랑한 추억



잠시 휴식

번잡한 것들을 시작하기 전에 힘을 모으는 시간

몽롱한 의식을 또렷하게 만드는 마법의 의식.

골디락스의 딱 적당한 죽보다는 조금 더 뜨거움이 좋은 선택

책과 함께라면 완벽 궁합

혼자라도 좋고 함께라면 더 필요한 순간

바쁜 삶 속에서도 손에 놓지 못하는 질긴 사랑


위험한 그와의 만남

혈관 속을 침투해 나의 뇌로 곧바로 들어가

미리 하루를 강제로 꺼내 쓰도록 재촉하는 그.


깨어있게 하지만 깨어있지 말아야 할 순간도

깨어있게 하는 눈치 없는 그.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노예가 되어

아침마다 예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신과 같은 그.


믿고 싶지 않지만 너무 많이 사랑하게 되면

나를 망치게 돼버리는 나쁜 남자 그.





누군지 그를 예상하셨나요?

나쁜 그를 여기서 공개해버리겠습니다.



그의 이름은 '페인'입니다.

성은 카, 이름은 페인.


그와 함께 했던 저의 추억을 떠올려봅니다.


저는 너무 사랑했습니다. 나쁜 남자, 그를 고등학교 때 만나 별을 보며 사랑하고 대학 때도 쓰디쓰기로 유명한 자판기 블랙을 선택할 정도로 사랑했습니다.


저는 그와 많은 밤을 함께 지새웠죠. 그가 없으면 살 수 없었어요. 밤을 새우고 하늘 위를 걷는 일을 해야 해서 저는 그를 더 사랑하게 돼버렸습니다. 제가 있는 곳은 어디든 그와 함께 했습니다. 주변 사람들 모두 늘 그와 함께여서 전 어딜 가든 그를 벗어나지 못했어요. 무한정 넘쳐나던 그의 향기에 저는 일하는 동안에는 특히 그에게 흠뻑 취해있었지요.



저는 구름 위를 걷는 마법사입니다. 아침 몽롱한 이륙을 하던 순간 저는 사람들에게 마법을 겁니다. 백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눈을 감고 각자의 꿈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마법이지요. 분주한 여행의 시작과 끝에 자신의 몸을 작고 좁은 자기만의 한 시간짜리 의자에 앉으면 사람들은 그제야 털썩 앉아 큰 숨을 몰아쉽니다. 정해진 숫자와 알파벳 기호를 찾고는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아무렇지도 않게 구겨앉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은 무거웠던 세상의 짐은 위에 던져 넣고 쾅 닫아버립니다. 크든 작든 자신의 몸 하나 테트리스 블록 조각처럼 꼭 끼워놓은 자리에서 사람들은 제 마법에 걸려 아주 편안하게 꿈에 빠져듭니다.



저는 그들의 꿈 사이에서 걷습니다. 사뿐사뿐 사람들의 평화로운 눈 감은 얼굴을 바라봅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고 있을 때 아기가 됩니다. 남녀노소 각각 생김이 다른 사람들이 아기가 되어 쌔액쌕 마법에 빠져듭니다. 눈을 감으면 누구나 똑같이 평화로운 아기의 얼굴로 변합니다. 저는 엄마처럼 바라보며 지나갑니다. 살금살금 그들의 꿈을 지켜주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자면서도 피곤하게 벌린 누군가의 입에서 나쁜 남자, 그를 찾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저에게 배어있는 그의 향기를 맡았습니다. 눈을 감은 채 부스럭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낳자마자 냄새로 더듬더듬 엄마젖을 향해 입을 오물거리던 신생아처럼 눈을 감은 아기들이 그를 맡았습니다. 마법의 효력이 약해지고 있어요. 결국 나쁜 그이 덕분에 아기들은 눈을 뜨고 말았습니다.



짧은 15분, 이륙시간 동안 마법은 끝이 났습니다. 다시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그를 소개하며 긴 복도의 끝까지 구름 위를 걷습니다. 더 이상 아기가 아니라서 아쉬웠던 그들의 뜬눈을 보면서 말을 걸었습니다.

그를 만난 사람들은 다시 보통 사람이 되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동안 다시 마법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움직임이 모두 멈춘 후, 단잠에서 깨어난 아기들은 그 작은 의자를 벗어나 언제 이런 곳에 있었느냐는 듯이 몸을 쫙 크게 펼치고 나서 삶의 짐을 다시 뒤적거려 이고 지고 나갑니다.


작고 길쭉한 캡슐에 붙은 문에서 알약들이 터져 쏟아집니다. 어서 빨리 뛰쳐나가고 싶어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순식간에 빛 속에 녹아 사라져 버립니다. 그의 향기가 가득했던 이곳을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갑니다. 내 아기들이 떠났습니다. 나는 잠시 침묵 속에서 가버린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있습니다.


잠시 외롭지만 괜찮습니다. 저에겐 그가 있으니까요.


저는 그와 다시 둘만의 시간을 갖습니다.

사람들의 여운, 온기가 남은 의자에 앉아서

그의 새로운 향기를 컵에 담아 저를 채웁니다.

그 의자에서 제 스스로 마법에 걸려보려 눈을 감아보지만 나쁜 그가 저를 재워주지 않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 그와의 만남이 식으니

A, B, C 번호가 붙은 표를 든 그림자들이 다시 하나둘씩 다가오고 있네요.



저는 마법사입니다.

사람들을 잠시 동안 마법을 걸어 아이로 만들어 하늘로 데려갑니다.

그리고 세상의 짐을 잠시 잊게 만들어주다 향기로 깨워주는 마법사입니다.


그는 저의 마법을 깨우는 약입니다.

검은 가루를 흘려 만드는 마법으로 취한 눈을 뜨게 만드는 검은 물약입니다.

마법사인 저는 제 마법을 풀어버리는 나쁜 그를 사랑하는 것이 최대 약점입니다.

마법을 쓰지 못하는 지금도 그를 너무도 사랑하고 있습니다. 가끔 밤마다 그를 만나고 싶어 몸서리가 쳐집니다.



검은 그의 향기를 깊이 사랑했던 저의 추억은 시간이 흘러 이제 많이 달라져 있습니다. 눈 감은 많은 아기가 아니라 다른 눈을 뜨고 한 줄 한 줄 글을 읽는 당신과 만나고 있습니다.

나와 글로 연결되어 있는 내 앞의 당신에게 제 새로운 마법을 겁니다.



이젠 깨어나도 떠나지 마세요.


이제는 나도 당신도 여기서 내릴 수 없어요.


여기에 머물러요. 나쁜 그를 우리 함께 사랑하기로 해요.



*사진 : 이제 곧 25주년이 되는 사랑하는 입사동기가 보내준 기내 사진.


6월 4주
보글보글 글놀이
"커피"

*매거진의 이전 글 아르웬 작가님


*매거진의 이전 글 JOO 작가님


6명의 고정 작가와 객원 작가의 참여로 보석 같고 보배로운 글을 써 내려갈 '보글보글'은 함께 쓰는 매거진입니다.

다양한 글을 각각의 색으로 매일 한 편씩 발행됩니다.

참여를 원하시는 작가님들은 매주 일요일 주제가 나간 이후, 댓글로 [제안] 해 주시면 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 집 보물, 캡슐 커피 머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