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치고 구름이 듬성듬성 걸린 하늘 덕분에 하루 종일 눈이 맑았다. 열몇 시간 지났는데 하늘이 열렸고, 세상이 변했다. 거짓말 같이 한 순간에 변한 세상에서 며칠 동안 빌런은 폭우였다. 악역이 되어 버린 비가 남긴 흔적은 슬픈 영상과 기사로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속을 긁었다. 읽거나 보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도 없었지만 폭우보다 더 악한 내 손가락은 콘텐츠를 하나씩 눌러댔다. 소식을 접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함께 아파할 뿐인데, 계속 찾아보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래도 긍정적인 부분이 하나 있다면 다시 한번 새로운 다짐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같은 상황이 다시 일어나면 내가 아는 모두를 무너지거나 잠기지 않는 집에 가둬두고 지켜야겠다는 생각이다.
비가 오는 동안 술이 생각났다. 살면서 술 생각을 이렇게 많이 한 적이 있었나 할 정도로 꾸준하게 생각했다. 하루를 끝내고 진이 빠졌을 때 생각나는 맥주 한 잔이 아닌 진짜 술을 마시고 싶었다. 세상은 비로 씻기는데, 내 안에는 씻기지 않은 무엇이 남은 것 같았다. 속을 씻는데 비와 같은 존재는 단연 시간이다. 시간을 접을 수는 없으니 조금 더 빨리 씻으려고 비누칠하는데, 운동과 글 그리고 술이 효과적이다. 글을 쓰고 운동을 해도 찝찝한 기운이 남다 보니 술이 생각났던 것 같다.
일하는 곳에서 밤을 새우고 다음 날 저녁, 한 잔 마셔야 한다는 의무감이 가득할 때 동료 한 명이 말을 건넸다. 오늘 한 잔 하시죠. 좋았다. 퇴근하고 한 잔 할 생각에 룰루랄라 일을 마무리하는데, 아내에게 카톡이 왔다. 여보, 저녁에 집에 갈게! 저녁 같이 먹자라고 쓰여 있었다. 약속 잡은 지 오 분도 지나지 않은 선약을 취소하고 아내와 저녁을 먹기로 결정했다. 당연한 일이다.
사실, 여느 술자리보다 아내와 함께할 때 가장 행복하다. 둘이서 맛있는 음식을 놓고 잔을 기울이는 게 좋다. 둘 다 술을 못하는데, 함께 마실 때마저 한 명은 제로콜라를 마신다. 대부분 내가 술을 마시고 가뭄에 콩 나듯 아내가 마신다. 진심으로 가끔은 눈물 날 정도로 행복하다. 내가 행복감을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모든 불안과 걱정이 사라지는 것인데, 특히, 아내가 없는 상태에서 술을 마실 때 죄를 짓는 극도로 불안한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기 때문이다.
여하튼, 아내 덕분에 마시고 싶은 술을 한 잔 했다. 사랑스러운 아내와 한 잔 하니 마음이 더 편안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 천사들이 잠들었으면 천국이었을 텐데, 침대에 눕자마자 나타나서 춤을 췄다. 술은 내가 마셨는데, 춤은 아이들이 춘다. 삼일 동안 무더위를 씻긴 폭우나 폭우로 보기 싫은 기사를 씻어낸 술이나 두 딸의 현란한 춤사위 앞에서 모두 사라졌다.
나를 제대로 씻겼다. 그래. 씻김 굿이다. 요상한 씻김굿 같은 춤을 계속 보려면 우리 아이들이 무너지거나 잠기지 않는 집에서 살도록 해야겠다. 그래야 나도 편안하게 잠들 수 있을 테니.
* 어쩌다 보니 브런치에서 올해 절반을 통째로 쉬었습니다.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남들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이유였습니다. 이제 다시 글을 쓰려는데, 쉽지 않아서 고이 간직했던 글을 꺼냈고 다듬어서 올립니다.천천히 소통할게요.